Regressor Instruction Manual

Regression Manual 264

제1황녀 샤를리아(1)

사람의 호감을 사는 방법은 생각보다 쉽다.

인간관계 역시 대 다수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어렵지 않다.

밥 한 번 같이 먹고 사우나 한 번 같이 가는 것 역시 중요하지만.

중요한 것은 내가 타인에게 얼마나 맞춰줄 수 있는가에 있다.

대상이 어떤 걸 좋아하는지, 원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무엇을 듣고 싶어 하는지.

대화하는 내내 생각하며 최대한 맞춰주는 것이 중요하다.

처음에는 굳이 저항하지 않아도 된다.

내 소신을 주장할 필요도 없다.

상대가 보수적인 타입이라면 나 역시 보수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들어주고 맞장구 쳐주는 걸로 끝.

상대방이 진보의 입장에 서 있다면 진보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들어주고 맞장구를 쳐주는 것으로 끝.

정말 겨우 이걸로 끝이라는 거다.

사형 제도로 예를 들어보면 더욱더 간단.

대상이 사형제도에 찬성하는 입장이라면 그에 상응하는 정보와 대상이 듣고 싶은 이야기를 준비하면 된다.

조금 더 전문적인 이야기라면 더욱좋다.

사형제도의 필요성에 대해 목소리를 올리고 열띤 토론을 하며 대상의 말에 적극 동조한다.

당연히 대상은 생각할 수밖에 없다.

‘아! 우리가 생각보다 잘 맞는구나! 우리는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구나!’

물론 내게도 소신이라는 게 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내가 반대의 입장에 있다고 해서 굳이 반대한다고 외칠 필요가 없다는 거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은 여기에서 탈락.

열을 내거나 대화 창구를 닫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내 입장을 상대방에게 전하고 싶다면 당장 화를 내는 게 아니라 시간을 조금만 더 들이면 된다.

대상이 우리가 잘 맞는 친구고 같은 입장을 표명하는 동료라고 인식한 순간부터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내 의견을 덧붙이면 된다.

온탕에 들어간 개구리는 열탕이 되어도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게 대상과 친분을 쌓는 방법이고 간신이 권력자를 주무르는 방법이다.

‘바젤 추기경….’

바젤 추기경 같은 경우에는 무척이나 오랜 시간을 들여 이 작업을 해왔다.

함께 시간을 보내며 계속해서 동조하고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방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주고 마찬가지로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화를 나누기 위해 사전에 공부를 해가는 것 역시 필수.

신학에 능통해야 했고 이단과 악마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어야 했다.

대화를 하는 것보다 그의 지식 수준을 따라잡기 위해 공부하는 시간이 더 길었으니 다른 말은 필요 없으리라.

서로 끊어지려야 끊어질 수 없는 관계를 구축하는 데 걸린 기간만 수개월.

당연히 황제 역시 그 정도의 시간을 생각하고 작업에 들어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효과는 상상하는 것 이상.

가끔 이런 경우가 있다.

아무리 상대방의 마음에 들려고 발악하는데도 친해질 수 없는 경우.

대화의 주제와 성향 이전에 인간으로서의 핀트가 맞지 않는다는 느낌.

당연하지만 늙은 황제는 그 반대의 경우였다.

핀트가 완벽하게 맞는다는 느낌이었다.

이 황제는 완벽한 형태의 간신을 원하고 있었고 나는 그 조건에 백 퍼센트 부합하고 있다.

‘키야….’

이지혜와는 다른 형태의 영혼의 단짝.

계속해서 말을 걸어오는 바람에 이쪽이 불편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제국 8좌 행진이 끝나고 파티가 시작되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대화를 하고 싶어 하는 눈치다.

장담컨대 이 황제가 다른 귀족들의 눈치를 보지 않았더라면 계속해서 이쪽에 붙어 있었을 것이다.

늙은 영감 역시 해야 할 일이 많다.

유력 귀족들과 이야기를 나눠야 하고 교황청의 인사들과도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

바쁜 것이 당연하다.

물론 새로 제국 8좌로 임명된 8명의 이방인들도 바쁜 것은 마찬가지.

이런 모임이 있을 때마다 제법 주목받기는 했지만 오늘처럼 많은 관심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자유 도시 린델, 실리아, 다완은 신성제국의 품 안에 있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독립된 지역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그 도시들을 컨트롤하는 도시 내의 강자들도 마찬가지다.

간접적으로는 제국에 많은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지만 직접적인 활동을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는 이야기다.

상황이 완전히 변해버렸으니 유력 귀족들이 달라붙어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제국 8좌라는 이름으로 신성제국의 정치에 약소하게나마 힘을 실을 수 있게 된 것.

모르긴 몰라도 반 황제파에 선 귀족들이나 정세 변화에 민감한 이들은 오늘의 일을 더욱더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있으리라.

“하하하. 제국민의 환호성이 계속해서 울리는 듯합니다.”

“그야 그럴 만도 하지요. 어디 신성제국에 자리 잡은 모험가 분들의 유명세가 하루아침에 만들어졌습니까?”

“아암. 암. 그렇고말고.”

“요즘 아이들 중에 모험가의 일지를 읽지 않는 아이가 없다고 들었습니다. 특히나 린델에서 나온 모험일지들은 제가 봐도 인상적인 이야기들이 많으니까요. 마치 동화책에서나 봐왔던 영웅이나 용사 같은 이들의 이야기라도 보는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하하하. 영웅이나 용사와 다를 게 뭐가 있겠습니까. 황제 폐하가 직접 선포하신 제국 8좌는 이미 제국의 영웅이 맞지요.”

“그렇고말고요!”

대충 이런 상황이라는 거다.

너나 할 것 없이 달려들어 이런 저런 말을 떠들어대는 귀족들을 보니 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한 사람에게 적어도 일곱 여덟 명 이상이 달라붙어 있다.

파티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건만 벌써부터 피곤해하는 이들이 많이 보인다.

차희라는 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수많은 귀족들에게 둘러싸여 이야기를 나누는 중.

입가에 미소를 띄우고 있지만 저게 빡치기 일보 직전의 표정이라는 건 누구보다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박연주는 제법 능숙하게 대화를 주도하고 있었고 카스가노 유노의 경우에는 담담하게 이야기를 들어주는 쪽이다.

사랑스러운 회귀자 역시 마찬가지.

‘귀족 예법도 배워놨었나.’

확실히 손짓이나 몸짓 같은 것에 예법이 밴 느낌이다.

평소보다 신경 쓰고 있다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나 역시 그동안 귀족 부인들과 자주 몰려다니며 여러 가지를 배워왔지만 김현성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하지는 못한다.

‘1회 차에 노력 좀 했었겠네….’

따위의 생각을 하며 고개를 돌리자 금발 머리를 가지고 있는 귀족 하나가 말을 이어왔다.

“제 딸아이도 이기영 명예주교님이 소개된 모험일지를 사 달라고 난리가 아닙니다. 사고만 치는 철부지 인데 신기하게도 책만 쥐어주면 조용해지니…. 하하하.”

‘거짓말 하나는 잘하네.’

그래도 내 환심을 사기 위해 저런 말을 했다는 거니 적당히 받아줘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것 참 영광이로군요. 나보트 남작님. 하하. 언제 한번 시간이 난다면 영지로 찾아뵈어도 괜찮을는지요. 물론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찾아갈 생각 따위는 없지만 이 정도의 립서비스는 해주는 게 좋다.

“아아! 그렇게 해주신다면 감사하지요!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나보트 남작이 다스리는 영지가… 아마 동서쪽 부근에 있는 가르시아….”

“알아주시니 영광입니다. 이기영 명예주교님. 사실 보잘 것 없는 작은 영지이기는 하지만 거울 호수라고 불리는 아름다운 호수가 있어 가을이면 뱃놀이를 즐기기 위해 찾는 장소입니다. 아마 연인과 함께 오시면 좋은 추억을 만드실 수 있으실 겁니다.”

“아. 그렇습니까?”

내 옆에 꼭 달라붙어 있는 정하얀을 의식한 발언.

아무 말 않고 영업용 미소를 띄우고만 있었던 정하얀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보니 함께 놀러가자고 이야기하는 것만 같았다.

“아… 저도 가본 적 있어요. 마치 거울에 비친 것처럼 하늘을 수놓은 듯한 호수가 참 매력적인 장소였는데… 남편이 건강할 때는 매년 찾는 장소였었죠.”

“카트린 공작부인도 다녀오셨군요.”

“네, 이기영 님. 아마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이거 다른 분들도 이렇게 말씀해 주시니 내년에라도 당장 달려 가봐야겠습니다. 하하하.”

“하하하하하하.”

당연히 갈 생각은 없다.

그 거울 호수라는 곳에 보물이라도 숨겨져 있으면 또 모르겠지만 단순한 관광을 위해서 그 먼 곳까지 갈 여유 따위는 없다.

‘그나저나 분위기 참 좋네.’

불과 하루 전에 대륙 8좌와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 자체가 거짓말 같다.

여유를 즐기고 있는 귀족들을 보니 전쟁 같은 것은 먼 나라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어느 곳이나 권력자들은 보통 이런 식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잔을 들어 올리는 것은 물론, 하하호호 하는 웃음소리가 연회장을 가득 메우고 귀부인들은 자신들의 사치품을 자랑한다.

제국의 미래를 이야기 하는 이들도 있기는 하지만 얼굴이 붉어진 것을 보니 벌써 몇 잔 들이켠 모양이다.

‘탁상공론.’

차라리 탁상공론이 났다.

술에 취한 채로 제국의 미래를 논한다는 것부터가 아이러니다.

아마 제국의 일부 지식인들이 이 광경을 바라본다면 혀를 끌끌 차며 손가락질을 할 것이다.

만약 그런 짓을 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다면 말이다.

‘나야 뭐 개뿔 상관도 없지만.’

제국의 미래 말고도 신경 쓸 게 많다.

겨우 그런 것보다는 지금 이 시점에 계속해서 나를 경계하는 샤를롯트 황녀가 더 신경 쓰인다는 거다.

‘너무 간신배처럼 굴었나.’

당장 황제의 마음에 들겠다고 템포를 올린 게 그녀의 경계를 산 원인이었다.

물론 앞서 말한 것처럼 황제가 너무 나를 마음에 들어 한 부작용이기도 했다.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은데….’

‘생각하고 있는 게 다르다’ 이전에 그다지 핀트가 맞지 않는 것 같은 느낌.

성향과는 별개로 왠지 모르게 친해질 수 없는 종류의 인간이라는 인상을 받고 있었다.

차기 황제에 가까운 만큼 사람인 만큼 노력이야 하겠지만 그만큼 시간 소비가 클 수밖에 없다는 거다.

‘시간이 조금 지난 뒤에 다시 한번 작업 치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짜악!

하는 소리와 함께 어딘가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온 것.

“죄, 죄송합니다. 죄, 죄송합니다.”

‘저건 또 뭐야.’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시녀 하나가 고개를 숙이며 계속해서 머리를 조아렸고 그 앞에 있는 여자는 분이 풀리지 않는다는 듯이 씩씩 대고 있었다.

대충 일이 어떻게 된 건지는 듣지 않아도 알 정도.

‘제1황녀.’

제1황녀 샤를리아다.

입고 있는 하얀색 드레스에 와인이 엎질러져 있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시녀가 발이라도 헛디딘 모양.

술에 잔뜩 취해 붉어진 얼굴로 다시 한번 시녀의 뺨을 후려치는 모습은 표독스러운 악녀의 정석이다.

그 와중에 자신의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꼴은 가관.

‘키야….’

“네년이… 감히 네년이!”

“죄송합니다. 황녀 전하. 죽, 죽여주시옵소서.”

“검을 가져와라. 지금 당장 이년의 목을 직접 쳐내지 않고서는 화가 풀리지 않을 것 같으니. 어서!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게냐!”

‘저거 완전히 미친년인데.’

본인의 실수가 아니고 술에 취했다고는 해도 저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 자체가 마이너스 요인이다.

어째서 아까부터 그녀의 주변으로 다른 귀족들이 모여들지 않았는지 잘 알 것 같았다.

‘분노 조절 장애라도 있는 건가. 생각이 없는 건가.’

성향과 기벽을 보고서는 저 여자가 답이 없는 쪽이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을 보니 더욱더 그렇게 느껴진다.

몇몇 기사와 귀족이 그녀를 자중시키려고 하지만 이미 통제가 불가능한 상황.

술에 제대로 꼴아 있는 황녀의 모습은 망나니 그 자체였다..

자주 봐오던 장면인지 황제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혀를 차고 있었고 제2황녀 샤를롯트는 이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뭔가 재밌는 게 눈에 띈 것은 바로 그때.

“아주 콩가루네. 이거….”

계속해서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하고 있는 시녀를 마음의 눈으로 확인하자마자 눈에 띈 사실.

별건 아니다.

다만 확실히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올 스탯 60이상.

‘저런 여자가 발을 헛디뎌 넘어졌다고?’

장담컨대 하늘이 무너져도 불가능한 일이다.

다분히 어떤 목적이 있어 일부로 와인을 엎질렀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이를 테면 1황녀 샤를리아의 이미지를 깎아 내리려는 목적.

안 그래도 미친년을 더 미친년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이의 소행.

범인이야 누군지 뻔할 뻔자.

‘샤를롯트.’

이유 역시 심플하다.

‘생각보다 욕심이 많구만.’

황위를 위한 보이지 않는 싸움이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