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Instruction Manual

Regression Manual 341zed

후유증(7)

계속해서 들려오는 목소리들이 현 상황이 얼마나 급박한지 말해주는 것 같았다.

당황한 이들의 얼굴과 뒷모습이 눈에 보인 것은 당연지사.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진 장내에 교국의 지도자와 라이오스의 프리스티나 님 역시 허겁지겁 달려오며 모습을 드러냈다.

당연하지만 인사를 할 틈은 없었다. 곧바로 이기영 님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인파 속으로 사라졌으니까.

일찍이 자리해 있던 교국의 고위사제들의 신성력은 그야말로 끊임없이 방 안을 활짝 밝히는 중.

그 가운데, 사람들은 모두 제각각이다.

기도를 드리는 이도 있었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보는 이도 있다.

연신 고위사제에게 말을 건네는 박덕구 님의 모습과 울부짖는 정하얀 님.

그 모습은 처절해 보이기까지 했다.

다른 이들 역시 다르지 않았다.

너나 할 것 없이 초조한 모습이다.

“끄으으으. 흐어어어어엉. 오빠아….”

“괜, 괜찮을거요. 틀림없이 괜찮을거요. 진정하라니까.”

“흐어어어어엉. 히끅. 안 돼. 싫어어어어….”

“거, 의사 양반, 무슨 방법이라도 없는 거요? 이렇게 괴로워하는데! 몸에 이상이 없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요?”

“몸은 정상입니다. 트, 틀림없습니다. 분명히 몸은 정상인데… 원인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일단은 신성력을 주입하는 것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것 같습니다. 후유증을 겪고 계신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이렇게 까지 괴로워하실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며, 명예추기경님께서는 계속해서 괜찮다고 말씀하셔서….”

“그걸 믿은 거요!? 이게 어딜 봐서 정상이라는 거요! 우리 형님 성정을 알면서도 그걸 그대로 받아들인 거요?”

“저, 정말 죄송합니다, 박덕구 님. 저 역시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명예추기경님께서….”

“나한테 죄송할 게 아니지! 도대체 어디가 아픈지 원인을 알아야 할 것 아니오!”

“진정하세요, 덕구 씨. 소리를 지른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그, 그럼 어떻게 하라는 거요, 현성 형씨. 무슨 후유증을 앓고 있는지부터 알아야지 뭐라도 어떻게 조치를 취할 거 아니오? 무, 물론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지만… 그래도 일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는 알아야겠소.”

“자세한 사정은 저도 잘 모릅니다. 그날 이후로 후유증을 앓게 되었다는 것밖에는…. 상식적으로 아무런 부작용이 없을 리가 없겠죠. 특히 기영 씨의 신체로 그 정도 출력의 마력을 뿜어냈으니 하얀 씨보다 더욱 커다란 리바운드를 받아들였을 겁니다. 겉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속에서는 충격이 중첩되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 그럼 평소에는 어떻게….”

“기영 씨가 몸을 회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기영 씨가 가지고 있는 특수한 체질 때문입니다. 신성력과 마력을 공유하고 있는 특별한 체질 말입니다. 미리 말씀드리지 못한 점은 저 역시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덕구 씨와 하얀 씨에게는 특히나 비밀로 해달라고 말씀하셔서…. 정말로 죄송합니다.”

“아, 아니오. 형씨가 고개 숙일 문제가 아니오. 나였어도 형님이 그렇게 말했다면 입 다물고 있었을 거요. 혀, 형님은 분명히 참아야 한다고 생각한 거요. 바쁜 시기니까. 중요한 일이니까 괜히 짐이 되기 싫었던 거요.”

“…….”

“다른 사람들한테 걱정을 끼치기 싫어서, 혼자서 삭히고 있었을 게 분명하다니까. 매일 가슴을 쥐어뜯으면서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의연하게 행동했을 거요.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고작 우리가 걱정하는 게 싫어서 그렇게, 웃으면서 버티고 있었던 거라니까.”

“…….”

“끄윽…. 대신 아플 수만 있다면… 그렇게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요. 나는 정말로 못 보겠소. 형님이 이렇게 괴로워하는 건 때려 죽여도 보지 못할 것 같다니까.”

“이해합니다. 저도 같은 심정입니다.”

“제길. 제길!”

박덕구 님은 등을 돌린 채 주먹을 꽉 쥐셨다.

‘내 생각이 맞아.’

물론 처음에는 단순한 의심이었다.

하지만 저들의 대화를 들으면 들을수록 점점 더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킨 것은 당연지사.

아직 모든 게 확실하지는 않지만 만약 이기영 명예추기경님이 정말로 베니고어 여신님과 엘룬 님의 계시를 받으셨다면, 이쪽 역시 무엇인가의 인도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내가 현재 라이오스의 접견실에서 이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모든 게 퍼즐처럼 짜 맞추어진 하나의 커다란 계시일지도 모른다.

‘맞아.’

어떻게 생각해도 그렇게밖에 결론을 내릴 수가 없다.

물론 이쪽의 추측이 맞는지 틀렸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코를 찌르는 악취가 더욱 역해지는 중이다.

물론 내 오해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도 있지만 더 이상 시간이 없다.

지금도 가슴을 부여잡으며 고통스러워하는 영웅의 영혼이 희미해지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니, 애초에 작은 빛조차 완벽한 어둠에 휩싸여 있다.

“잠시 자리를 내주세요. 제가….”

“뭐?”

“제게 방법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엘레나 님은 아까까지…. 그러고 보니 어째서 형님을 보고….”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저 역시 단순한 추측에 불과하지만 어쩌면 명예추기경님의 영혼에 문제가 생겼을 수도 있… 을 것 같습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요? 그, 그런 것까지 알 수 있는 거요?”

“말 그대로입니다. 현 이기영 명예추기경님의 상태는 단순히 후유증이 들어섰다고만 판단하기 힘든 상태입니다. 만약 정말로 몸에 이상이 없다면 육체에 새겨진 상처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교국의 고위사제분들이 눈치채지 못하실 정도라면 더욱더요.”

“육체의 상처가 아니라면… 여, 영혼의 상처라도 된다는 거요?”

“일단은 그렇게 설명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는 영역인지도 불분명하지만…. 명예추기경님을 이대로 방치한다면 틀림없이 문제가 생길 겁니다. 저 역시 이번 일의 결과가 어떻게 흘러가게 될지 모릅니다. 한 가지 명확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현재 명예추기경님의 상태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로 처참하다는 것입니다. 손을 쓰지 않으면 곧바로 무너져 내릴 정도로요.”

“알기 쉽게 설명해 주쇼.”

“오염됐다고 표현하는 게 가장 적절할 것 같습니다.”

“오염… 말입니까?”

“네. 어떻게 표현하기가 힘들 정도로 오염되어 있습니다. 아마 그 날 악마의 힘에 정면으로 저항하다 얻은 부작용으로….”

“엘프 공주님이 방금 구역질을 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요?”

“부… 끄럽지만 그렇습니다.”

“아니요. 부끄러워 할 필요는 없소. 그만큼 형님의 상태가 처참했다는 거니까. 이, 이해할 수 있다니까. 그보다 영혼의 문제가 생기면 어, 어떻게 되는 거요?”

“오염되어 무너지는 이들을 직접 본 적은 없습니다만 아마 신체부터 무너지기 시작할 가능성이 큽니다. 못에 고인 물이 썩으면 그 주변도 함께 영향을 받는 것처럼 말입니다. 현재의 명예추기경님의 상태가 딱 그렇습니다. 아마 저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고 계실 겁니다.”

“그, 그럼 어떻게 좀 해보쇼. 빨리! 빨리 형님 좀 어떻게 해주쇼!”

고개를 끄덕이자 영웅들이 일단 자리를 비키주었다.

두 눈에 깃든 것은 기대와 의심이다.

당연히 이해할 수 있다. 섭섭하기는 했지만 스스로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소리였으니까.

“혹시나 뭔가 잘못되거나 다른 징후가 보이면….”

“의심하시는 것도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저는 에베리아 왕국을 대표해 이 자리에 있는 것이지 결코 영웅 분들께 해를 끼치기 위해 자리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 제가 이기영 님께 해를 끼치려고 한다면 제 목을 치셔도 됩니다.”

“엘레나 님! 그런!”

“괜찮을 겁니다, 루드비히. 걱정하지 마세요. 전부 다 잘될 겁니다. 어째서 제가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알 것 같습니다. 틀림없이 엘룬 님께서 저를 이곳으로 인도하신 겁니다.”

발을 옮길 때마다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역한 기운이 느껴졌다.

하지만 입술을 꽉 깨물고 평정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괴로운 것은 아마 눈앞에 있는 영웅일 터.

고통스러운 것은 이쪽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이 썩어 문드러질 때까지 악마에게 저항한 숭고한 영혼이다.

‘괴로워.’

마치 이쪽의 영혼마저 썩어 문드러질 것처럼 역하다.

이런 상황에서 아직까지 순수함이 남아 있다는 게 놀라울 지경.

본래의 영혼이 어땠는지 가늠하기 힘들 정도다.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감각에는 최대한 머리를 흔들며 앞에 서자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모습이 비친다.

숨 쉬기가 힘든지 계속해서 호흡을 헐떡였고 핏발이 선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나온다.

고통을 참기 위해 입술을 깨물고 있었지만 그 안에서는 비참한 비명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심지어 사정없이 떨리는 다리와 비틀려 있는 몸은 이 괴로움이 어느 정도인지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거대한 악마를 앞에 두고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던 영웅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자신의 몸이 부서지는 것에서도 괴로워하지 않았던 이 빛의 영웅은 영혼의 오염에 피눈물을 흘릴 정도로 괴로워하고 있다.

어떻게….

어떻게 이렇게까지 숭고할 수 있을까.

어떻게 이렇게까지 한 인간이 이타적이고 성스러울 수 있을까.

혹여나 내가 걱정할까, 이기영 님은 애써 비명을 삼키며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왔다.

천천히 그의 가슴에 손을 올린다.

썩은 구더기를 만지는 듯한 감각이었지만 다시 한번 입술을 꽉 깨문 이후에 다음 손을 포갠다.

‘역겹지도 더럽지도 않아.’

효과가 있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계속해서 몸 안 속에 있는 기운을 밀어내기 시작.

완전히 잡아먹히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엘룬이시여 이 숭고한 영혼 때문에 저를 이곳으로 인도하신 줄 압니다. 당신의 종이 부탁드리오니 부디 이분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힘을 내려주시옵소서. 부탁드립니다. 제발.’

부디 부탁드립니다.

‘부디… 제 모든 것을 희생하더라고 그를 결코 저버리지 않겠나이다.’

소름끼치는 감각을 애써 짓누르며 계속해서 그의 손을 잡고 있을 때였다.

“아!”

눈앞에 있는 이의 숨이 천천히 안정된 것.

기형적으로 꺾인 허리도, 부들부들 떨리던 다리도 모두 정상으로 돌아오기 시작한다.

괴로워하던 영웅은 그 자리에 없다.

오히려 의아하다는 눈으로 자신의 몸을 만져보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얼굴이 눈에 띈다.

‘계시였어. 계시가 맞았어!’

[영웅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 합니다.]

[내 소중한 딸아… 도망…(0/1)]

[알 수 없는 이유로 영웅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취소됩니다.]

뭔가 조금 이해가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지만.

[전설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 합니다.]

[계시의 이행(0/1)]

내게 주어진 역할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형님! 형님!”

“오빠, 오빠. 흐으으윽.”

커다란 환호성이 들려오는 순간, 작게 웃음 지을 수밖에 없었다.

“감사합니다. 엘룬이시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