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Instruction Manual

Regression Manual 606s

일생일대의 고민(4)

[정말?]

“아직은. 아직은 죄인 아니라고요… 일단 저는 현장으로 가보겠습니다. 이쪽 일은 대충 수습이 된 것 같으니….”

[가, 가지 마. 이기영 신도… 가지 마. 여기 같이 있어야지. 도대체 어딜 가려고 그래. 나 또 조사받으러 가면 어떻게 해.]

“뭘 어떻게 해요. 변호사가 오기 전까지는 대답할 수 없다고 잡아떼세요. 그리고 이렇게 금방 다시 올 일 없습니다. 이미 상급자한테 보고 들어간 사항이고, 위쪽에서 입장 정리하기 전까지는 시간이 제법 걸릴 테니 안심하시고 할 일 보세요. 이제 아실 만한 분이 왜 이러실까. 이토 소우타 때도 보고 있었잖아요.”

[버리려는 거 아니지? 그런 거지?]

“이제 와서 버리긴 뭘 버립니까. 이미 한 배를 탄 거나 마찬가지인데. 어차피 멀리 떨어져 있어도 대화할 수 있는 수단이 있잖아요. 여기서 시간을 생각보다 많이 끌어서 빨리 일하러 가야 해요.”

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저 불안한 표정이 신경 쓰인다.

이런 말 하기는 조금 뭣 하기는 했지만, 전형적인 범죄자의 얼굴과 어울리는 듯한 얼굴이다.

본인이 뭔가 켕기는 게 없다면 절대로 나올 수 없는 표정.

빛무리에 휩싸인 채로 저런 모습을 하는 게 우습기는 했지만, 아쉽게도 마냥 웃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잠깐 장내에 찾아온 침묵이 불안했을까. 베니고어가 다시 한번 말을 이어왔다.

[그, 그래도 조금만 같이 있으면 안 될까? 대책을 강구하기도 해야 되고… 여러 가지로 논의해야 될 일이 많으니까.]

“그러면 한 번 물어나 봅시다. 아니 도대체 뭣 때문에 이 사달이 난 겁니까?”

라는 말을 막상 내뱉으니 가슴 한쪽이 쿡쿡 찔려오기는 한다. 이미 루시퍼의 성검 자체가 문제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넬리아가 성검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은 걸 보면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은데….’

분명히 문제가 된 게 있다면 한마디 정도는 언급했을 게 분명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악마 계약 건이 가장 크게 잡히지 않았을까.

‘그러게. 덜컥 악마랑 계약하면 어떻게 해.’

내 질문에 베니고어는 살짝 긴장하는 듯한 모양새.

어서 빨리 썰을 풀어보라는 듯 재촉하자 조심스레 입을 열어오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사, 사실 마검 때문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니야.]

“그래요?”

[으응… 이기영 신도는 아직 우리쪽 소속이 아니고 대륙에서 활동하는 인간의 입장에 있으니까. 우리 같은 경우에는 이기영 신도에 대한 물리력을 행사할 수는 없거든. 상부 측에서도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고… 이기영 신도의 잘못은 아니라는 거야. 이기영 신도가 벨리알이나 루시퍼와 친하게 지낸다는 것도 문제가 되지는 않고… 물론 정도가 심해진다면 이기영 신도를 마왕으로 판단해 성검이나 용사를 내보내기는 하지만….]

“뭐?”

[당연히! 우리가 그럴 리가 없지! 누가 감히 이기영 신도를 마왕으로 보겠어?! 결국, 이기영 신도는 우리와 함께한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

[이번 경우에도 루시퍼의 꼬임에 넘어 간 거니까… 그러니까 문제가 뭐냐면.]

“네, 말씀해 보세요.”

[내가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1차적으로는 그게 문제가 돼서….]

“네? 겨우 그거예요?”

물론 그 뒤에 연쇄적으로 터진 2차적 문제가 컸겠지만, 발단 자체가 고작 그거라는 것에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와, 이 새끼들도 진짜 너무하네.’

1차적으로 문제가 된 게 겨우 루시퍼의 침입을 눈치채지 못한 것 때문이란다.

물론 대륙을 관리하는 관리자로서 책임을 회피할 수는 없겠지만….

‘이렇게까지 몰아붙일 사안이 아니지. 지들도 눈치 못 챘을 거면서… 애초에 상급자 아니면 그 정도나 되는 위인을 감지할 수나 있나?’

만약 넬리아가 관리했더라도 눈치채지 못했을 거라고 100% 장담할 수 있다.

일반적인 악마라면 추적이 가능했겠지만, 무려 그 루시퍼가 아니었던가.

루시퍼 본인도 큰 문제를 일으키기 싫어 작정하고 몰래 들어왔다고 표현했으니, 베니고어의 능력으로는 그녀를 캐치하지 못한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어떻게 생각해도 그녀의 무능력을 탓할 사안이 아니라는 거다.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뒤가 엄청나게 구린 듯한 느낌.

상투적인 표현이었지만 구린 냄새가 진동을 하고 있었다.

겨우 저 정도로 감찰단이 들어와서 베니고어 사단을 뒤집어?

‘파벌 내 알력 다툼이나 타 파벌의 견제가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지.’

하늘 위도 인간들이 사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더 기이한 형태의 권력 구도를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베니고어가 어떤 적을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렇게 감찰단을 움직여 대륙을 들쑤셔 놓을 정도라면 상당한 거물을 적으로 만들었다고 봐도 될 것 같았다.

당초에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상황이 더욱더 복잡해지고 있는 느낌에 괜스레 한숨이 튀어나온다.

어쩌면 일이 더 커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최악의 경우 대륙의 똥을 투척한 이후 베니고어를 데리고 루시퍼 쪽으로 이적하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다른 표현이 필요할 리가 없다.

“누구를 적으로 만든 겁니까?”

[적… 적 같은 건 없어… 나는 모두와 사이가 좋은 편이니까.]

‘그건 네 생각이고, 이 사람아.’

내가 하늘 위에 직접 올라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차라리 바리안이나 로렌 같은 얘들이랑 대화해 보는 게 낫지 않을까.

정말로 적이 있다면 그쪽에서도 이야기가 나오고 있을 테니까.

사안이 보통 사안이 아니다 보니 입술을 깨물며 오만 가지 생각을 전부 하게 된다.

“정말 그 새끼들도 너무하는데….”

[역시… 이기영 신도라면 그렇게 이야기할 줄 알았어. 일하다 보면 조금 쉴 수도 있는 거잖아… 그렇지?]

“…….”

왠지 모르게 안심했다는 얼굴이 괜스레 신경 쓰인다.

[내가 휴식을 취하고 있어서 보고가 조금 늦었거든… 사실 그것 때문에 여기에… 조금 문제가 생긴 거야.]

‘그건 아닐 거야’라고 생각했지만 언제나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연락이 없었지.’

루시퍼의 성검을 획득한 그 순간부터, 하늘 위에서 성검이 내려 떨어지는 그 순간까지 베니고어에게 따로 연락을 받은 적이 없었다.

허벅지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는 순간에도 불안함이 가시지를 않는다.

대륙 전체가 완전히 뒤집힐 만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피드백이 없었던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27군단 소환 당시에는 파산 상태였기 때문에 개입하지 못했었지만 벨리알 때는 곧바로 개입해 오지 않았던가.

박물관 때도 마찬가지였다.

신화적 존재와의 마찰이나 접전이 있었을 때 베니고어는 항상 이쪽에 먼저 말을 걸어왔다.

왜 이번에는 먼저 피드백을 해오지 않았을까.

‘시바… 몰랐던 거야.’

애초에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미친. 거의 48시간 이상이지 않았었나. 어떻게 시바, 모르고 있을 수가 있지?’

베니고어는 시바 도대체 그 긴 시간 동안 어디서 무엇을 했나.

베니고어는 도대체 40시간 동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던 걸까.

성검이 대륙에 나타나고 하늘을 날아 땅에 꽂히고, 심지어 입장 발표까지 끝냈을 동안 이 여신은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었나.

문제가 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한 상황이다.

“그래서 얼마나 쉬고 있었어요?”

목소리가 떨려온다.

베니고어 역시 목소리가 떨린다는 걸 인지했는지 계속해서 내 눈치를 살폈다.

[잘 모르겠는데… 이번에는 조금 오래… 인간의 시간을 기, 기준으로 하면 40시간… 언저리 정도일 것 같은데….]

‘파벌은 개뿔… 시바.’

단두대처럼 힘 있게 내려온 통렬한 한 방.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둠기영 상태 일 때 김현성에게 맞았던 한 방보다 더 묵직했다.

‘개 미친….’

순간적으로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갔지만, 불안해하는 저 얼굴을 보니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냥 넬리아와 함께 일했어야 했나 하는 생각이 저도 모르게 들어와 꽂힌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지 않는가.

루시퍼가 들어온 것은 눈치채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고는 해도….

‘너 진짜, 시바….’

[물론 그냥 쉬기만 한 건 아니야. 여러 가지 문제들을 처리하느라 나도 조금 바, 바빴어. 저번에도 말했듯이 조금 할 일이 많아서… 물론 잠깐 내가 시선을 돌린 건 맞지만, 이기영 신도가 생각하는 그런 상황은 절대로 아니야. 단지… 단지 최근에 나도 많이 힘들었었잖아. 여러 가지 일도 많았고… 엘룬의 일도 있어서… 걱정이 조금 많아지고 정신적으로도 많이 힘들었거든… 그래서 잠깐 일에 집중하지 못했나 봐.]

“아무리 그래도….”

[아무튼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됐어. 이기영 신도가 예상하는 것처럼 그 이후에는 내가 떠안고 있는 문제들이 공론화됐고… 물론 내가 잘못하지 않았다는 걸 부정하는 건 아니지만… 조금 억울한 면도….]

“아니야, 너 억울해하면 안 돼. 너 잘못한 거 맞아.”

[그래도… 버리지 않을 거지?]

마음 같아서는 곧바로 팔아넘기고 싶어진다.

[악, 악마 계약 건이 제일 문제가 됐단… 말이야.]

‘나는 모르는 일이야.’

[정말 이대로 가는 건 아니지? 네, 네, 네가 계약하라고 꼬드겼잖아.]

‘내가 언제.’

[이기영 신도가 공증인이 되어 준다고 했잖아. 정말 이렇게 끝내려고 하는 건 아니지. 살살 꼬드길 때는 언제고. 이렇게 헌신짝 버리듯이 버리는 건 아닌 거지? 나 진짜 의지할 곳이 이기영 신도밖에 없어. 버리면 안 돼. 우리는 운명공동체, 운명공동체잖아.]

정말로 마음 같아서는 운명공동체고 나발이고 튀어버리고 싶은 상황이다.

하지만 베니고어의 말대로….

‘운명공동체가 맞아.’

이미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베니고어의 주장으로 인해 억지로 계약의 공증인이 되기도 했고, 여러 가지로 얽힌 게 많다.

베니고어가 모든 걸 안고 몇 만 년만 옥살이를 하고 나온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겠지만, 얘 성격에 그렇게 할 리 만무하지 않은가.

본인이 총대를 메고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분명히 중간에 문제가 생길 게 분명했다.

‘어쩌겠어, 이게 내 업본데.’

결과야 어떻게 됐든 간에 안고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아무 말 없이 발걸음을 옮기자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기 시작하는 베니고어의 모습은 가관.

‘얘는 도대체 어디까지 추해지려고 그러는 거야.’

속으로는 투덜거렸지만 자연스럽게 입은 벌어졌다.

[흐어어어엉… 가지 마! 버리지 마! 이기영 신도….]

“버리는 거 아니니까 진정 좀 합시다. 진짜 바빠서 일 좀 하려고 가는 거예요. 베니고어 님은 제가 가는 즉시 조사받았던 내용 전달해 주세요. 정확히 어떤 혐의가 있는지 전부 다요. 그리고 최근 신성사용 내역도 전부 다 전해주시고요. 일단은 정확히 무슨 죄가 적용됐는지 좀 봐야겠습니다. 그래야 뭐라도 해볼 수 있죠.”

[이기영 신도오….]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만 장난칠 생각하지 말아요. 숨기는 거 없이 정확하게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엘룬 쓰레기의 신성 사용 내역도 정리해서 가져와야 합니다, 꼭.”

[알겠어. 할 수 있는 데까지는 최, 최선을 다해서 해볼게. 정말로… 정말로 고마워… 내 평생 이기영 신도를 만난 게 얼마나 행운인지… 알타누스의 안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라니까… 이기영 신도가 아니었다면 정말로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거야. 내가 많이 사랑하고 아끼고 있다는 거 알고 있지?]

“…….”

[너무 고마워. 너무… 그러니까 제발 버리면 안 돼. 우리 계속 같이 가는 거야. 여기 올라온 다음에도… 알겠지?]

“신성이나 잘 모아놓으세요. 분명히 어떤 부탁이든 들어준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어?]

“분명히 약속한 거예요.”

[아… 으응… 그, 그렇지. 그래… 그래야지. 그, 그럼 나는 열심히 할 일 하고 있을게. 사랑스러운 이기영 신도 파이팅!]

그다지 달갑지 않은 응원에 저도 모르게 인상이 찌푸려졌지만, 일단은 입술을 꽉 깨물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손해를 봤으니 다른 곳에서 이득을 꼭 보고 싶다는 투자자의 마음에 불이 붙은 것이다.

성검이든, 5현장이든 둘 중 하나는 꼭 괜찮은 결과가 나와 줘야 하는 상황.

개인적으로는 전자에 가능성을 걸고 있었지만, 뜻밖에도 먼저 터진 쪽은 후자였다.

본격적인 연구에 들어간 지 시간이 얼마 지나지도 않은 시점.

두 번째 직업으로 결정한 생체 연금 소환사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키메라 연구가 이상할 정도로 빠른 진전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호문클루스라도 만드는 거 아니야?’

설레발 치는 걸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그나마 기분이 나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