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Instruction Manual

Regression Manual 587

오랜만의 해후 그리고…(4)

피곤함이 계속해서 누적되는 것 같은 느낌에 몸을 일으키기가 힘들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나보다 조금 더 망가져 있는 이지혜의 얼굴을 확인한 직후에는 천천히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내가 부재중이었을 때 고군분투하며 현장을 정리한 것이 분명했다.

평범한 말에도 괜한 짜증이 묻어나 있는 것 같은 느낌.

평소의 말투와 다른 것을 보면 막중한 업무량에 스트레스가 쌓인 모양인 것 같았다.

“사고 치는 사람 있고 수습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니까. 정하얀, 걔 진짜 짜증 나 죽겠어요. 혼자만 신나서 룰루랄라. 물론 걔 덕분에 그 악마 계약자 놈을 지옥으로 보내 버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짜증 나는 건 짜증 나는 거라고요.”

“피해 규모가 생각보다 큰가 봐.”

“장담하는 데 5구역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할 거라고 봐요. 단순히 금이 간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무너졌어요. 남은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전부 다 보수해야 될 거라고 봐요. 아마 실제로 보면 오빠도 기절할걸요.”

“기절하기 전에 어느 정도 폭발이 있었는지는 확인했어. 이 정도 일 줄은 몰랐지만… 복구 작업은 시작하고 있지?”

“아니요. 시작할 수 있을 리가 있겠어요? 안쪽은 완전히 출입 금지 구역으로 지정해 놨어요. 저도 마음 같아서는 곧바로 들어가고 싶었는데… 이게 웬걸, 발견되면 안 되는 것들이 발견되지 뭐예요? 이거 전부 다 처리 못 하면 복구 작업이고, 나발이고 손댈 수 없을 것 같아서요. 혹시 모르잖아요? 저쪽에서 날조한 정보들이기는 하지만, 노동자들 손에 들어가면 쓸데없는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으니까….”

‘일 처리 하나는 좋다니까.’

“베니고어 넷을 아무리 통제한다고 한들 입소문까지 막을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미연에 방지해야죠.”

“이거 정리하는 데 들어가는 인원들은 어떤데?”

“전부 다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니까 안심하셔도 돼요. 일단 보세요. 얼마나 체계적으로 일을 진행했는지는 몰라도 날조 실력이 보통이 아니라니까.”

“1년, 아니, 어쩌면 계속해서 그 짓거리만 준비했을 텐데. 당연하지 않겠어?”

실실 웃으며 문서를 건네는 이지혜의 모습이 눈에 보인다.

‘얘도 진짜 철면피야.’

분위기상 대충 호응해 주기는 했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저런 말을 꺼낼 수 있다는 게 놀랍다.

괜스레 피식 웃으며 이지혜가 준 문서들을 자연스럽게 받아 들어 천천히 넘기자, 확실히 반동분자 놈들이 고군분투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노력했네, 노력했어.’

어떻게 이렇게 내 뒷조사를 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척 자세하게 쓰여 있는 정보들이 보인다.

중간중간 유실됐는지 보이지 않거나 아예 단락이 빠진 것들도 보였지만, 내용을 이해하는 데 커다란 지장은 없다.

이기영이라는 인간이 어떤 인간인지, 튜토리얼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세하게 분석해 놓은 문서들은, 어떤 의미로는 무섭게 느껴질 정도.

악의와 적의를 넘어선 정체불명의 집념과 분노까지 느껴졌다.

녀석들이 이런 정보들을 모으고 있었다는 걸, 내가 모르고 있었다는 게 가장 무섭다.

‘나도 많이 물렁해졌나 보네.’

나름대로 조심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부족했던 모양이다.

이토 소우타 때 풀었던 환상 물약, 라이오스 악마소환 사태, 공화국과의 전쟁 당시 터졌던 언데드 소환, 27군단 습격 사태, 굵직했던 사건들은 물론이거니와 작은 사건들까지 촘촘하게 나열되어 있지 않은가.

“각 파트마다 하위 문서가 수백 장이 넘어요. 중요한 건 그것보다 더 되고요. 뇌피셜이 대부분이고, 그 상황을 뒷받침할 증거도 부족, 심지어 어거지로 끼워 맞춘 부분도 보이지만, 이런저런 걸 전부 따져도 반동분자들이 철저했다는 건 부정할 수가 없네요.”

“그런 것 같네.”

“여신의 거울부터 손거울, 언론조작과 선동, 균열박물관 그리고 물약유통에 관련된 불공정거래나 시세조작. 심지어 블랙마켓까지. 여기서는 조금 놀랐다니까요. 인물 관계도까지 책 몇 권 분량으로 만들어놨고… 저에 대한 평가도 인상적이었어요. 아주 오빠보다 더한 쓰레기로 만들어놨더라고요. 내가 뭐 한 게 있다고… 물론 마음에 걸리는 게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 평가는 심했죠. 멍청한 놈들인 만큼 사람 보는 눈도 없더라고요.”

‘얘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지금이 5일째인데, 아직도 계속 발견되고 있을걸요. 청사가 무너지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따로 고생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이미 지나간 일이니까… 뭐 어쩔 수가 있나….”

“그래서, 이건 어때요? 감상을 조금 듣고 싶은데.”

“확실히 누나 말대로 날조 실력이 보통이 아니네. 그래도 딱 그것뿐이야. 이런 걸 누가 믿겠어.”

그렇기 때문에 녀석들 역시 이 날조된 정보들을 활용하지 못했을 것이다.

베니고어 넷에 활용하면 중간에 걸릴 게 분명했고….

언론사를 이용한다고 해도, 이런 문서들을 세상 밖으로 내보낼 정도로 간 큰 자식들은 없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발로 뛰는 것과 아군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교육용으로 사용하는 것이 전부였을 터.

반동분자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한 무리가 어째서 그렇게 완벽하게 세뇌되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제한된 장소에서 이런 걸 보고 있으니, 세뇌가 되지 않고 배기겠는가.

‘5구역 주변은 조금은 신경을 써야겠는데.’

다른 게 역병이 아니다. 이 자리에 있는 이런 것이 역병이다.

녀석들의 움직임이 제한되어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이 역병이 그리 멀리까지 퍼져 나가지는 못했겠지만, 어딘가에 침투해 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100에 99명은 흔들리지 않겠지만, 남은 1명이 흔들릴 수도 있는 만큼 완전히 박멸하는 게 옳다.

“미하일은 어디 있는데.”

“여기 바로 아래에 있어요. 지금 바로 내려가게요?”

“응,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잠깐 준비 좀 하고… 그래도 복장은 제대로 갖추고 가야지. 혹시 따로 건드리지는 않았지?”

“화풀이만 조금 했어요. 사실 제대로 된 작업은 아직 못 들어갔고요. 파란 길드에서는 본인들이 직접 심문하겠다는데, 오빠 핑계 대니까 조용해지더라고요. 아무튼, 빨리 준비해요. 지금 바로 내려갈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혹시 모르니까 혜진이랑 박리안한테 연락 좀 해주고.”

“호위가 필요해요?”

“보여주기식으로라도 필요해서 그래. 아, 그리고… 혹시 5구역에서 악마소환에 쓰인 마법진이나 증거들 발견된 거 있어?”

“아직은요. 이제 슬슬 나올 것 같기는 해요. 쥐새끼들처럼 지하 동공에서 지내고 있었던 것 같은데… 바로 어제까지는 그 장소도 완전히 매몰된 상황이었어서… 무슨 말 하는지 알겠죠?”

“응, 대충 알겠네.”

말하자면 작업할 수 있는 인원이 부족하다는 것 같았다.

단순히 철거 정도로 끝날 일이었다면 5일 안에 정리 가능했을지도 모르겠지만, 현재 5구역은 하나의 커다란 증거품이나 다름없다.

당연히 조심스럽게 처리해야 했고, 그만큼 시간이 더 걸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악마의 마력이 대기에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개소리를 하면서까지 위원회가 현장을 꽉 잡고 있는 이유였다.

‘조금 걱정했었는데, 통제가 잘됐나 보네.’

내가 자리를 비웠던 만큼 모든 게 쉽지만은 않았으리라.

아무튼 간에 간단하게 세면을 마친 이후에, 복장을 갖춰 입고 밖으로 나오니 이지혜가 이쪽을 재촉하는 게 눈에 보였다.

미리 연락을 넣어놨는지 밖에서는 조혜진과 함께 이쪽을 기다리는 중.

아침부터 불려온 것으로 모자라 할 일도 많았던 조혜진은 별로 내키지 않는 표정인 것 같았지만, 그래도 호위의 필요성은 인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길드마스터가 호위는 자신이 직접 서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왜 굳이 저를 데려가는 겁니까. 안 그래도 기다리고 계신 것 같던데.”

“뭐 이유가 중요합니까. 나랑 같이 움직이면 혜진 씨도 좋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끝나고 체스나 둬요. 오늘 업무는 미뤄두고….”

“부길드마스터만 바쁜 게 아닙니다.”

“두 분 사이 좋은 건 알겠으니까. 빨리 움직여요. 오늘 할 일 많으니까요.”

“누가 누구랑 사이가 좋다는 겁니까.”

‘아니, 그렇게 부정하면 내가 뭐가 돼… 살짝 섭섭해진다, 야.’

농담인지 진심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지혜를 향해 조용히 말을 내뱉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이지혜와 조혜진이 함께 있는 모습은 거의 처음인 것 같다.

캐슬락의 고집불통이라는 칭호마저 달고 있었던 조혜진이 그녀를 어떻게 대할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모르게 저 둘은 절대로 친해질 수 없을 것처럼 느껴진다.

한 자리에 있는데도 느껴지는 어색한 공기에 괜스레 숨이 막혀올 지경, 서로를 바라보는 두 눈빛이 그다지 호의적이지는 않다.

‘친해지길 바래’라도 찍고 싶기는 했지만, 어차피 매번 부딪칠 사이도 아닌데 구태여 내가 앞장서 스트레스를 받고 싶지는 않았다.

“길드 마스터가 부 길드 마스터의 안전에 신경 쓰고 또 신경 쓰라고 말씀하셨는데… 하얀 씨라도 불러오는 게….”

“진심입니까?”

“실언이었습니다.”

급격히 조용해지는 조혜진이 시야에 비쳤다.

물론 현재 내가 가는 곳이 정말로 위험한 곳이었다면 정하얀을 데리고 갔겠지만,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다.

악마 계약자들을 만나는 것도 아니다. 일반인이나 다름없는 미하일을 만나러 가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온몸이 결박되어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놈을 어째서 조심해야 되는 건지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다.

마음 같아서는 조혜진도 떼어놓고 가고 싶은 심정이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그렇게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기자, 어느새 시야가 점점 어두워졌다.

보호 관리 위원회에서 직접 관리 감독하고 있는 형무소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나 역시 이 장소를 찾은 것은 오랜만. 비교적 깔끔하게 보였던 환경은 안으로 진입하면 진입할수록 달라지기 시작한다.

간헐적으로 비명도 들려왔고 냄새도 점점 역해진다. 조혜진이 살짝 표정을 찡그리기는 했지만, 별다른 말을 해오지는 않았다.

이윽고 커다란 문을 다섯 개 정도 지나고 나니, 비로소 보고 싶었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이 배신자 새끼.’

통칭 ‘조력자’ 미하일.

악마 계약자들의 뒤를 봐주고 대륙의 빛을 독살하려고 했던 전범.

대륙인들의 혈세로 대륙의 적을 지원하고 있었던 희대의 사기꾼.

온갖 불법적인 행위를 자행하며 노동자들 벼랑 끝으로 내몬 장본인.

앞에 널린 수식어만으로도 인간쓰레기 타이틀을 받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 누가 녀석이 범죄자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있으랴.

‘얼굴 좋네, 이 새끼는.’

의자에 묶인 채로 꾸벅꾸벅 고개를 까딱거리는 것을 보고 졸고 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지만, 내 얼굴을 확인하고는 조용히 나를 바라보는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체념한 것 같은 얼굴이었지만, 곧 죽어도 자신이 잘못했다는 표정은 아니다.

아직도 본인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거참… 오랜만입니다.”

“오랜… 만이로군요, 위원장님.”

“뭐라고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할지 모르겠는데… 상황이 이렇게 돼서 참 아쉽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째서 제가 여기에 있는지는 잘 알고 있을 테니… 뭐,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이거 한 번만 물어봅시다.”

“…….”

“왜 배신한 겁니까.”

“…….”

“왜 대륙을 등에 지셨습니까. 왜 본인의 손으로 호가호위하면서 살 기회를 던져 버렸나, 이 말입니다. 제 입으로 말하기는 조금 민망하지만, 저는 나름대로 당신을 신임했어요. 그렇기에 당신을 중역에 앉힌 거고, 기회를 준 겁니다. 근데 당신은 내 기대를 배신했어.”

“…….”

“이래 봬도 제가 마음이 매우 여립니다. 나 참, 독이 든 차가 눈앞으로 떠억 왔을 때 얼마나 상처받았나 몰라. 그러니 말해봐요, 이 양반아. 뭣 때문에 배신했어요?”

“신념.”

“뭐?”

“신념입니다.”

“…….”

“…….”

“혹시 이런 말 들어봤어요?”

“…….”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신념을 가지는 것만큼 무서운 게 없다는 말, 들어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