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Instruction Manual
Regression Manual 405
마지막 전투(2)
“이 개새끼….”
악마소환사 새끼가 노린 게 무엇인지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지휘체계의 혼란.
어떻게 보면 외통수를 맞았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다.
현재 전장에 나가 있는 야전 지휘관들과 일부 병력이 느낄 혼란이 어느 정도인지 상상하기 힘들 정도였다.
계속해서 유지되고 있었던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일순간 마비됐다.
사태의 심각성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아군이 혼란을 느끼지 않는 것이 이상하리라.
‘너무 의지했어.’
그 말 그대로였다.
병력 전체를 마치 한 몸처럼 유기적으로 움직이던 수단이었다.
하지만 너무 일방적인 수단이기도 하다.
한 컨트롤 타워에 수많은 병력에 대한 통제권이 달려 있다는 것.
이 장점이 약점이 될 수 있다는 걸 생각하지 못했다.
간단히 말해 아군이 가지고 있었던 이점이 한순간에 날아갔다는 거다.
이쪽이 여신의 거울을 통해 병력을 통제하고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던 모양.
조금만 머리가 돌아가는 녀석이라면 깨닫는 게 당연하겠지만 그에 대한 대응책이 벌써 마련되었을 거라는 건 예상하지 못했다.
지난 전투와 지지난 전투의 포석이 이걸 노리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말았다.
궁금해지는 것은 어떤 식으로 이쪽의 컨트롤 타워를 완전히 마비시킬 수 있었는가.
‘어떻게 마비시킨 거지?’
마법이라는 건 외에는 정확한 수단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마도공학으로 이루어진 아티팩트를 무효화하는 수단이 있을 수도 있고 어쩌면 유기적으로 연결된 마력을 일순간 끊어버렸을 수도 있다.
악마소환사 진청 본인이 바로 경지에 오른 마법사.
지난 전투를 직접 시찰했을 가능성도 결코 낮지 않다.
여러 생각과 추측이 머릿속에 날아 들어와 꽂혔지만 중요한 건 과정이 아닌 결과.
어떻게 아군 측에 엿을 먹였느냐 보다 이 엿을 어떻게 되갚아 주느냐가 더 중요했다.
하지만 너무 긴박한 상황에 욕지거리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시발….”
“당황할 필요 없어요. 마력 홀로그램이 없어도 지휘체계를 유지할 수는 있으니까. 이전처럼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는 가능할 거예요. 네. 가능해요.”
“보수할 수는 없는 건가?”
“마력 홀로그램은 오빠 관할이잖아요. 그 아들내미라도 데려오지 그랬어요. 뭐… 온다고 해도 별로 효과가 있을 것 같지가 않지만. 언제 다시 재개될지 모르지만 현재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일단 병력을 수습하는 게 먼저지. 이제 막 적응하던 참이었는데 이거 심기 불편하네요. 정말로… 뒤통수를 맞은 느낌인데.”
“…….”
“솔직히 말할 게요, 오빠.”
“응.”
“이길 거라는 보장은 없어요. 상대 지휘관이 저보다 다섯 수 정도는 더 내다보고 있는 것 같거든요. 여신의 거울이 있다면 어떻게든 비벼볼 수 있었겠지만 지금 이 시점부터는 무리예요. 최대한 버티기는 하겠지만….”
“안 좋은 소식이네.”
“저도 자신 있게 이길 수 있다 말하고 싶지만 혹시라도 무너질 걸 대비해 미리 말씀드리는 거예요. 최악의 경우를 생각해야 하니까. 극심한 피해를 볼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해요.”
자연스럽게 지휘통제실을 벗어나며 입을 열어오는 이지혜의 모습에는 정체모를 불안감이 감돌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대비해 다른 종류의 지휘체계를 마련해 놓았다는 건 다행이라 말할 수 있지만, 이건 말 그대로 대타에 가깝다.
기존보다 효율이 떨어질 뿐더러 익숙하지도 않다.
현재 상황에 이점은 명백히 가면 쓰레기가 가지고 있다.
아마 이지혜가 굳이 저런 식으로 입을 열어온 걸 보면 그녀로서도 이다음에 대해서는 쉽사리 장담할 수 없는 모양.
다섯 수나 앞서 있다는 것은 녀석을 너무 과대평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이지혜 그녀가 나보다 더 녀석을 잘 알고 있으니 부정확하다 말할 수는 없으리라.
어쩌다 한 번 마주친 나와는 반대로 그녀는 진청의 데이터로 이루어진 프로그램과 함께 수백 번이 넘는 종류의 게임을 시뮬레이션 했다.
여신의 거울이라는 아이템이 없다고 가정한다면 이 체스 놀이는 그녀에게 불리하게 돌아갈 것이다.
내 생각이 맞다는 듯 손톱을 물어뜯으며 인상을 구기는 이지혜와 함께 밖으로 나서자 다시 한번 전체적인 전황을 한눈에 담을 수 있었다.
‘제기랄.’
당연하지만 적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마치 기회라는 듯 아군 병력을 전체를 싸먹기 위해 팔을 벌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있다.
병법에 대해서 정확히 알지 못하는 나도 현재 아군 병력이 위험하다는 것 정도는 깨달을 수 있을 정도.
대기하고 있던 네임드들 역시 전장에 참가했는지 거대한 폭음이 연속적으로 들려오기 시작.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끊임없이 밀고 들어오는 적 병력에 아군이 휩싸인다.
“지금 수습할게요.”
수신호나 깃발을 들어 아군 병력을 컨트롤하고 있었지만 끈질기게 달라붙으며 물어뜯는 적 병력 때문에 그것마저도 쉽지 않게 느껴질 지경.
병력도 병력이지만 적진 한가운데 고립된 김현성의 소식 역시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눈에 최대한 마력을 집중하고는 있지만 녀석의 모습이 보일 리 만무.
쉽게 당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위기에 빠져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주변 병력들의 질이 그리 좋다고는 할 수 없지만 혹시나 다른 네임드들이 손을 보탠다고 가정하면 위험해질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오매불망 이쪽을 기다리고 있을 사랑스러운 회귀자를 생각하면 여기서 손가락만 빨고 있을 수는 없다는 거다.
‘김현성이 뒈지면….’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
전쟁의 승패도 승패지만 이 이후의 일도 문제.
초월적인 존재들이 회귀시킨 존재가 뒈진다면 이후 대륙의 앞날이야 불 보듯 뻔했다.
‘그건 안 돼.’
회귀자의 옆에서 달콤한 꿀을 빨며 온갖 부귀영화를 누려야 한다는 이쪽의 계획이 엉망이 된다.
‘죽으면 안 돼.’
뭐라도 할 수밖에 없는 상황.
애초에 녀석을 사지로 밀어 넣은 것은 이쪽이었으니까.
‘시발…. 김현성.’
생각을 정리하는 것은 순식간.
곧바로 입을 열자 입을 커다랗게 벌리는 이지혜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누나.”
“네?”
“나 내려간다.”
“네. 그건 알아서. 네? 미쳤어요?”
“예비대 준비해 줘. 지금 바로 출발할 거니까.”
“뭐….”
“어차피 딱히 방법도 없다며? 병력은 누나가 컨트롤하면 되니까. 나는 딱히 할 일도 없고 지금으로서는 이게 최선이야. 안쪽에서도 전체적인 명령을 하달할 지휘관이 하나 정도 있으면 좋으니까.”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지금 상황 안 보여요? 최대한 수습은 하고 있지만, 뚫고 나가는 것도 문제라고요. 저 안에 스스로 기어들어간다고요? 죽을 거예요. 분명히 죽을 거라고요.”
“어차피 전쟁에서 지면 뒈지는 건 마찬가지야.”
“…….”
“나도 내 한 몸 지킬 정도는 되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누나. 오래오래 기생충처럼 남 등골 빼먹으면서 잘 살아야지. 전부다 이뤄놓고 여기서 뒈지면 억울해서 제대로 눈도 못 감을걸.”
“그건 알지만….”
“나 간다.”
“…….”
“…….”
“알아서 해요. 제길. 멍청한 인간. 정말로 죽어도 난 몰라요.”
“안 죽어.”
그 말이 맞다.
만약 여기에서 칼이라도 맞는다면 억울해서 눈도 제대로 감을 수 없으리라.
괜스레 입술을 깨물며 발걸음을 옮기는 것은 순식간.
지휘통제구역을 완벽하게 벗어나자 후방을 보호하는 부대가 시야에 들어왔다.
저들의 눈으로 보기에도 현 상황이 비관적인지 하나같이 표정들이 좋지 않다.
아마 지휘부가 혼란스러워 하고 있는 걸 실시간으로 확인했을 테니 이쪽보다 더욱더 불안했으리라.
그나마 상황을 조금이라도 파악하고 있었던 우리와는 반대로 저들의 입장에서는 그저 혼란스러운 모습만 보였을 테니까.
심지어 나까지 바깥으로 튀어 나오자 걱정이 확신이 된 듯한 얼굴들을 보이고 있었다.
슬쩍 곁눈질로 그쪽을 흘겨보자 허겁지겁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후방 부대로 편성된 박덕구였다.
‘아, 이 새끼가 있었지.’
“혀, 형님!”
“…….”
“이게 무슨 일이요?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요?”
“자세한 이야기는 이후에. 문제가 생겼다, 덕구야. 병력 준비시켜. 지금 곧바로 내려갈 테니까.”
“저기로 간다. 이 말이요?”
“현성 씨가 고립되어 있어. 혜진 씨와 예리도 마찬가지고. 아직 괜찮은 것 같기는 하지만 곧 적군에 휩쓸릴 거다.”
“도대체 무슨 문제가 생겼길래….”
“설명하자면 길어. 아무튼 지금 당장.”
“나, 나도 가도 되는 거요?”
‘이 돼지 새끼….’
슬그머니 녀석을 바라본 것은 당연지사.
솔직히 함께 가겠다고 말할 거라 예상은 했었지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이야기를 꺼내올 줄은 생각지 못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고 있었지만 이곳에 있기가 미안했던 것 같았다.
“도,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같이 내려가 봐야겠소. 형님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다른 사람보다는 내가 옆에 있는 게 더 든든할 거요. 형님 몸에는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하게 할 거라고 말하지 않았소.”
“그래… 고맙다.”
“고마워할 일도 아니요. 다, 당연한 일이지. 그러니까 지금 우리 길드원들을 구하러 간다는 거 아니요.”
“그게 가장 중요하긴 하지만 그런 이유뿐만은 아니야.”
‘전장 안에서 사태를 수습해 줄 사람이 필요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할 수 있는 일이 많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내려가 제대로 자리를 잡는 게 최우선 사항이다.
“아, 아무튼 알겠소. 그러면 병력은….”
“아마 누, 아니, 지혜 씨가 준비해 줄 거다. 후방에는 최소한의 부대만 남기는 걸로. 규모가 크지는 않겠지만 뚫고 들어가 합류할 정도는….”
“알겠소. 그럼 빨리.”
‘일처리 하나는 빠르네.’
박덕구가 괜스레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을 때 이미 편성을 마친 부대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나 역시 가지고 있는 걸 정비하는 것은 순식간.
굉음이 들려오고 있는 전장을 바라보자 괜스레 심장이 떨려오기는 했지만 이대로 허송세월을 보내는 것보단 뭐라도 시도해 보는 것이 맞다.
슬쩍 뒤를 돌아보자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간다.”
“너무 갑작스러운데…. 거, 정말로 괜찮은 거요?”
“괜찮다니까.”
“그렇다면 문제는 없지만… 뭐, 그냥 갑자기 불안해져서 한 소리요. 이거,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는데 이렇게 형님 옆에 서서 싸우는 게 얼마만인 줄 모르겠다니까.”
“기분 탓 아니야. 실제로도 오래됐으니까.”
“이렇게 둘이 서 있으니까 튜토리얼 때도 생각나고… 뭐 그렇소.”
“쓸데없는 잡담은 끝. 간다.”
박덕구가 괜스레 방패를 두드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걸 신호로 받아들였는지 방패를 든 아군 병력이 계속해서 검으로 방패를 두드리기 시작.
투구를 고쳐 쓰는 병사들 사이에 있으니 괜스레 식은땀이 흘러나온다.
괜한 짓을 하는 건 아닐까에 대해 심각히 고민해 봤지만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이게 더 도움이 될 것이다.
점점 더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는 병력들 사이에 내가 섞여 있다는 게 잘 실감이 나지는 않은 것은 당연지사.
괜한 함성을 지르지는 않았지만 전쟁터에서 고함을 치며 돌격하는 이들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
하늘에서는 계속해서 화살과 마법들이 떨어져 내리고 병력들이 발을 굴리는 소리가 심장을 두들긴다.
어떻게 발걸음을 출발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
‘제길.’
적과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몸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한다.
마침내 아군과 적군이 부딪쳤을 때 부대 전체가 받는 충격이 이쪽에 떠밀려 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콰드드드드득.
“으아아아아아악!”
“개자식들! 죽어!”
“베니고어 여신님을 위하여!”
끊임없이 귀를 때리는 소음과 적의.
마침내 전장에 자리하게 된 것이다.
‘제기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