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Instruction Manual

Regression Manual 692

마지막을 준비하자 (1)

[진짜 인간 쓰레기다. 진짜로.]

[왜 그래. 누나.]

[꼭 그렇게 훼방을 놔야겠어요? 나랑 혜진이랑 노는 게 그렇게 아니꼬웠나?]

[무슨 말 하는지 잘 모르겠는데… 아! 근데 어제 혜진이 새벽 3시까지 놀다 갔음.]

[내 약속까지 깨면서 그러는 건 아니지 진짜. 오래전부터 잡아놓은 약속이었는데. 전쟁 들어가기 직전에 휴일 한번 만들어보려고 얼마나 무리한 줄 알아요? 어제가 딱 하루 비는 시간이었다고요. 근데 그걸 파투 내? 솔직히 오늘 만났어도 상관없었던 것 아니었나? 일부러 나 엿 먹으라고 저격한 건 아니죠?]

[같이 사진도 찍었음ㅋㅋㅋ]

[얘가 심란해서 베톡도 안 읽잖아요. 진짜.]

-이기영 님이 사진을 전송하셨습니다.

[사진 잘 나왔지ㅋㅋㅋ]

[누구는 시한부랑 기억상실 같은 거 못 써서 안 쓰는 줄 아나 봐? 두고 봐. 나도 기가 막힌 거 하나 만들 테니까. 한번 보자고요. 진짜.]

‘안 그래도 얘 심란해 죽으려고 하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저절로 혀를 쯧쯧 차게 되는 문자였다.

어제 조혜진이 어떤 표정을 보였는지 이지혜가 보지 못했기 때문에 저런 대사를 날릴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얘 인성이면 알아도 강행하지 않을까.

[마취 물약 하나만 팔아요.]

[내가 쓸 것밖에 없어.]

[많이 만들어 놓는다고 했잖아요. 티끌만큼의 고통도 느끼기 싫다고 계속 개량했잖아요. 그중에 하나만 팔라고.]

[나는 진짜로 필요해서 쓰는 거고 누나는 주작하려고 쓰는 거잖아.]

[너도 주작이잖아.]

[아니, 나는 진짜로 죽을지도 모른다니까. 진짜로 필요해서 쓰는 거라고, 누나.]

[아무튼 주작이잖아. 이 사기꾼아.]

‘주작 아니야. 누나.’

인류를 위해 희생하는 빛의 뜻을 어떻게 몰라줄 수 있는지 착잡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연수랑 얘들 몇 명 불러서 같이 놀았다며.]

[다 같이 모이는 자리였다고요. 조혜진도 있어야 하는 자리였다고….]

[일이잖아. 나도 누나 생각했으면 그런 말 안 했지. 그리고 오늘 할 일이 왜 없어? 조금 이따가 연설 준비도 해야 하고, 하얀이 건도 마무리 지어야 하는데. 지금 내가 괜히 교국에 있는 줄 알아? 그게 제일 중요하잖아. 그리고 진짜 이게 쉬운 일이 아니라니까. 감정 잡아야 돼. 진짜. 이번 일은 감정선이 중요하다고.]

[일 끝나면 스케줄 잡아놨으니까. 아직 답장은 안 왔지만, 그것도 훼방 놓지 마요.]

[아니, 진짜 누가 들으면 내가 누나랑 혜진이랑 친하게 지내는 거 보기 싫어하는 줄 알겠네.]

[맞잖아.]

‘아니, 진짜 아니라니까.’

[감정 좀 잡자. 누나. 진짜 중요한 일이라고.]

손거울 너머로 이지혜가 화가 난 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쪽에게 컨트롤 프릭이니 뭐니 중얼거리기는 했지만 이지혜 역시 그런 성향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조금 이죽거리기는 했지만 본인이 원하는 시간을 즐기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 무척 억울해하는 모양새이지 않은가.

마취 물약까지 챙기는 걸 보면 극단적인 방법까지 쓰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스스로를 희생하는 이기영을 이길 방법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두고 떠나 대륙을 위해 이 한 몸 불살라야 한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빛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릴 정도. 이 감정은 진짜였다.

‘지켜야 돼.’

아름다운 이 땅, 그리고 이 땅 위에 살아가는 이들을 지켜야 한다.

솔직히 죽음이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막상 이기영의 삶이 끝난다고 생각하니 씁쓸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이야기라는 거다.

여러 가지로 준비해야 할 것도 많고…. 이를테면 마취 물약 같은 거… 그것도 센 놈으로….

스스로 정리해야 할 일도 있었다. 왜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지 알 것 같은 느낌.

쏟아지는 빛을 받으며 조용히 여신상에 기도를 올리는 자신의 모습에 조금 취할 것 같기는 했지만 복잡한 심정이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준비해야지.’

마음의 준비를, 떠날 준비를 하자.

“명예추기경.”

“바젤 교황님….”

“베니고어 님과 함께하는 시간에 내가 눈치 없이 방해한 건 아닌지 모르겠네.”

“그렇지 않습니다.”

“명예추기경의 뒷모습이 너무 슬퍼 보여서 말이야. 입에도 담기 힘들고 담아서도 안 되는 말이지만… 마치 다시는 보지 못할 사람처럼 느껴져.”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조금 더 조심해야지. 티를 내면 안 돼. 소중한 사람들이 상처받을지도 모르니까.

“그래. 그럴 리가 있겠는가. 베니고어 님께서 명예추기경을 얼마나 아끼시는데…. 그래… 그럴 리가 없지. 이거 내가 괜한 말을 했군….”

“그만큼 저를 염려해 주신 것으로 생각하겠습니다. 바젤 교황님.”

“하하. 여전히 명예추기경은 내가 듣기 좋은 소리를 골라서 하는구만. 하지만 다른 이들이 입에 담는 말처럼 거짓이 느껴지지 않아. 애초에… 애초에 명예추기경은 거짓말이라는 걸 해본 적은 있는 겐가.”

“저도 사람입니다. 교황님.”

바젤 교황의 말에 쓴 웃음을 짓게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어쩌면 정곡을 찔렸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이렇게 모두를 속이는 게 정말로 괜찮은 것인지에 대해 다시 한번 떠올리게 된다.

나는 괜찮을 거라고 아무 문제 없을 거라고, 웃으며 넘기는 것이 과연 정말로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일까.

모두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매듭을 지어야 하는 게 건강한 엔딩 아닐까.

하지만 그들이 감당할 슬픔을 생각하자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용기가 생기지 않았던 탓이다.

‘이기영… 이 겁쟁이 새끼.’

다른 이들이 조혜진처럼 슬퍼하는 모습을 상상하자 알 수 없는 감정 때문에 몸이 떨려온다.

슬픔을 감당하는 것은 이기영 하나로도 족하다. 주력이라고 할 수 있는 길드원들의 멘탈에 문제가 생긴다면 대륙의 안위에도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이 땅 위에 살아갈 모든 이들을 위해 다시 한번 마음을 굳게 먹어야 했다.

‘두려워하지 말자. 기영아. 무서워하지 마.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거니까.’

“표정이 좋지 않군.”

“아무래도 여러 가지로 생각이 복잡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럴 만도 하지. 당장 내일이 아닌가. 나 역시 여신님이 우리를 버리지 않을 거라고 많은 신도들을 독려하고 있지만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라네.”

“…….”

“무섭지.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어.”

“베니고어 여신님께서 항상 바젤 교황님을 살피실 것입니다.”

“죽을 때가 다 된 내가 여신님의 가호를 받아 무엇 하겠는가. 나는 데려가더라도 명예추기경만은 데려가지 않으셨으면 하는 바람이야. 이번 전쟁에서도 교황청을 떠나지 못한다니…. 이 늙은 몸뚱이가 이렇게 원망스러운 적은 처음이네.”

“너무 자책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교황청 안에 모여 있는 저들을 보십시오. 모두가 바젤 교황님만 믿고 있는 이들 아닙니까. 저 역시 바젤 교황님이 아니었다면 이번 일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을 겁니다. 다시 한번 저들을 보십시오, 교황님. 기도를 드리고 있는 이들 말입니다. 이곳은 최후의 성지입니다. 만약 북부에 있는 거점들이 모두 적들의 손에 넘어간다면 저들이 의지할 수 있는 것은 교황님뿐일 겁니다. 주제넘은 소리처럼 들리신다면 죄송하지만 조금 더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셔야 합니다.”

“그렇지. 그래야지. 그래야겠지…. 내가 약한 소리를 했구만… 또 쓸데없는 소리를 했어.”

“…….”

“함께 내려가세. 명예추기경.”

“네.”

“이후에는 무엇을 할 생각인가.”

“제 연인과 함께 시간을 보낼 계획입니다.”

“그렇구만… 그렇겠지. 명예추기경 역시.”

“부끄럽습니다.”

“전혀 부끄러운 모습이 아닐세. 그동안 오직 대륙만을 위해 뛰어오지 않았나. 명예추기경이 아끼는 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 정도야 당연하겠지. 내가 괜한 부탁을 한 것은 아닌가?”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은 진작에 찾아뵀어야 하는 일이었으니까요. 교국은 제 고향이며 제 영혼이 숨 쉬고 있는 곳입니다. 전쟁피난민들을 격려하는 것은 교국의 명예추기경으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입니다.”

“명예추기경은 그런 사람이었지.”

슬그머니 미소 짓고 있는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기자 작은 소리가 모여 만드는 커다란 소리가 들려온다.

교황청으로 임시 피난을 온 피난민들의 모습, 아무리 교황청의 지원이 있다고는 하더라도… 인원이 인원인 만큼 열악한 환경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그런 모습들이다. 모두가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괜스레 입술을 꽉 깨물게 되고 다시 한번 커다란 다짐을 하게 되는 광경이었다.

“명예추기경님.”

“부디 대륙을 구원해 주십시오.”

“명예추기경님….”

“베니고어 여신님. 부디 명예추기경님을….”

“부디 교국을….”

“교국을 지켜주십시오.”

“명예추기경님.”

“베니고어의 현신이시여.”

“신의 아들이시여. 부디 우리를 구원해 주시옵소서.”

무섭다.

이 책임감이, 나를 짓누르는 중압감이 나를 두렵게 한다. 하지만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이지 않은가.

몰려드는 군중들 때문에 신성기사단 역시 곤욕을 치르고 있는 상황.

왠지 모르게 이런 상황에서는 말도 안 되는 기동력과 우연의 겹침으로 신성기사단을 뚫고 들어오는 작은 어린아이가 튀어나와 주게 마련.

저번에도 이런 상황에서 한 번 튀어나와 줬던 것 같은 기억이 있는데… 이번에는 튀어나와 주지 않은 것 같아 아쉬웠다.

‘아, 시바. 연출 담당자 누구야. 지혜 누나 삐졌어? 진짜?’

잠깐 입술을 꽉 깨물었을 때였다. 아니나 다를까.

“붙잡아!”

누군가를 붙잡으라는 커다란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

반가운 마음에 소리가 들리는 쪽을 바라보자 당황하는 신성기사단과 그 신성기사단의 손을 빠져나오는 소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라고 하기에는 뭣 하다. 이제 막 16살 정도는 되었을지 모르겠다. 몸놀림이 예사롭지 않은 것을 보면 수도의 뒷골목에서 꽤 날렸을 것만 같다.

꼬질꼬질한 모습,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베니고어 교국의 로자리오. 이것 역시 꼬질꼬질하다.

‘아이고. 이 귀여운 새끼.’

타이밍 좋게 등장한 녀석에 저도 모르게 포근한 미소가 지어졌다.

“괜찮습니다.”

암살자 같은 게 아니다. 이름 모를 소년은 단순히 자신의 손에 쥔 로자리오를 전해주기 위해 이쪽으로 달려오는 것이다.

“죄송합니다. 명예추기경님. 지금 당장….”

“아니요. 괜찮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쪽으로 올 수 있게 도와주세요.”

신성기사단 신참의 이런 무능력한 모습은 오히려 고맙기까지 하다. 다시 한번 앞을 바라보자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소년의 모습이 눈에 비쳤다. 녀석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꼭… 꼭 전해드리고 싶어서.”

“고맙구나.”

“꼭… 전해드리고 싶… 싶어서….”

“고맙다.”

“꼭… 어….”

감사는 제대로 표현해야지. 더러운 손을 꽉 붙잡은 것은 당연지사.

내가 이런 반응을 보일 줄은 몰랐다는 듯 깜짝 놀라는 녀석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불경죄라도 저지르는 것마냥 바들바들 떨고 있는 모습은 초식동물처럼 애처롭다.

찬란한 빛이 퍼져 나간다. 녀석의 몸 상태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신성으로 가득 차고 있는 자신의 몸 상태를 깨닫고 있지 않을까 싶다.

“어… 어….”

당연히 이해할 수 있는 광경이다. 녀석이 손에 들고 있는 로자리오를 슬그머니 빼낸 이후 이쪽의 목에 거는 것 역시 마땅히 해야 할 행동. 아니, 그것보다는 걸어달라고 하는 게 더 효과가 좋을 것 같다.

“걸어주겠니?”

아직은 키가 작은 녀석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고 눈을 마주치자 잔뜩 긴장한 것 같은 모습이 눈에 보였다.

두려움, 기쁨, 당황스러움, 믿음, 수많은 감정이 들어서 있는 눈은 뭐라고 표현하기도 모호했다.

앞으로 대륙을 이끌어 나갈 아이, 교국의 희망, 인류의 미래, 이기영은 이들을 위해 죽는다. 의미 없는 죽음은 아닐 것이다. 후회 없는 죽음도 아닐 것이다. 아니….

‘후회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닌가.’

후회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 아이의 미래를, 이 소년이 살아갈 세상을 내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정말로… 고맙다. 큰 힘이 됐어.”

“어… 어….”

내가 녀석의 눈에서 감정을 읽었던 것처럼 녀석도 내 눈에 들어 있는 감정을 읽었던 것일까.

“어… 죄송… 합니다. 흐윽… 죄송….”

모든 것을 짊어지려고 하는 성자의 책임감을… 결국에는… 결국에는… 읽고야 만 것일까.

“죄송합니다… 흐윽… 죄송… 죄송합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고만 있는 녀석을 나는 살짝 안아줄 수밖에 없었다.

“고맙다.”

얘한테는 진짜 고마웠다.

“힘내세요. 힘… 힘내세요. 꼭… 이기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