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Instruction Manual

Regression Manual 593zation

키 플레이어(4)

찰나이기는 했지만, 평소에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만큼 얼굴에 곧바로 표가 난다.

조금은 의아한 표정으로 녀석을 바라보자 본인이 더 깜짝 놀랐다는 듯 애써 웃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뭔가 이쪽을 안심시키려는 것 같은 힘겨운 미소.

확실히 조금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는 걸 깨달은 순간이었다.

실수인 것 같기도 했지만, 딱히 내 잘못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 상황에 어떻게 의연한 모습을 보일 수 있을까. 엘룬 쓰레기가 그리고 있던 작품에 똥칠해 놓은 상황인데.

‘이걸 어떻게 해야 되냐, 진짜.’

딱히 다른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

김현성에게 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린다면 그나마 선택지가 늘어나겠지만, 그렇게 할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일단은 상황을 제대로 지켜보고 생각할 시간을 버는 게 최우선이라고 생각했다.

가장 급한 일이기는 했지만, 코앞에 닥친 일부터 해결하는 게 맞다.

용사가 맡기로 한 북서지역도 문제지만, 5구역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분명히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이곳저곳에서 갑작스레 분뇨를 싸지르는 상황. 머리를 붙잡게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일단 현성 씨는 튜토리얼 던전 쪽으로 향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저도 남은 일만 처리하고 곧바로 합류할 테니 직접 한 번 더 확인해 주세요. 이번 교육생들도 한 번씩 확인해 주시고요.”

“기영 씨, 생각해 봤지만 아무래도 같이 움직이는 게 좋을 것….”

‘아니, 너 또 왜 그래.’

“저도 그러고는 싶지만, 시간이 부족해요. 현성 씨는 현성 씨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죠. 걱정하시는 건 이해하지만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는 이미 결정했습니다. 다른 일이라면 그 말에 따르겠지만, 이번에는 제 말에 따라주세요.”

“하지만….”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죠. 여기에 계속 있다고 해서 다른 해결책이 나오는 건 아니니까요. 이후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는 이번 일을 마무리 짓고 따로 논의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쉽게 쉽게 넘길 수 있는 사안은 아니니… 정말로 용사가 나오지 않은 게 확실하다면, 북서쪽 지역의 방위를 강화하는 게 지금 저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인 것 같네요. 북서지역 보강 건은 제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

“…….”

“그건 제가 맡겠습니다.”

“네?”

“튜토리얼 던전을 제대로 알아보는 것 외에는 딱히 할 일이 없으니까요. 제가 맡도록 하겠습니다.”

“…….”

‘음… 이거 괜찮으려나. 잘할 수 있으려나?’

“기왕이면 함께 가고 싶지만… 원치 않으시니… 볼일 보고 오시기 전까지 전부 다 처리할 테니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 편하게 다녀오시면 좋겠습니다.”

“아….”

‘형이 널 못 믿는 건 아닌데… 정말로 할 수 있는 거 맞지?’

일을 맡기고, 편하게 밖으로 나갈 수 있을 리가 없다.

적절한 예는 아니지만, 집안일이라고는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양반이 가정은 자기한테 맡기고 밖에 나가 놀다 오라 권유하는 듯한 느낌.

안심할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오히려 개판 치지 않을까 걱정하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그 마음이 가상해서 뭐라 솔직하게 말을 못하겠다.

도와준다고 하는 사람한테 대놓고 하지 말라는 것도 조금 그렇고….

무엇보다 이것까지 거절하면 그림이 조금….

‘아니, 너무 이상해지겠지.’

이걸로 김현성의 마음이 편해질 수 있다면….

‘그래. 이게 네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준다면….’

이게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다.

“그렇게 해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그 쪽에 대해서는 김미영 팀장이 잘 알고 있으니 따로 연락해 보시고 함께 처리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러면 그나마 안심이기도 하고.’

김미영 팀장이 김현성 옆에 딱 달라붙어 일을 처리해 줄 테니까.

“이렇게 일을 도와주신다고 하니 제가 괜히 죄송해지네요.”

“당연한 일입니다. 그보다… 저… 기영 씨, 몇 번이나 물어봐서 정말 죄송합니다만….”

“네?”

“정말 몸에 이상이 없는 게 확실하십니까?”

“…….”

“…….”

“네, 계속 말씀드렸던 것처럼 아주 건강합니다. 그러니 정말로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일단은 일어서겠습니다.”

정말로 아무 일도 없다는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나며 입꼬리를 올려봤지만, 여전히 씁쓸한 얼굴.

‘뭐야, 너. 왜 그래? 뭔 일 있어?’

왠지 모르게 더 슬퍼 보이는 건 기분 탓이겠지, 라는 쓸데없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 새끼가 무언가를 오해하고 있다는 걸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김현성과 똑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조혜진의 얼굴이 보였기 때문이다.

‘현성아, 너 시바…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한 거야.’

단언컨대 조혜진이 저런 눈으로 나를 바라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적어도 내 기억 속의 조혜진은 저렇게 따뜻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한 적이 없다.

“죄송합니다. 제가 조금 늦었군요.”

‘너, 현성이 호출받고 다녀온 거잖아.’

안 봐도 비디오.

출발 직전에 화장실을 다녀온다고 말했지만 환해진 얼굴은 누가 봐도 김현성의 호출을 받은 표정이었다.

이런 걸 속아 넘어주기도 쉽지 않다.

가서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무표정으로 장비를 점검하던 아까 전과는 완전히 딴판.

누가 봐도 이쪽을 걱정하고 있는 게 확실했다.

“그만 좀 쳐다보세요. 남들이 오해하겠네.”

“그런 게 아닙니다. 아무튼… 네. 늦어서 죄송합니다.”

“죄송할 게 뭐 있나. 급할 때도 있는 거지. 나도 원정 전에는 화장실을 안 가면 왠지 찝찝한 타입이라니까. 혜진이 누님이랑은 공통점이 많지 않을 거라고 지레짐작했었는데 이런 공통점이 있었네. 그나저나 오랜만에 형님이랑 같이 움직이는 것 같은데… 조금 설레는 거 아니요. 그렇지 않소, 누님?”

“네, 네. 저도 좋, 좋아요.”

“뭐, 좋은 일로 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엄청나게 위험한 일은 아니지만… 거 이상하게 옛날 생각이라도 나는 것 같다니까.”

“위험한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 마냥 편하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저희 역할은 부길드마스터와 후위의 호위입니다. 들뜬 마음도 이해는 하지만 혹시 모를 사고가 생길 수도 있으니….”

“거, 알고 있다니까. 그런 건 당연한 거 아니요. 거, 내가 죽더라도 형님은 지킬 테니 다들 안심해도 된다니까. 그러니 형님도 걱정 마쇼. 이제 다시는 그럴 일 없을 테니까.”

“사실 별일 없을 거야.”

“그런 거요?”

“물론,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을 확률이 높지. 덕구, 너랑 혜진 씨를 굳이 인선에 넣은 건 정말로 혹시 모를 상황 때문인 거지. 딱히 다른 일이 있을 것 같아서가 아니니까. 잔당이 남았을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 뭐, 사실 하얀이나 소라 씨, 또 카스가노 유노 님 정도만 있어도 충분하고… 아무튼 출발하는 게 좋겠네. 하얀아, 주문.”

“아… 네. 네. 지금 외, 외울 테니까 마법진 위로 올라서 주세요.”

‘편하기는 하네.’

예전처럼 마차 안에서 수다 떨면서 원정길을 이동하는 로망은 없지만, 이동이 빠르니 확실히 편하게 느껴졌다.

정하얀의 말에 원정길에 함께 가게 된 인선들이 슬그머니 자리를 옮기기 시작했다.

박덕구와 조혜진, 정하얀과 한소라, 카스가노 유노와 친위대 몇몇으로 구성된 작은 파티이기는 했지만, 결코 약한 파티가 아니다.

이미 끝장난 곳에 뒤처리하러 갈 수준의 인선은 더욱더 아니기도 했지만, 이번 원정의 중요성이야 말할 수 없을 만큼 크다.

‘거긴 별천지니까.’

본인에게 커다란 선물이 될 거라는 걸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소라는 누군가와 함께 지하로 기어들어 가야 한다는 사실이 그저 무서운 모양이다.

묘하게 기분이 좋아진 것 같은 정하얀을 보고서는 더욱더 불안해졌는지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는데, 확실히 정하얀 전문가라고 할 만했다.

“……!”

잠깐 머릿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에 몸이 환한 빛에 둘러싸이며 시야가 반전되기 시작.

후우욱! 하는 느낌과 함께 몸은 전혀 다른 곳에 있다.

‘신기하네, 진짜.’

정하얀이 보인 마법에 감탄한 시간은 짧았다. 아무래도 완전히 폐허가 된 5현장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리라.

예상은 했고… 보고도 받았지만, 생각하던 것보다 많이 망가진 듯한 모습.

특히나 완전히 무너져 내린 부분이 있다는 게 뼈 아프다.

이 정도면 처음부터 성벽을 쌓는 게 빠를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맴돌 정도로 형편없어진 현장의 모습은 괜스레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후우….”

‘1년 이상 걸리겠네.’

본래 5구역 자체도 공사가 마무리된 상황이 아니었다.

물론 완공을 눈앞에 두기는 했지만 이후, 가공이나 보수로 신경 쓸 게 많다는 걸 떠올리면, 적어도 3개월, 길면 6개월 이상 걸릴 수도 있었다는 게 관리 위원회의 판단이었다.

처음부터 새로 시작해야 할 지경까지 왔으니 오죽할까.

최대한 빨리 완공한 이후 병력을 배치하고 싶었던 나로서는 여러모로 아쉬워질 수밖에 없다.

이런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하얀은 그저 실실 미소를 보내기에 여념이 없다.

얘를 원망하면 안 된다는 걸 이미 깨닫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괜히 팔이라도 한 번 뿌리치고 싶다.

“오신다는 연락은 받았습니다, 위원장님.”

“당신은….”

‘지혜 누나 사람이네.’

“시간에 맞출 수 있을까 걱정했었는데 다행히 입구를 찾은 뒤에 도착하셨군요. 곧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네.”

“미리 말씀해 주셨던 대로 청사의 안쪽에서 지하로 통하는 입구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마법이 걸려 있다고 하셔서 시간이 조금 걸릴 거라고 예상했지만, 청사가 무너지면서 유지됐던 마법도 사라진 것 같더군요.”

“음… 그렇습니까?”

“예, 길을 찾기가 쉽지가 않더군요. 마법이외에도 트릭이 많아서… 저희 역시 조금 고생했습니다. 간단하게는 벽장 뒤의 문 같은 트릭이었지만, 구조 자체가 본인들만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암호화되어 있었습니다. 설계자가 무척 머리를 썼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마치 던전 같더군요. 그것도 아주 잘 설계된 던전 말입니다.”

“거, 어떻게 생각해 보면 맞는 말 아니요. 그 악마 계약자 놈들이 사용했던 장소이니 실상 던전이나 다를 바가 없지.”

‘확실히….’

던전이라고 부를 만도 하다.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건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들었다는 것 그리고 굳이 공략할 필요가 없다는 것.

이를테면 이미 공략된 던전에 보상을 받으러 가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기분이 나아지기는 하네.’

뭘 얼마나 얻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제발 잃은 것보다 얻는 게 더 컸으면 좋겠다.

아니, 무조건 뭐라도 얻어 가야 했다.

베니고어 오피셜로 선택받은 용사 프로젝트가 완전히 무너져 내린 현시점에서 기댈 수 있는 장소가 이곳밖에 없다.

그렇게 안내인과 몇 가지 말을 주고받으며 적지 않은 시간 동안 발걸음을 옮기자, 이윽고 한눈에 보기에도 넓은 동공처럼 보이는 곳이 시야에 비치기 시작했다.

“여기서부터는 저희도 들어가 보지 않았습니다. 먼저 가서 안전한지에 대한 여부를 확인해 보고 싶었지만… 이지혜 님께서….”

“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일단은… 고생하셨습니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당연한 일이라뇨. 여러분의 노고는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추가로 지혜 씨한테도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제야 고개를 꾸벅 숙이며 떠나는 녀석.

‘지혜 누나도 참 지혜 누나네.’

대충 보기에도 충성스러워 보인다.

할 일이 더럽게 많아 제대로 쉴 수도 없었는데, 어떻게 저렇게 자기 사람을 만들어놨는지 모르겠다.

마음의 눈으로 보기에도 수준이 결코 낮아 보이지 않았으니, 다른 말이 굳이 필요할까.

‘뭐,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괜히 손가락으로 허벅지를 툭툭 두드리며 시선을 옮기자, 조금은 긴장한 파티원들의 얼굴이 보였다.

특히나 박덕구와 조혜진은 조금 더 민감해진 느낌. 한소라가 나에게 슬쩍 눈빛을 보내오는 것도 시야에 비친다.

‘느껴지기는 하나 보네.’

역병군주였다면 나 역시 그녀가 느끼는 것과 똑같은 것을 느끼지 않았을까.

눈치 빠른 정하얀이 한소라가 보낸 신호를 보고 그녀를 빤히 바라보기는 했지만, 한소라 본인 빼고는 문제가 없다.

“진입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앞장선 박덕구.

이윽고 눈에 보인 풍경에는 입을 커다랗게 벌릴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