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236. (3) (Revised) >

4.

다음 순간.

“후후후.”

실비아는 음습하게 웃었다.

반짝거리는 소녀의 순수성은, 그 웃음이 머금은 습기를 전혀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잘 어울려 섞였다.

“저는 이 사실을 알아내자마자 화들짝 놀라면서, 쪽지를 숨겼지요. 저와 은백합 영애님이 태어날 때부터, 아니 어쩌면 태어나기 전부터 똑같은 운명으로 엮여져 있다는 사실. 그 무서운 사실이 고백되어버린 쪽지를, 꾹, 숨겼답니다.”

누구에게도 들키기 싫다는 듯이.

“당연하지요? 이건 매우 고혹적인 비밀이에요. 사교회에서 영애들끼리 웃으면서 [이건 내가 친구한테 들은 비밀인데] [아, 난 부모님한테 엿들은 비밀인데]라면서, 한낱 티타임을 소화시키기 위한 떡밥들과--- 이 [비밀쪽지]는 전적으로 달랐습니다. 예. 완전히 달라야만 했지요!”

여전히 은방울 사교회에는 또래 영애들이 많았다.

어떻게 하면 그들한테 눈치 채이지 않고, 이 비밀쪽지를 가져갈 것인지.

은백합 영애님한테 가져가서, 이 놀랍고도 신비로운 우연의 일치를, 어찌해야 아뢸 수 있을련지. 어린 실비아 영애는 무척이나 긴장했다.

“저는 다른 은방울 회원들과는 달라요. 예, 아주 다르지요. 저 아이들이 은백합 영애님께서 오늘 얼마나 아름다우셨는지, 누구를 만나서 첫 번째로 춤을 추셨다든지, 그런 거에만 홀딱 빠졌을 때도…… 저는 은밀히, 은백합 영애님과 저의 어떤 신비적인 연결을 찾고 있었던 거예요. 별점, 운세, 탄생석…. 하지만 이제 다 쓸모없지요. 이름. 두 사람의 이름이, 은백합 영애님과 저의 끊을 수 없은 인연을 증명 해주고 있으니까요!”

"......."

낡은 마당에 들뜬 열연이 펼쳐졌다.

노을은 오래 걸어서 지친 노인처럼 산봉오리를 천천히 넘었다. 오늘 하루를 돌면서 태양은 벌써 늙어버린 것 같았다.

늙은 노을이 지천에 깔릴 때, 지상에서 펼쳐지는 어느 시녀의 열연은, 아무리 열심히 목소리를 토해내도, 그저 지나간 과거의 빛바랜 음색으로만 울렸다.

“제국법 같은 것은 상관없어요. 윤리? 도덕? 엿이나 먹으라지. 저는 확신하고 있었어요. 아직 은백합 영애님은 이걸 모를 뿐이어서, 만일 제가 그분께 이 비밀쪽지를 건네드리는 데 성공한다면 사교모임이 열리는 안뜰의 딸기 덩굴들을 건너뛰어, 미로처럼 얽힌 마당을 지나쳐, 마침내 은백합 영애님께서 신사들과 춤을 추고 계시는 홀에 오른다면……. 홀에 올라서, 은백합 영애님과 손이라도 한 번 잡겠다며 기다리는, 머저리 같은 남자들의 줄이 다 줄어들 때까지 기다려서.”

나는 용이하게 그 광경을 상상했다.

“드디어, 마침내, 제가 발견해낸 이 비밀을 영애님께 알려드린다면.”

아마도 당시에 실비아, 즉 금사매 영애는 몰골이 꾀쬐죄했을 것이다.

안뜰에서 홀까지 정신없이 뛰어왔을 테니 아무리 좋게 봐줘도 귀족의 우아한 품격엔 어울리지 않았을 거다. 은근히 축객령을 내리려 해도, ‘은백합 영애께 반드시 보여드려야 할 게 있다구요!’ 하고 주변의 만류를 팽개쳤겠지.

그리고.

“마침내 제 차례가 왔어요.”

두 사람이 마주했다.

한 명은 황태자비가 내정된 사교계의 꽃.

다른 한 명은 꽃을 동경하여 두근두근거리는 소녀.

-무슨 일이지?

-저, 저, 저는, 에바나일 남작가의 여식입니다. 이반시아의 달에 무궁한 영광이 있기를!

-그래. 무슨 일로 나를 보자고 한 것이더냐. 남작 영애.

은백합 영애는 지쳤다.

그녀는 새벽부터 줄곧 사교계에 붙잡혀 있었다. 모친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 반시아 공작가에서 안주인 역할을 해야 할 사람은 영애 자신이었다.

따라서 그녀는 모든 무도회를 계획·설계·관리·감독했을 뿐만 아니라, 황제 페하께 이름을 하사받은 사교계의 꽃으로서, 자신에게 춤을 신청해오는 유력 자제들한테 손을 내밀어주는 명예를 하사해주어야만 했다.

홀에서 춤을 추며 행여라도 상대편의 발을 안 밟도록 주의하는 동시에, 무도회가 잘 진행되고 있는지, 관현악단의 노래 선정에 하자는 없는지, 손님들에게 충분히 많은 음식과 술이 돌아가고 있는지, 실시간으로 파악해야만 했다.

말하자면, 라비엘 이반시아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제국의 한 축을 다루고 있었다. 그것도 꽤 능숙하게.

무도회 곳곳에 펼쳐놓은 공작가의 간자들은, 이곳에서 떠도는 소문과 비밀을 주인 아가씨한테 보고했다. 그 정보를 분류하고 해석하는 것 또한 은백합 영애의 일이었다.

그리하여, 라비엘 이반시아는 [제국]에 살고 있었다. 제국이 바로 그녀의 세계였다.

“저는 어엄청 긴장한 채 은백합 영애님께 손을 내밀었죠!”

반면에.

여기, 아직 제국이 무엇인지 모르고, 제국을 알아야 할 필요조차 없는, 어린 남작 영애가 있었다. 그녀는 지금 막 반짝거리는 보물을 발견했다. 우연이라는 이름의 보물.

다른 사람들한테 절대 들키지 않기 위해 손으로 꾸욱, 꾹, 구겨버린지라 비밀쪽지는 허스름했다. 은백합 영애의 고운 손바닥에 저런 쓰레기를 진상하는 것이 못내 부끄럽기도 했다.

-하지만 알아주실 거야!

어린 시절의 실비아는 그렇게 믿었을지 모른다.

-왜냐면, 정말 굉장하잖아! 친구가 되어주실 거라고!

그리고.

“은백합 영애님께서 비밀쪽지를 쭉 펼치더니, 한동안보고 계시더군요. 뭐.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아마 [적국에서 간자가 보내온 비밀 지령]이라거나, 그런 걸 상상하셨나 봅니다아. 그런데 아무리 봐도 모르겠으니까. 은백합 영애님은 무표정하게 나를 돌아보았죠.”

-이게 뭐지?

“그때 저는 처음으로 은백합 영애님이랑 눈이 마주쳤어요. 알겠습니까? 처음으로 눈이 마주쳤단 말입니다! 뭐, 표정이 좀 무표정해서 차갑긴 한데, 제 설명을 들으면 얼음장 같던 표정도 사르륵 녹아버릴 게 분명했죠. 전 쿵쾅쿵쾅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면서 알려드렸습니다.”

-저, 그게, 제 이름…….

-너의 이름?

-예! 제 이름은 실비아 에바나일인데, 그, 영애님의 존함인 라비엘 이반시아와…… 두 이름을 쪼개어서, 나열해보면…… 또, 똑같아요.

-.......

-시, 신기하지요? 굉장한… 정말 굉장한…… 우연의 일치…….

“말을 하면 할수록, 어, 이게 아닌데, 싶은 분위기가 강해지더라구요. 저는 어설프게 웃으면서 영애님의 얼굴을 올려다봤어요.”

-.......

“아."

시녀복을 입은 실비아 에바나일이 아, 하고 한탄했다.

“그 눈빛을 보고 깨달았지요. 응, 뭐. 그건 실망조차 아니고…… 단순히 그냥 재미없다는 표정도 아니었어요. 뭐라고 할까. 은백합 영애님의 붉은색 눈동자가 저를 내려보는데, 내려보는 2초의 시간 동안, 제 모든 것이 싸해지는 느낌이었죠.”

손가락 끝에서부터 자기 존재가 잘잘이 잘려나가는 감각.

“저 사람한테 저는 그냥 쓰레기였던 거예요.”

은백합 영애는 어린 아가씨에게 아무 말도 안 했다.

모욕이나 조롱, 작별을 건네지 않은 채 그저 등을 돌려 무도회로 떠났다.

그녀가 떠나고 남은 자리에는 꾀죄죄하게 구겨진 쪽지가 덩그러니 떨어져 있었다.

"......."

실비아 에바나일이 미소를 지었다.

“어린 시절에 곧잘 벌어지는 일들이지요. 예에.”

그녀는 허리를 굽혀 읏차, 빗자루를 잡았다.

그리고 마당에 써놓은 글자들을 슥, 슥, 닦아내기 시작했다.

“저는요. 딱히 욕심이랄 게 없었어요. 제 주변 영애들은 황태자가 잘 생겼다며 꺄악거렸지만, 연애니 결혼이니 그런 거에 애시당초 관심이 안 갔다고요. 그러다 우연히 엿보게 된 은백합 영애님이, 그저, 너무 아름다워서.”

스윽.

땅바닥에 그려진 자음과 모음이 흙먼지에 휘말려 사라졌다.

“그냥 좀 친해지고 싶었을 뿐이라고요.”

“그런데, 사람을 감히, 그렇게 모욕해?”

실비아가 고개를 들었다.

방금 전까지 실비아의 입가에 맺혔던 웃음과는 전혀 다른 웃음이 그녀의 얼굴에 만개했다. 독화(毒花). 맹렬한 독취를 풍기며 실비아는 활짝 웃었다.

“제국이 그렇게 중요해? 정보를 긁어모아 분류하는 작업이 그렇게도 신성스러워? 가문의 대소사를 정리하고, 백성들을 위무하고, 황태자와 약혼하는 것이 그렇게도 그렇게도 중요해서, 그에 비하면 나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지?”

그건.

“그러면 내가 증명해줄게.”

저주였다.

“당신이 그리도 중요하다 여기는 황태자. 내가 홀려버릴게. 간단하던데?”

“예쁜 얼굴에 예쁜 귓속말, 예쁜 손짓이 있으니까 바로 넘어오더라. 당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문의 간자들? 황태자한테 부탁해서, 황실 산하의 기사들을 움직여 좀 죽였어. 우리 황태자 전하께서 연인을 생각해주는 마음이 또 어찌나 찐하신지……! 저, 감동했다니까요!”

금사매 영애가 방긋 웃었다.

“당신은 내가 그런 짓을 벌일 때마다 경멸했지. 안 그랬나이까, 이반시아의 달이시여? [제국의 미래라곤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천것]이라거나. 예. 맞아요. 저는 제국을 생각해본 일이 없는 천것이에요. 하지만 저는 궁금했어요. 과연 그런 천것이.”

스윽.

바닥에 그려진 글자들이 다 지워졌다.

빗자루로 땅을 딛고, 실비아 시녀는 공손하게 머리를 굽혔다.

“당신의 재수없는 얼굴을 망가뜨릴 수 있을지 말이에요.”

“제국을 위하시죠? 제국민을 위하시지요. 황실에 충실하고, 가문을 사랑하시지요. 전, 그냥. 제국을 아작내고, 제국민을 도탄에 빠트려서, 황실을 엉망진창으로 헤집어놓은 다음, 가문을 나락으로 떨어트린 뒤에도…… 여전히 당신이 제국과 가문을 사랑하고 있을지.”

아니면,

“저를 미치도록 증오하고 있을지.”

“그게 궁금했답니다.”

실비아는 싱긋 웃었다.

“제국과 가문에 대한 사랑 [따위]보다 저에 대한 증오가 훨씬 더 독해지고, 깊어질 날만을 기다렸는데. 안타깝네요. 저기, 비실비실해 보이는 머슴 한 마리가 들어와서 모든 걸 망쳐놨으니까요.”

실비아가 힐끗, 나를 쳐다보았다.

눈웃음 아래에 반짝거리는 눈동자엔 원독(怨毒)이 고였다.

"......."

라비엘은 침묵하고 있었다.

방금 실비아가 말한 사건은, 어디까지나 그녀의 1회차 인생에서 벌어졌던 일.

라비엘로서는 기억하지 못하고 기억할 수가 없다. 이 세상에서 제일 현명한 나의 아내는, 턱을 짚은 채, 깊이 고민하고 있었다.

“알아."

그러기에 내가 대신 대답했다.

“뭐를 말인가요?”

“네가 어떤 기분이었을지, 얼마나 괴로웠을지를 잘 안다.”

실비아가 멈칫했다.

눈동자에게 고여있던 원독이 나를 향해 쏟아졌다.

“감히,”

금사매 영애가 말했다.

“감히 그런 말을.”

금사매 영애가 소매를 부여잡았다. 구겨진 소매가 옷 전체에 아지랑이같은 주름을 낳았다.

뜨겁고 격하게 그녀가 외쳤다.

“너 따위가 그걸 어떻게 안다는 거야? 네가 내 상처를 알아? 내가 얼마나 괴로웠는지 알아? 그 날 얼마나 아팠는지, 얼마나 괴로웠는지, 우러러보던 사람에게 무시당한다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네가 뭘, 대체 어떻게 안다고 그 따위 개소리를,”

“알아.”

나는 거듭 말했다.

“정말 잘 안다.”

고작해야 그 따위 일 때문에 인생 전체를 헛된 복수에 투자하였는가, 라고 나는 말하지 않았다.

고작해야 그 따위 일 때문에 네가 속한 세계 전체를 참화에 몰아넣었는가, 라고 나는 말하지 않았다.

무시당한다는 것.

없는 존재로 취급당한다는 것.

사람으로 대우받지 못한다는 것은, 그 누군가를 4000번 넘게 죽일 수 있을 만큼 강력한 독이다.

"...."

금사매가 이를 악물었다.

다물린 입안에서 이빨이 갈렸다.

그리고, 다시 입술을 열었다.

“그걸 알면, 왜 나를 방해하는 건가요."

“너의 집사.”

정적이 흘렀다.

“난 네 집사에 대해서 잘 몰라. 남몰래 너를 사랑했을지 모르고, 어쩌면 우리 아내님까지 사랑했을지 모르지. 하지만 분명한 건 네가 복수하겠다며 칼을 가는 인생이, 결코 행복하지 않았을 거라는 거야.”

"......."

“집사는 누군가가 자신들을 도와주길 바랬어. 그 소원을 하무스트라가 낚아챘고. 나는 그저 하무스트라의 대리인이 되어 파견됐을 뿐. 결국 지금 상황을 만들어낸 건 너 자신이야.”

“어째서 그게 저 자신 때문입니까?”

“집사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했잖아.”

"......."

“너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무시했어. 그냥 자기 복수에만 몰두했지. 그럼 하다못해 자기 자신만이라도 행복해야 하는데, 그것조차 이루지 못했지.”

그 결과.

“집사는 실제로 ‘없는 인간’이 되었어.”

나는 말했다.

“라비엘이 너에게 개새끼였다면, 너 역시 가장 근처에서 너를 돕고 있었던 집사에게 개새끼였던 거야.”

"......으."

실비아 에바나일이 고개를 떨구었다.

“뭡니까, 그게… 집사에 대한 이야기는.”

침묵 속에 드문드문 말이 흘렀다.

“그 녀석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건, 비겁하다구요….”

침묵이 내려앉았다.

서산을 넘긴 노을은 이제 어둑어둑해졌다. 골목의 가로등에서 위이잉, 소리를 내며 불이 들어왔다. 그러나 가난한 마을에서 가로등은 있는 힘껏 손을 사렸다. 주홍빛 가로등 불빛이 닿지 않은 자수정의 낡은 한옥은 그저 어두웠다.

“미안하다.”

라비엘의 목소리였다.

“미안했다. 실비아 에바나일.”

“그리고 미안하구나.”

실비아가 천천히 머리를 들었다. 어두운 밤에 사람들은 다만 윤곽으로 뭉쳐진 그림자인 양했다. 그림자의 몸에서 그림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뭐가 말입니까…?”

“내 기억에 없었던 일이라 한들, 아마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면 똑같이 흘러갔을 것이다. 나는 그대를 무시했겠지. 그대를 기억조차 못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당시 내게 의미있는 것은 오직 제국의 안녕과 가문의 영광 뿐이었으니.”

"......."

“미안하다. 나는, 아직 상처를 모르던 인간이었다.”

라비엘이 일어섰다.

일어설 적에 그녀가 앉아 있던 대청마루가 끼이이익, 낡은 소리를 냈다.

마치 고장난 카세트가 돌아가듯이.

“그대는 나로부터 약속된 미래를 앗아갔다. 황태자비의 자리를 빼앗았으며, 황태자 전하의 마음을 독식했다. 이반시아의 달. 사교계의 꽃. 장차 제국을 이끌어나갈 자. 그 모든 약속들이 그대로 인하여 허물렸다.”

“그래서 뭡니까……?”

“그대로 인해 내 심장은 처음으로 피를 흘렸다.”

뚜벅.

라비엘이 실비아를 향해 걸어갔다.

“아프더군. 아팠다. 거울을 바라보며 자신의 심장에 칼을 찔러넣어야만 했을 정도로 아팠다. 그제야 나는 내가 얼마나 많은 인간들에게 상처였는가를 알았다.”

“그리고 나의 사랑을 만났다.”

라비엘이 나를 돌아보았다.

어두운 장막 속에서도, 나는 그녀의 숨결이 가지는 온도, 숨소리가 지니는 박자, 눈에 감도는 향기를 더없이 뚜렷하게 알아보았다. 그녀는 말이 없었다. 말없이, 내게 다가오라 명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나의 사랑은, 나와 같은 상처를 입고 있었다. 회귀자라니. 끝없이 반복되는 생의 상처라니. 그런 것을 같이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할 줄이야, 미처 몰랐다.”

“나는 내게 영원한 반복의 저주가 내렸던 것을 감사히 여긴다.”

그렇다.

“덕분에 공자와 만날 수 있었다.”

나 또한 회귀하는 인생에 감사한다.

감사하게 되었다.

“그것은 무척이나 아팠으나.”

스승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아프디 아픈 나날이었지만.

“그 상처가 아니었더라면 내 사랑스러운 동류를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덕분에 라비엘을 보고 한눈에 반할 수 있었다.

“내가 상처를 입은 까닭은 다만, 나와 같이 피를 흘리고 있는 누군가를 만나기 위함임을. 공자여. 그대를 보고 알았으며. 실비아. 그대로 인하여 알게 되었다.”

“그대에게 감사한다. 실비아 에바나일.”

라비엘은 천천히.

밤먼지 가라앉은 땅바닥에 왼쪽 무릎을 꿇었다.

자신의 시녀를 향하여, 머리를 숙였다.

“고맙다.”

아, 역시.

역시 라비엘은…… 나의 연인이다.

내가 유수하에게 가진 감정만큼이나, 라비엘이 실비아에게 가진 감정 또한 지독할 것이다. 보복하고 싶을 것이고, 복수하고 싶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비엘은 실비아에게 무릎을 꿇었다.

나와 만난 지금 현재가 압도적으로 행복하기에.

이 순간을 만들게 해준 과거의 모든 것들에 대하여, 감사한다.

"......윽."

실비아가 이를 악물었다.

“젠장……, 빌어먹을! 이래서. 이래서, 저는 당신들이 싫습니다. 왜 멋대로 행복해집니까? 계속 불행에 빠져 있으라고! 계속 아파해! 계속 찌질하게 울고 불며, 자신의 불행을 한탄해! 그래, 시발! 불행하라고!”

이래서는, 이라고 실비아는 말했다. 이래서는.

“이래서는 제가… 감정에 치우쳐 인생을 낭비한 머저리 같지 않습니까…!”

실비아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렇지 않아요. 그렇지 않다구요. 나의 상처는 더 깊고, 더 특별하고, 누구에게도 이해 받을 수 없고, 그래서 용서할 수도 없고, 그래서, 그래서---"

마치 단수당한 수도꼭지처럼, 실비아의 목소리가 졸아 저물었다,

정적이 흘렀다.

충분할 정도로 정적이 흐르고 나서, 실비아가 어깨를 떨면서 숨을 죽였을 적에 라비엘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

라비엘은 의자 위로 돌아가, 자리에 앉았다.

양 팔꿈치로 탁자를 짚고, 포갠 손등 위에 고운 턱을 올렸다.

“그럼 이제 대처법을 생각하도록 하지.”

그녀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