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Instruction Manual

Regression Manual 590zation

키 플레이어(1)

“생각보다 알고 있는 게 별로 없네요.”

“그래도 나쁘지는 않은 것 같은데… 사실 크게 기대하지도 않았어. 딱 내가 예상했던 범위 정도로만 알고 있는 것 같네.”

“조금 더 털어볼까요?”

“굳이 누나가 할 필요가 있어?”

“차라리 교황청 쪽에 넘기는 게 좋지 않을까요? 나탈리 그 여자도 같이 이단 심문관들한테 넘기는 게 속 편하잖아요. 이단 심문관장이 안 그래도 최근에 연락이 왔었거든요. 본인들이 직접 심문하고 싶다고. 오빠가 안 좋아할 것 같아서 일단 대답하지는 않았는데… 사안이 사안인 만큼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글쎄… 어떻게 할까. 귀찮은데 그냥 넘겨 버려?”

“알고 있는 건 전부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니….”

“나 참. 아까까지만 해도 자존심 지키던 사람이 불과 몇 시간 사이에 많이도 망가졌네요. 이래서 지킬 게 있는 사람들은 이딴 헛짓거리를 하면 안 된다니까. 우리 오빠가 조금 무른 면이 있어서 그렇지, 나였으면 이렇게 물렁하게 안 끝내. 장담하는데 너희 두 연놈 전부 대가리만 남은 채로 뻐끔뻐끔 입 벌리고 있었을 거야. 살아 있는 게,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만들어줄 수도 있었다고. 자비에 감사하는 게 맞겠네, 그렇지?”

“…….”

“…….”

“그냥 넘겨 버려요.”

“사실 이제는 어떻게 되든 별로 관심도 없는데… 기왕이면 살아 있으면 좋겠는데. 공개 처형도 나쁘지 않을 것 같고… 그런 거 보여줄 때도 한 번 됐잖아. 아니야, 그래도 숨이 붙어 있는 편이 나을 것 같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거면 처우가 결정되기 전까지는 여기에 박아 놓을게요. 이단 심문관장이 계속 연락 올 것 같으니까. 이건 오빠가 좀 막아줘요.”

“응, 더 이상 여기에 뭐 볼 일도 없을 것 같고… 그만 나가자.”

“네, 그런데 오빠.”

“응?”

“왜 마지막에 그런 식으로 말한 거예요?”

“내가 뭐라고 했었어?”

“조금만 더 분위기 잡고 들어갔으면 대륙을 위해서. 저엉말로 어쩔 수 없이 윤리와 비윤리 사이에서 고민한 정의로운 흑막 정도는 될 수 있었던 거 아니에요? 그것 하나 놀리고 싶어서 푸흐하핫 웃으면서 이미지 버린 게 너무 아깝다.”

“어차피 오늘 이후로 안 볼 사람인데, 그런 이미지가 뭐가 중요하겠어. 그냥 기분이 더럽더라고. 끽해야 범죄자 새끼들이 본인들이 끝까지 옳다고 생각하는 게 우습잖아. 지금까지 대륙에 뭣 하나 한 것 없는 놈들이 이제 와서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훈수 두는 꼴이 어이없었기도 했고… 흠… 저기요, 미하일 님. 만약 당신이 제 입장이었다면 뭘 어떻게 했을 것 같아요?”

“…….”

“아마 당신은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걸. 이미 중간에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해서 뒈졌을 거라고… 뭐, 더 이상 말하는 것도 입 아프고… 아무튼 잘 지내세요, 미하일 님. 가끔 특식 넣어드릴 테니까, 용기를 잃지 마시고 살아가야 합니다. 공부 열심히 하시고요. 우리 미하일 파이팅! 푸… 흐흐흡.”

“통쾌한 건 알겠는데 그만 좀 놀려요. 무게 좀 잡아보라고요.”

괜한 폼 잡는 것보다는 가뭄으로 허덕이는 내 가슴에 단비를 내려주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자, 미약하게 한숨을 쉬는 이지혜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본인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이다를 들이켠 표정이지 않은가.

희미하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것을 보면 얻은 정보 역시 그리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하리라.

‘뭐, 단서 정도는 얻었으니까.’

하지만 부족하게 느껴지기는 했다. 일단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악마에 대한 정보가 너무나도 적다.

엄밀히 따지면 미하일은 결사단의 일원이 아니니, 알 리가 없었을 테지만….

개미 코딱지만 한 정보 정도는 머릿속에 처박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 악마 계약자 새끼들.’

하지만 예상한 것보다는 주력 메뉴의 개수가 부족한 상황, 다른 건 몰라도 계약한 악마의 이름 정도는 알 거라고 생각했건만, 그것조차 베일에 감추어져 있다는 게 불편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베니고어가 알고 있지 않을까. 그게 아니라면 5구역에 무언가 단서가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지하에 은닉처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니, 뭐가 됐든 간에 그곳으로 가는 게 최우선 사항이라 여겨졌다.

‘카스가노도 같이 가는 게 좋겠네.’

악마 계약자 놈들의 은닉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무슨 사건이 있었는지 엿볼 가능성도 있었으니까.

어떻게 악마를 소환한 건지, 또 누구와 계약한 건지, 계약 조건이 무엇인지 들어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이득이 아닌가.

정말로 벨리알보다 상위의 악마가 맞다면….

‘콩고물이 떨어질 수도 있고….’

뭔가 얻을 게 있을 수도 있다는 거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는 와중에도 악마 소굴을 탐험할 인선을 머릿속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일단 김현성은 아웃.

아무리 우리가 서로의 속내를 까고 진솔한 이야기를 했다고 한들, 악마에 대해 반감을 품은 녀석에게 같이 가자고 하는 것 자체가 무리수다.

단순 잔당의 소탕이었다면, 기쁜 마음으로 함께 가자고 손을 내밀었겠지만….

‘원정의 목적 자체가 다르니까.’

이걸 위해 쓸데없는 연기까지 하며 밀어내지 않았던가.

‘한소라는 데려가야겠네.’

조금 불안하지만, 정하얀도 데려가는 게 맞다.

흑마법에 조예가 깊은 두 명이니 지식수준이 상당할 게 분명했다. 특히 그 누구보다 한소라에게 도움이 많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악의에 찬 결사단이 본인들의 숙원을 이루기 위해 존버하며 모아놓은 연구 성과가 그곳에 있는 것이 아닌가.

인상적이있던 자살 폭탄 테러부터 사지가 절단돼도 죽지 않는 끈질긴 생명력의 비밀, 그리고 힘의 원천.

제삼자에게는 끔찍한 현장으로 보일지 몰라도 그녀에게는 보물창고나 다름없는 장소처럼 느껴질 것이다.

심지어 어둠의 역병군주로서 사용할 수 있는 촉매나 실험결과들이 들어가 있을지도 모른다.

둘 모두에게 윈 윈.

특히 흑마법에 대한 정보가 압도적으로 부족한 그녀에게 그 장소는 별천지나 다름없다.

‘이 새끼들이 대륙을 위하기는 했네. 이런 것도 인계해 주려고 하고… 알고 보니 빌런이 아니라 히어로였네. 소름이 돋는다, 소름이.’

카스가노, 나, 정하얀, 한소라. 이 정도로 후위 인선은 마무리.

굳이 전위가 필요할까 싶기도 했지만, 혹시 모를 잔당이 헛짓거리를 해올 수도 있는 만큼 데려가는 게 옳다.

박덕구와 조혜진만으로는 조금 부족한 느낌이었지만, 길드 내 전위 중에서는 데려갈 수 있는 인원이 이 둘밖에 없다.

‘친위대라도 조금 데려가면 되겠지, 뭐.’라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곧바로 발걸음을 옮기자, 이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카스가노 유노의 얼굴이 시야에 비친다.

그러고 보니 너무 아무 말이 없어 깜빡 잊고 있었다.

“고생하셨습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주… 원장님.”

‘주원장은 또 누구야?’

“5구역으로 가서 방금 들었던 곳을 조금 둘러볼 생각인데. 함께 가셔도 괜찮겠습니까?”

“네, 오히려 제가 부탁드리고 싶을 정도이옵니다.”

“그리고… 혹시 그 이후의 이야기는….”

“죄송합니다. 아, 아직까지는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검은색 세계의 이야기도, 미래의 이야기도… 저번에 함께 바라보신 이후에는… 송구합니다.”

“아니요, 카스가노 님이 죄송할 일이 아닙니다. 어쩔 수 없으니까요. 앞으로는 작은 변화라도 좋으니 뭔가 이전과 달라진 점이 있으면 곧바로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알고 계셨겠지만, 눈에 보일 정도의 커다란 변화는 미래에 곧바로 영향을 끼치는 것 같아서….”

“…….”

“방금 본 것처럼 말입니다. 분명히 처음 그 시점에 대한 걸 봤을 땐 이렇게까지 무너지지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방금 봤던 장면에 있었던 변수는… 역시 5구역이 무너졌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겁니까?”

“네, 아마 위원장님의 생각이 맞을 거라고 사료됩니다. 하지만 만약 그게 아니라면… 다른 요인일 가능성에 대해서도 고려하셔야 합니다. 아직 5구역에 대한 복구 작업이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주인님께서는 5구역 보수 작업은 필수적으로 해야 하는 일이라 생각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건 맞지.’

“행동하지 않고, 결정하시고 계신 것만으로도 미래가 바뀔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5구역에 복구 작업이 들어갈 거라는 것은 이미 확정된 미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님의 생각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았다면, 무언가 다른 변수가 개입했을 가능성이 있을 거라고 사료되옵니다.”

“갑작스러운 변수….”

‘머리 아파지네.’

카스가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대충은 이해할 수 있었다.

‘쟤 말이 맞아.’

현재 5구역에 복구 작업이 진행되지 않았다고 한들, 계속해서 5구역이 저런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않겠은가.

이미 나와 이지혜는 최대한 빠르게, 모든 인력을 풀어 이곳을 보수하자 마음을 먹었고 계획을 목전에 두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에 이 전진기지가 제대로 된 역할을 해내지 못하고 있다면 내부보다는 외부에서 문제를 찾아보는 것이 옳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지?’

복구 작업이 진행되기 전에 외부 신이 들어오기라도 하나?

가능성은 적다. 그렇게까지 빨리 도착할 리가 없었으니까.

아니면 내가 모르는 곳에서 바깥 신의 추종자들이 생겨난 건가? 복구 작업 자체에 문제가 있었던 건가.

아니면 지금 일어난 이 사건 자체에서 뭔가 나비효과가 터지는 건가.

의문에 의문이 꼬리를 물고 점점 땅바닥으로 기어들어 가는 상황.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지만, 카스가노의 미래를 심각하게 바라본 만큼 조금은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밖에 없었다.

비둘기들조차 막지 못하는데 어떻게 바깥 신과의 격전을 준비한단 말인가.

계속해서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차라리 파란 길드와 지인들을 이끌고 녀석들과 호형호제하는 그림이 더 나쁘지 않다고 여겨질 정도였다.

“너무 고민하지 마시옵소서. 미래는 아주 작은 것으로도 뒤바뀌게 마련입니다. 제가 이런 말을 드리는 게 어울린다고 생각하지 않으시겠지만, 눈에 보이는 미래에 연연하는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닙니다. 주인님께서는 주인님이 원하시는 걸 반드시 얻어 가실 수 있으실 겁니다.”

“음… 고맙습니다.”

“건방졌다면 죄송….”

“아니요. 정말로 고마워서 드리는 말입니다. 진심으로요. 여러 가지로 신경 써드리지 못해 죄송하기도 하고….”

“그리 말씀하시면….”

“추후에 한 번 시간을 보내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정말, 정말! 그리해 주시는 겁니까!”

“네.”

무척 기뻐 보이는 모습이었다.

최근 받은 스트레스가 전부 날아간 것 같은 얼굴이었으니, 조금이지만 뿌듯함이라는 감정이 가슴 한편에 자리 잡았다.

매번 새로운 것을 보지 못해 초조해하고는 있었지만, 미래나 검은색 세계를 들여다보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인가.

한번 봤던 장면을 타인과 함께 시청할 수 있는 편리한 다시 보기 기능이 생기기는 했지만, 여전히 미래가 보이는 주기가 불확실했다.

쾌재를 부를 만한 것은 그녀가 성장하면 성장할수록 그 주기가 짧아지고 있다는 것.

무엇보다 본인이 이쪽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는 만큼 조만간 그 노력이 성과를 볼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 보면 얘가 참 불쌍해… 오직 빛만을 위해서 살잖아.’

그녀가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됐는지 알고 있었던 만큼, 괜스레 시선을 돌리게 될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간에 지하감옥에서의 대략적인 용무를 마치고 위로 다시금 향했다.

정확히 안쪽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궁금할 텐데도 이것저것 물어오지 않은 조혜진에게는 엄지를 추켜올려 주고 싶다.

그녀가 오늘 할 일이 호위 하나뿐이라고 생각해, 이쪽의 영역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부분도 좋다.

위로 올라온 직후에는 이지혜에게 전달 사항을 전한 직후에는 곧바로 원정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규모가 꽤 크다고 했으니까 챙길 것도 많겠네.’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1박 2일, 아니면 2박 3일? 조금 더 길어진다면 3박 4일 정도는 돼야 자세히 뒤져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가방에 짐을 쑤셔 넣고 있을 때였다.

“잠깐 시간 괜찮으십니까?”

조심스럽게 이쪽을 바라보는 김현성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