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Instruction Manual

Regression Manual 559zation

우리 하얀이가 달라졌어요(3)

확실히 나쁜 방향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정하얀이 다시 한번 미친 듯이 몰두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에 함께 길드로 돌아가자는 걸 거절할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열심히 마법을 공부하는 모습이나 학자 같은 이미지가 내게 먹힌다는 걸 인지했는지, 본인이 지을 수 있는 최대한 야릇한 표정으로 책장을 넘기는 모션을 보여주려고 했다는 것 역시 그 날 일어난 소소한 이야기 중에 하나.

물론 그게 정말로 섹시한 표정인지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본인 나름대로는 무척이나 만족해하는 것 같았다.

아주 조금이지만 자신감을 되찾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본인 나름대로 가지고 있던 콤플렉스를 극복할 방법을 찾아냈다고 느끼는 것이리라.

사실 최대한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야릇한 표정으로 책을 탐독하고 있는 모습은 성적 매력이 느껴진다기보다는 귀엽게 느껴졌다.

하지만 괜스레 한 번 더 다가가는 걸로 정하얀의 생각이 맞다고 확인시켜 줄 수밖에 없었다.

‘쑥쑥 커야지. 쑥쑥쑥.’

정하얀의 정체된 성장에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인들 하지 못하겠는가.

이쪽에서 할 수 있는 수단은 전부 다 사용해 보는 게 맞다.

그 바쁜 와중에도 일주일에 한 번을 시간을 내 정하얀과 함께 외출 약속했다는 것도 그렇다.

계속해서 처박혀 있는 것도 좋지만 그래도 지속해서 머릿속을 환기시키는 것도 중요했으니까.

흔들릴 것 같으면 잡아주기도 하고, 조금 의욕이 떨어진다 싶으면 다시 한번 의욕을 넣어 줄 수도 있다.

그렇게 약속을 한 이후에 기뻐하던 정하얀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그 의기양양한 표정도 말이다.

자신의 지적인 매력에 빠져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고 느낀 것인지 그 날 이후로도 본격적으로 책을 끼고 살기 시작했고….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는 아무것도 없지만, 평소에 그럴듯한 계단을 뛰어넘고 오리라는 것은 굳이 보지 않아도 예상할 수 있었다.

‘조금만 더 두고 보자.’

지금의 정하얀에게는 소소한 성장이라도 도움이 된다고 말할 수 있었으니까.

물론 정하얀의 성장에만 관심을 기울인 것은 아니었다.

“훈련은 어때?”

“잘 모르겠소. 조금씩 조금씩, 달라지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스텟이 올라가는 게 더뎌서. 그래도 현성이 형씨가 잘 봐주고 있다니까.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소.”

“넌 더 잘할 수 있을 거다, 덕구야.”

“아암, 누구 동생인데. 당연히 잘해야지.”

박덕구를 비롯한 파란 길드원들은 물론이거니와 이제는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는 대륙 합동 훈련까지.

그중에서도 대륙 합동 훈련은 생각한 것 이상의 성과를 내주었는데, 확실히 충격 요법이 효과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훈련을 구성하고 있는 선임 멤버들 대부분이 27군단과의 전쟁에서 싸운 역전의 용사들이다 보니 김현성이 원했던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다.

딱히 내가 개입하지 않아도 무척 잘 돌아가고 있는 훈련소를 보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가장 신난 게 김현성이었다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다.

본인의 수련 시간도 줄여가며 타 국의 모험가들에게 도움을 주었고, 가능성이 보이는 이들은 따로 챙겨 관리하기도 했다.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하기는 해.’

물론 이 역시 커뮤니케이션의 성과라 할 수 있으리라.

김현성과 내가 정말로 솔직한 의견을 나누며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는 게 중요했다.

솔직히 예전에도 삐걱거리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불편했던 것이 사실.

바깥양반이 뭘 하면서 싸돌아다니는지 알지 못한 채로 집안을 관리해야 했으니 효율이 나오지 않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내조하고 싶어도 어떤 부분에서 도움을 주고, 관리해야 하는지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해야만 했고, 막상 실행할 때도 이게 맞는지 고려했어야 했다.

심지어 그게 정답이란 걸 알고 있으면서도 숨겨야 했던 상황, 이제는 그런 일이 없다.

김현성은 자신이 필요한 게 뭔지 표현했고, 이쪽은 그걸 정리해서 보내주는 것으로 끝.

물론 김현성이 이런저런 부탁을 해올 때마다 미안해하는 것 같았지만, 내 입장에서는 일이 훨씬 편해지고 안정감 있다고 느껴졌다.

무엇보다 여러 가지 일을 한꺼번에 병행할 수 있다는 게 가장 커다란 장점이었다.

김현성을 위해서 쏟았던 시간을 다른 곳으로 분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런 문제가 생겨서… 전반적인 훈련 상황을 확인해 주셨으면 합니다. 바쁘시다면 ‘괜찮다.’ 아니면, ‘조금 아쉽다’ 정도로 표현해 주셔도 되고요. 그리고 이전에 말씀해 주셨던 정신 교육에 관해서도 코멘트를… 마지막으로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의 경우에는 한 번만 더 생각을 해보시는 게 어떨지… 아무래도 굳이 기영 씨가 책임질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물론 이점이 크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만큼 얽매이는 게 많을….]

“그래도 해야 하는데 어쩌겠어.”

‘교육은 내가 직접 가봐야 할 것 같고… 뭐, 잘하고 있는 것 같으니까 별문제는 없겠네.’

다 읽은 편지를 다시금 책상 안으로 집어넣는 것은 순식간이다.

이제는 편지 말고 다른 통신수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걸 애용하는 걸 보면, 2회 차에 발달된 기술에 아직도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될 정도였지만, 뭐 크게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똑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들어오세요”라고 말을 내뱉으니 최근 정하얀이나 김현성보다도 더 얼굴을 자주 보는 이가 시야에 비쳤다.

“김미영 팀장님.”

“죄송합니다. 부길드마스터. 제가 조금 더 일찍 나왔어야 했는데….”

“아니요. 괜찮습니다. 항상 정상적인 시간에 출근해 주고 계신데요. 어쩌다 보니 오늘 조금 일찍 눈이 떠져서 먼저 나오게 된 것뿐이니 미안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어제도 늦은 시간까지 업무를 봐주셨으니까요.”

‘얘가 있어서 내가 참 편해.’

“그렇게 늦은 시간까지는 아니었지만….”

“새벽 두 시가 늦은 시간이 아니면 언제가 늦은 시간이라는 겁니까. 수당은 당연하고… 성과금이랑 보너스를 드린다고 하더라도 제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부길드마스터가 저에게 해주신 걸 생각하면 이 정도는 당연한 걸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하지만, 그렇게 일일이 챙겨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게 부길드마스터는 은인이나 마찬가지니까요.”

“제가 뭐 한 게 있겠습니까. 능력 있으신 분을 데려다가 스카웃한 게 전부인데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아이들은 잘 지내고 있습니까?”

“네. 최근에 둘 다 모험가가 되고 싶다고 해서….”

“…….”

“…….”

“확실히… 걱정이기는 하겠군요.”

“물론 자신을 지킬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건 좋은 이야기이기는 합니다만… 아무래도 어머니 입장에서는 조금 걱정이….”

“조금 냉정한 이야기일지는 몰라도 이런 대륙에서는 칼을 든 사람이 펜을 든 사람보다 안전할 수도 있을 겁니다. 만약 아이들의 뜻이 확고하다면 파란 길드에서 진행하는 유소년 프로그램에 참여시켜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아무것도 없이 일반 던전부터 시작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테니까요. 제가 담당자에게 미리 말해놓을 테니 결정을 내리시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매번 감사하고 미안해하실 필요 없다니까요. 그럼 일단….”

“네. 오늘은 정하얀 님과 외출하시는 날이라 따로 다른 스케줄을 잡지는 않았습니다. 그 외에 확인해 주실 부분이, 여기 있는 북부 전진기지 시공 계획서와….”

“아, 일단 봅시다.”

“네.”

“…….”

“…….”

“완공 시기가 4년 이후….”

“최대한 빠르게 잡아보려고 했지만, 부길드마스터가 원하시는 규모와 퀄리티를 고려하면 이 정도가 딱 적정 기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기간을 더 단축시킨다면 여러 가지로 부작용이 생길 가능성이 크고… 무엇보다 북부 전진기지에 들어갈 마력석이 충분하지 않습니다. 최대한 빠르게 채굴하고 있습니다만, 그렇게 쉽게 물량을 늘릴 수 있는 자재가 아니기에 현재도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보고됩니다. 일반적인 성벽의 완공은 시기를 조금 더 앞당길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곳곳에 설치된 탑 같은 경우에는….”

“네, 물론 빠르게 짓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건 저도 알지만 그래도 조금만 더 속도를 냈으면 합니다. 문제가 되는 부분이 마력석 자제 확보라면 북부 쪽에 있는 국가의 노동력을 빌리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채굴에 들어가는 도구도 개선이 필요할 것 같고요. 아영 씨한테 부탁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북부 국가들과는 이미 노동력에 대해 협의 중이지만, 그들 대부분 곤란을 겪고 있는 상태입니다.”

“으음….”

“해결할 방안을 마련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도 같이 알아보는 게 좋을 것 같네요. 힘들겠지만 3년 정도로 잡고 싶은 마음이 커서… 아무튼 간에 고생하셨습니다. 계획서는 내일 내로 전부 점검한 이후에 조금 더 자세하게 코멘트 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네.”

“그럼… 다음은 뭡니까?”

“관리 위원회와 미팅을 잡을 예정입니다만….”

“아, 괜찮네요. 안 그래도 슬슬 진행해야 한다고 생각하던 타이밍이었는데. 팀장님이 알아서 잘 처리해 주세요. 언론 쪽 특히 신경 써주시면 감사할 것 같습니다.”

“네, 꼭 확인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 외에도 이것저것 물어오거나 보고를 올리는 김미영 팀장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확실히 일 처리 하나는 기막히게 해낸다.

본인의 전공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이 정도 성과를 내는 걸 보면 확실히 사람 하나는 제대로 뽑았다.

물론 민감하지 않은 업무는 그녀가 데리고 있는 팀과 하겠지만, 현재 길드 내 행정처리 부분에서 그녀보다 더 열정적인 사람이 또 있을까.

심지어 실력까지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가진 능력이 치트키나 다름없다고 생각해 버렸다.

“이상으로 보고를 마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마침 정하얀 님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집무실로 오라고 전달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아니요. 괜찮습니다. 함께 바깥으로 나가죠. 그게 더 좋을 것 같은데… 아. 그리고 오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손가락으로 살짝 안경을 올리는 그녀의 모습이 눈에 보인다.

괜스레 정하얀이 현재 원하는 이미지는 김미영 팀장 같은 이미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적인 커리어 우먼. 이거 괜히 같이 나갔다가 또 폭발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들기는 했지만, 군단 이후 정하얀은 그 행동에 신중 또 신중을 기하는 상태, 또다시 사고를 치진 않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조용히 앉아 있는 모습, 한소라는 또 어떻게 만났는지 둘이 함께 대화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뭔가 이상한 광경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자연스럽다.

특히나 한소라가 살짝 미소를 띄고 있는 부분이 더욱더 말이다.

정하얀이 얌전해진 것으로 가장 커다란 이득을 보고 있는 인물이라고 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표정.

파란 길드에 온 이래로 저런 미소를 처음 본 것 같다.

이쪽을 발견했는지 손을 들어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오른쪽 손에는 오래된 서적 한 권이 들려 있었고 오늘은 빨간색 안경까지 쓰고 오셨다.

은근히 귀여워 보이는 모습에 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기분 나쁠 수도 있으니 평소대로의 모습으로 인사를 건네자.

난데없이 김미영 팀장이 앞으로 꼬꾸라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아.”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니다. 단순히 발을 헛디딘 것뿐이지. 1초 후에 몸이 철푸덕 넘어지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 자연스럽게 팔이 나갔다.

“감사합니다, 부길드마스터.”

“역시나 조금 피곤하신 것 같습니다. 오늘은 김미영 팀장님도 다른 것 하지 마시고 푹 쉴 수 있도록 하세요.”

“네.”

“말로만 그렇게 하지 말고요.”

“네, 반드시 부길드마스터의 말씀대로….”

그녀와 내가 현재 어떤 상태에 있는지 깨달은 것은 바로 그때.

어정쩡하게 이쪽에 안겨 있는 김미영 팀장을 보고서는 화들짝 놀라 손을 뗄 수밖에 없었다.

정하얀이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본인이 원하고 있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여자와 내가 밀착하고 있다는 사실을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지 않을까.

아무리 얌전해졌다고는 해도 정하얀은 정하얀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걱정할 수밖에 없다.

아니나 다를까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팀장님, 괘, 괜, 괜찮으세요?”

“네, 감사합니다.”

‘이게 뭐야.’

“다, 다행이다.”

‘너 왜 그래, 시바. 무섭게.’

“조심하셔야죠….”

‘진짜 왜 그래… 하얀아. 너 시바… 왜 그래. 이러지 마, 무서워.’

진심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걱정하는 듯한 얼굴,

그 얼굴로 건네는 친절한 한마디.

깜짝 놀라기는 했지만, 이내 조용한 미소를 짓는 한소라.

여전히 정하얀의 성장은 멈춰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