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Instruction Manual

523ze the Regression Manual

반 감금(1)

‘…….’

‘…….’

‘여기가 어디야?’

눈을 뜨자 익숙하지 않은 방이 가장 먼저 나를 반겼다.

고급스러운 실내는 마치 이전의 내 방을 떠올리게 할 정도였지만 왠지 모르게 달갑지가 않다.

정확히 말하면 거의 동일한 느낌이었다.

항상 사용하던 간이 연금 키트도 한쪽에 자리해 있었고, 올드 머니들이 조상에게 물려받은 것처럼 보이는 클래식하고 고풍스러운 가구들도 여전했다.

한쪽에 진열된 명품 컬렉션도 그렇다. 본래 가지고 있었던 샤넬리아 에르메스를 시작으로 꽤 재미있는 기능을 가진 명품들이 눈에 띈다.

저런 건 또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르겠다. 느낌상 김현성이 가지고 왔을 확률이 높다.

아니, 분명히 그 새끼가 가져온 것이 맞다. 철저하게 가방 위주로 세팅되어 있는 걸 보면 말이다.

아무래도 무한의 가방을 받았을 때 너무 기뻐했었던 게 아직도 녀석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모양이다.

물론 새롭게 들어온 녀석들이 그다지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이전과는 다르게 엄청나게 커진 방 안이 시선을 사로잡았으니까.

‘뭐야….’

마치 작은 방 안이 답답할까 억지로 방을 늘린 것처럼 보인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뛰어다닐 수도 있을 정도의 크기다.

그뿐만이 아니다. 조경이 되어 있는 화분들은 자그마한 정원을 연상케 할 정도였으니 다른 말이 필요할까.

커다란 책상 위에는 장인이 손으로 깎아낸 것 같은 체스판이 놓여 있었고, 벽에 붙어 있는 책장에는 읽을 만한 책들이 꽉꽉 채워져 있었다.

심심하지 말라고 가져다 놓은 것만 같았기 때문에 왠지 모르게 불안한 심정을 뒤로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

“뭐야, 이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순간적으로 다리가 풀려 넘어질 뻔했지만, 다행히도 내 육체는 아직 걷는 방법을 잊어버리지 않은 것 같았다.

차분히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본 것은 물론, 슬그머니 발걸음을 옮겨 문에 손을 뻗는다.

철컥. 철컥.

“뭐야, 뭐야.”

철컥. 철컥. 철컥.

아무리 힘을 줘도 열리지 않는 문.

뭐라고 설명이 안 되는 위화감.

‘창문은 또 어디 있어.’

바깥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고 싶건만, 이 커다란 방에 창문 하나도 없다.

아마 작은 방이었다면 별다른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으리라.

아무리 그래도 몇십 평이 넘어 보이는 방이다. 설계자가 정신이 나가거나, 극도의 도전 정신을 가진 게 아니라면 이딴 식으로 방을 설계할 리가 없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조심스럽게 유추할 수 있는 결과는 하나.

‘이거 시바, 감금당한 거 아니야?’

가장 먼저 정하얀과 저주받은 신단 때가 생각났다.

납치, 감금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건이라 할 만했으니까.

하지만 마지막의 마지막에 빛과 함께했던 정하얀의 모습을 떠올리자 금방 고개가 저어졌다.

그 사고를 터뜨리고도 정하얀이 이쪽을 납치해 여기로 옮길 리 없다.

물론 감금당했다는 것 역시 단순한 추측에 불과하다. 일단은 누가 와서 무슨 이야기라도 해줬으면 좋겠다.

사건의 진행과 결과보다 모든 게 끝난 이후의 마무리가 더 중요하다는 걸 아는 만큼 여기저기 손대야 하는 부분들이 많았으니까.

대국민 사과도 올리며 즙도 뽑아내야 했고 여기저기 싸돌아다녀야 했다.

완전히 폐허가 된 연방의 처리 작업과 복구 작업은 더욱더 문제다. 땅의 주인이 사라진 만큼 어디에 편입될 건지도 결정해야 한다.

전체적인 여론이나 이제 탄력을 받을 것으로 예정된 합동 훈련에 대한 문제도 빠르게….

‘재정비해야 하고.’

이지혜라면 믿고 맡길 수 있겠지만, 그 모든 문제를 그녀 혼자서 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모든 인류가 아픔을 딛고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하나가 되어야겠지만, 그 가운데에는 린델의 3대 길드가 자리해 있어야 했다.

그동안 여러 가지로 머리가 아팠으니 그냥 마음 편하게 쉬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지금 당장은 쉴 타이밍이라고 볼 수 없다.

습관처럼 손가락으로 침대를 툭툭 건드렸을 때였다.

천천히 방문이 열리기 시작한 것.

슬그머니 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본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문 앞에 서 있던 것은 뜻밖에도 선희영이었다.

깜짝 놀랐는지 손에 들고 있는 화분을 떨어뜨리는 게 시야에 비쳤다.

툭.

방 한구석에 자리해 있는 저 작은 정원을 관리해 주는 사람이 있기는 있었던 모양이다.

어떤 반응을 보이는 게 정답인지 아직은 알 수 없다. 일단은 살짝 미소를 짓는 것이 맞으리라.

“이… 이기영 님.”

깜짝 놀란 얼굴을 한 그녀가 허겁지겁 뛰어오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이미 눈에 가득 고인 눈물은 볼을 타고 뚝뚝 떨어져 내린다. 이윽고 그녀가 돌진하듯 나를 껴안았다.

마치 식물인간 상태에 있었던 연인을 안는 사람과 같은 반응.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녀가 그동안 나를 간호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으리라.

“이기영 님. 이기영 님.”

“아… 네. 저 여기에 있습니다.”

“흐윽… 이기영 님.”

“네, 희영 씨. 그보다… 조금 숨이 막….”

“이기영 님. 이기영 님….”

아직도 떨어지지 않고 있다. 기분이 딱히 나쁜 상황은 아니었지만, 정말로 숨을 쉬기가 힘들다.

어깨를 탁탁 두드리자, 그제야 자신이 한 짓을 깨달았는지 천천히 얼굴을 붉혔다.

“아! 아! 죄송합니다.”

“아니요, 딱히 죄송할 필요 없습니다. 희영 씨. 그보다 지금 여기는….”

“궁금하신 게 많으시겠죠. 이럴 게 아니라 지금 당장 길드 마스터께 연락하겠습니다. 다른 분들도 모두 이기영 님이 깨어나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행입니다. 정말로 다행이에요. 흑….”

“…….”

“일단 몸의 상태를 먼저 확인해 봐도 되겠습니까? 아무래도 방금 깨어나신 것 같아서….”

“네, 물론입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여전히 울먹이는 얼굴로 이쪽저쪽을 살폈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될 곳까지 손이 들어오는 것 같았지만, 무척 진지한 표정을 보니 진심으로 제대로 된 검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내 몸에 이상 따위는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지만, 지금 그녀를 보니 조금 더 안심되었다.

‘건강 검진 끝났네.’

이것보다 더 자세하게 몸을 살펴볼 수가 없다.

풀어 헤쳐진 앞섬을 잠깐 여민 이후에 다시금 그녀를 바라보자 커다랗게 한숨을 쉬는 모습이 보였다.

“딱히 이상은 없으신 것 같습니다. 건강 상태도 무척 좋고요. 본래 항상 체크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깨어난 이후에도 같은 변함없으신 걸 보니 마음이 좀 놓이네요.”

“네. 저 희영 씨, 그보다.”

“그보다 혹시 공복이 있으시거나 그렇지는 않으십니까? 일단은 물부터 드시고 천천히 죽 같은 것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오랜만에 드시는 만큼 위장에 부담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아니면 바로 포션을 드시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

‘얘, 말 돌리려는 것 같은데.’

이번뿐만이 아니다. 이쪽이 뭔가 질문을 날리려고 할 때마다 필사적으로 말을 돌리고 있다.

어떤 질문이 날아올지 알기에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 같았다.

대답을 억지로 회피하는 듯한 태도는 누가 봐도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그녀의 연기력이 어설펐기 때문에 더욱더 그런 모습들이 도드라진다.

‘말하기 싫다, 이거지. 이거였나 보네.’

나를 이 방에 데려다 놓은 건 선희영도 아니고 정하얀도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 둘도 포함이 되어 있겠지만, 녀석을 위시한 파란 길드 전체라고 생각하는 것이 맞다.

‘김현성, 이 새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곧바로 오랜만에 보는 이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어디서 뭘 하다가 연락을 받고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들 무장을 하고 있었다.

정하얀도 그렇고 박덕구도 그렇다. 모두가 눈물 훔치고 있는 건 당연했고, 이쪽에 몸을 던지듯 날리는 것도 여전했다.

특히나 정하얀은 무척이나 감격했는지 눈물, 콧물을 질질 짜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이전보다 더 어른스러워진 모습이었다.

“일어나셨군요.”

“오랜만입니다. 혜진 씨.”

“정말로 오랜만입니다. 부길드마스터.”

“반갑습니다. 안기모 씨.”

“부길드마스터….”

‘유아영, 김창렬, 우리 병아리들도….’

한소라도 눈에 띈다. 엘레나는 자리에 없는 것을 보니 엘프들의 문제로 잠깐 출장이라도 나가 있는 것 같았다.

한쪽 품에 거의 안기다시피 한 정하얀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 준 후 다시금 고개를 돌리자, 뜻밖에도 처음 보는 얼굴들이 자리해 있었다.

‘뭐야, 쟤네는….’

심지어 가슴에 파란 길드의 휘장까지 박고 있다.

‘쟤네 뭐야. 길드 직원 새로 뽑았어?’

무장 상태와 스텟을 보니 길드 직원들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파티원, 새로 뽑은 거야?’

의아한 표정으로 멀찍이 떨어져 눈치를 보는 무리를 바라보자, 김현성이 힘없는 이쪽의 손을 꽉 잡는 것이 느껴진다.

어지간히 감격한 표정.

며칠 전에 봤던 것 같은데 마치 10개월 이상을 보지 못한 사람 같은 반응이다. 역시나 이번에도 눈물을 글썽거리고 있다.

‘그만 좀 울어라, 진짜.’

“일어나셨군요.”

“네, 혹시 여기는… 아니, 현성 씨.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크게 신경 쓰실 일은 아닙니다. 이제는 전부 마무리된 일이기도 하고요.”

“네….”

“악마들이 나타났고, 대륙 연합이 그들과 전투를 벌인 것이 전부입니다. 그 과정에서 기영 씨를 구할 수 있었고요. 마지막에 베니고어 님의….”

‘부딪친 게 전부긴 개뿔….’

“…그렇게 해서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었던 기영 씨를 구출하는 데도 성공했, 했고요.”

어째서 나를 여기에 박아 넣었는지 그제야 눈치챌 수 있었다.

모두가 한마음, 한통속이다. 김현성의 말도 안 되게 생략된 스토리텔링에 고개를 끄덕이기에 여념이 없다.

단체로 사람 하나를 바보로 만드는 몰래 카메라라도 기획하고 있는 것 같았다.

‘와, 단체로 거짓말하는 거 봐라… 진짜.’

원하고 있고, 생각하고 있는 부분은 너무나도 뻔하다.

이쪽이 혼란스러워하지 않게 천천히 기억을 되찾아 주는 것.

언젠가는 공개할지도 모르겠다만 지금으로써는 시기상조라고 생각하는 것이리라.

‘그냥 전부 기억났다고 말하는 편이 나을까.’

그게 질질 끄는 것보다는 나을 수도 있다. 조심할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내 생각보다 더욱더 조심하고 있는 것 같다.

김현성의 말에 호응하는 파티원들의 모습은 가히 가관이었다.

그나마 김예리와 안기모 그리고 황정연은 나쁘지 않은 연기를 펼치고 있었지만, 이 무대에 주연이라고 할 수 있는 김현성의 거짓말은 마치 국어책을 읽는 것처럼 어색하고 개연성 없다.

“시간이 조금 흘렀지만, 바깥에는 아직도 칠흑 같은 마력이 떠다니고 있습니다.”

‘거짓말하지 마, 이 새끼야. 무슨 어두운 마력이 떠돌아다니긴….’

“전문가들이 말하길 이 마력이 기영 씨에게는 치명적으로 작용할 우려가 있다더군요.”

‘너무 설정이 안 좋다.’

“그래서 말입니다만… 당분간은 이곳에서 지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꾸역꾸역 이쪽을 이곳에 처박아 두기 위한 빌드업을 쌓고, 결국에는 본인이 대사를 마무리.

약간의 불안감은 있었지만, 며칠 걸리지 않을 거로 생각했다.

‘설마 진짜로 여기에 계속 가둬두겠어?’

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깔려 있었으니까.

‘바람 좀 쐬고 싶다고 하면 바로 나가게 해주겠지, 뭐. 지가 뭐 별수 있어?’

그렇게 시발, 2주가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