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이 불탄다.

사방에 열기가 가득하다.

검은 재가 대기를 따라 흐르고, 토양 곳곳에서 불길이 솟구친다.

얼음불꽃 숲, 히스란의 한 던전마그라스의 정경이었다.

4대금역 중에서도 히스란은 특유의 극단적인 환경으로 악명이 높다.

히스란의 중추인 궁극의 던전, ‘녹아내린 세계수’로부터 끝없이 이계의 기운이 흘러나와 주위의 균형을 폭주시킨다.

때문에 히스란의 던전들은 대부 분 극도로 타오르거나, 극도로 얼어붙는 환경을 지니고 있었다.

이 지역이 얼음불꽃 숲이라는 이명을 지닌 이유이기도 했다.

불타는 숲으로 이루어진 마그라스 던전, 그 열기 속에 수십 마리의 마물이 서 있었다.

「종족 : 화염 거인. lv. 65j 화염의 숨결을 뿜는 달구어진이 청동 거인들은 그 강력함에도 불구하고 얼음불꽃 숲에선 하위몬스터에 불과했다.

이 정도 마물이 하위에 불과하니 히스란이 4대금역 중 하나로 지정된 것이다.

눈앞 가득 서 있는 화염 거인을 바라보며 류한빈은 주머니에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샌드위치를 꺼내 씹었다.

“한바탕 했더니 배고프네.”

마물들을 눈앞에 두고도 참 한가한 태도였다.

그럴 이유가 있었다.

이 화염 거인들은 그저 서 있을 뿐이 었다.

이미 전원, 복부에 시꺼먼 바위조각이나 통나무가 박혀 신음하고 있는 것이다.

얼마나 작신작신 두들겨 맞았는지 손발 하나 까딱 못하고 그저 대지에 못 박혀 죽기 일보 진적까지 간 상태.

당연하겠지만 전부 류한빈의 작품이었다.

전투는 진작 끝났고 먹기 좋으라고 포장(?)까지 마친 판국이니, 당연히 늦은 점심을 해결해야겠지.

한 손에 흑색 대검을 쥔 채, 한 빈은 계속 샌드위치를 입안에 넣고 오물오물 씹었다.

질 좋은 흰 빵을 반으로 잘라 삶은 감자와 절인 양배추를 갈아바르고 두꺼운 돼지고기를 끼워 넣은 이 샌드위치는 실로 훌륭한 맛이 었다.

온갖 향신료와 조미료에 중독된 21세기 한국인이 먹기에도 결코 부족함이 없었다.

그럼에도 류한빈은 탐탁잖은 표정 이 었다.

“아, 라면 먹고 싶다……

아니, 라면뿐만이 아니다.

밥이 먹고 싶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갓 지은 새하얀 쌀밥에 김치를 죽 찢어 얹어 입안 가득 씹고 싶다.

“젠장, 생각하니 침 고이잖아.”

참 뻔한 이야기다.

외국 나간 한국인들이 정말 판에 박은 듯이 떠드는 쌀밥에 김치 타령.

TV로 볼 땐 참 창의성 없다고, 만날 똑같은 소리만 한다고 비웃기도 했었지.

하지만 당해 보니 알겠다.

진짜 그리움에는 창의성이 개입될 여지가 없다.

이 세계에 온 지도 벌써 몇 개 월이 지났다.

바위산에서 지낸 기간을 포함하면 한국을 떠난 지 벌써 몇십 년 째다.

집이 그립다.

한국이 그립다.

익숙한 세상, 익숙한 사람들이 그립다.

“뭐, 영화 같은 데서 본 것처럼 몸서리치게 그리운 것은 아니지만.”

이미 이 세계에도 많이 적응했다.

아티스와 에피르처럼 좋은 동료들도 만났다.

여기서도 계속 살아가라고 하면 그럭저럭 살 수는 있지 않을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역시 무리였다.

펠라드 빈이라는 가명을 쓸 때마다, 발타라 전사인 척 포효를 터트릴 때마다 자신이 가짜라는 자각을 하게 된다.

심지어 그 가짜 신분조차도 계속 유지할 수 없다.

이계인은 늙지 않는다.

한 장소에 뿌리내리고 살 수가 없다.

어쩔 수 없이 몇 년 주기로 부평초처럼 세상을 떠돌아야 한다.

물론 세상엔 10여 년 정도론외모가 변하지 않는 동안의 소유자도 분명 있으리라.

문제는 이계인이 늙지 않는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졌다는 점이다.

정말 동안일 뿐인 라트나인조차도, 외모에 너무 변화가 없으면 끌려가 고초를 겪는 세상인 것이다.

‘당사자는 정말 억울하겠지만, 그 억울함을 보상해 줄 정도로 라트나가 인권이 발달한 세상도 아니고.’

그 정도로 인권이 발달했다면 애초에 헌터 등록제처럼 과거의 죄를 대충 묻어 버리는 미친 시스템도 존재하지 않았겠지.

계속 샌드위치를 씹어 삼키며 한빈은 중얼거렸다.

“역시 돌아가고 싶어.”

물론 예전 그대로, 24세 때의 류한빈으로 돌아간다면 그건 좀 생각해 볼 문제다.

이런 엄청난 육체와 능력을 얻었는데 그게 전부 사라진다?

‘그럴 바엔 그냥 이 세계에 남아 있는 게 낫지.’

다행히 키비에의 말에 의하면, 한빈이 얻은 육체며 능력은 그대로 유지된다는 모양이었다.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옮기는 행위일 뿐이니까.

‘오히려 24살 때의 나로 돌려보내 달라고 하면, 그건 불가능하다고 했지?’

즉, 여섯 여신 중 하나를 해치우면 능력을 유지한 채 돌려보내 주겠다는 가이드라인의 보상은 사실 생색에 불과했다는 소리다.

“그런데 한국 돌아가면 이 능력으로 뭐 하지? 종합 격투기 선수라도 해야 하나?”

일단 슈퍼 히어로 영화처럼 코스튬 입고 돌아다닐 생각은 절대 없었다.

문득 류한빈은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 돌아갈 수 있을지 없을지 아직 모르는데 김칫국부터 마시고 있구만, 나.”

여신을 직접 만나 확답을 들어버린 탓일까?

한번 상념이 전개되니 끝나지 않는다.

그는 힐끔 불타는 숲 저편을 바라보았다.

흔들리는 아지랑이 사이, 거대한 붉은 드래곤과 은빛 갈기의 와이번이 한 보따리 쌓아 놓은 마물들 무더기 앞에 서서 흑발미녀의 잔소리를 듣고 있었다.

“자! 둘 다 빨리 먹어 치워! 레벨 올려야지!”

“아우, 키비에 언니, 나 배 터질 것 같……

“정기를 흡수하는데 배가 왜 터져? 터져도 코어가 터지겠지!”

“아니, 그게 더 문제가 아닌가, 키비에?”

“괜찮아, 아티스. 나 용족 튼튼하게 만들었어. 안 터져, 안 터져.”

그 광경을 지켜보며 한빈은 실소했다.

추후에 저들과 헤어지는 건 꽤나 섭섭할 것 같았다.

“그래, 지금은 눈앞의 현실에 충실해야지.”

남은 샌드위치를 전부 입안에 털어 넣고 그는 일행을 향해 소리 쳤다.

“후딱 처리하고 이리로 와! 이것도 마저 먹어야지!”

새파랗게 질린 드래곤과 와이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물론 류한빈은 무시했다.

그리고 재차 흑색 대검을 들었다.

아직 이곳, 마그라스 던전에는 영양가(?) 넘치는 마물들이 많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럼 또 몰아온다!”

아티스의 절규가 불타는 숲 너머로 울려 퍼졌다.

“아, 제발 좀 천천히 하자고!”

*

파벨란은 올해 30살이 된 강력한 전사였다.

젊은 나이에도 불과하고 벌써 레벨 61, 오러를 터득해 초인적인 힘을 얻은 자이기도 했다.

북부 변경인 델타스 왕국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뛰어난 검의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대부분의 꿈꾸는 이들이 그렇듯, 그 재능을 바탕으로 헌터 길드에 투신했고 이내 두각을 드러냈다.

스물이 되기 전에 레벨 40을 넘기고 스물다섯에 레벨 50을 넘겨 특급 헌터가 되었다.

이는 델타스 왕국 내에서도 손꼽히는 놀라운 무위였다.

왕가에서 직접 그를 초빙해 귀히 쓰려 할 정도로.

그러나 파벨란은 그 제의를 거절했다.

그는 보다 찬란한 미래를 꿈꿨다.

더욱 강해지기 위해, 더욱 높은 곳으로 향하기 위해 대륙 중앙에 진출했다.

그리고 계속 던전을 공략하며 실력을 키웠다.

마침내 레벨 60을 넘겼고, 꿈에도 그리던 4대금역에 진입할 자격을 얻었다.

원대한 목표를 세우고 4대금역도시 중 하나, 세르히스란에 도착했다.

과연 세상은 넓었다.

얼음불꽃 숲쯤 되니 천재라 불리던 파벨란도 평범한 헌터 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보다 강력한 헌터들이 사방에 즐비했다.

그래도 파벨란은 실망하지 않았다.

자신은 아직 젊으니까.

강해지기에 충분할 만큼 많은 시간이 남아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그는 꿈꾸던 도시의 뒷골목에서 죽어 가고 있었다.

“자, 다리를 잘랐으니 이번엔 팔이 지?”

백금발의 여인이 생글생글 웃으며 수인을 맺었다.

영술의 빛이 작렬하며 파벨란의 왼팔을 잘랐다.

“크윽!”

비명과 함께 그의 왼팔이 허공으로 날렸다.

그리고, 이미 잘려 나간 두 다리 옆에 살포시 안착했다.

고통 속에서 파벨란은 절규했다.

“왜! 대체 왜 우리를!”

평소처럼 팀원들과 던전 공략을 마치고 기분 좋게 펍에서 한 잔 걸친 후였다.

얼큰하게 취해 숙소로 돌아가던 도중 갑자기 난생처음 보는 3인의 남녀에게 습격을 당했다.

압도적으로 강한 자들이었다.

레벨 61의 전사인 파벨란은 물론이고 레벨 62 마법사인 케이 트, 레벨 61 영술사 발라스, 심지어 팀 리더인 레벨 65 마검사모리아조차도 이들의 한 방을 버티지 못했다.

그래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저런 고위 레벨이 왜 자신들을 공격한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이유가 없는데?

이유는 간단했다.

“죽이고 싶으니까.”

“으아아악!”

이내 파벨란의 단말마가 밤의 어둠을 찢었다.

그를 가지고 놀던 그레이스가 결국 머리를 날려 버린 것이다.

몸을 부르르 떨며 그녀는 안면 가득 홍조를 띠었다.

“아, 좋다……. 이게 얼마 만의 살인이야?”

악타룬에서 해방되어 세르히스란까지 오는 동안, 이들은 감히 다른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다.

가르한이 뇌리에 새겨 놓은 ‘목소리’ 탓이었다.

이 도시에 도착해서야 겨우 그 구속에서 해방된 것이다.

바로 옆에서 다른 비명이 터졌다.

“아악! 사, 살려……!”

파벨란의 동료이자 팀 리더인 마검사 모리아의 마지막 외침이었다.

마법으로 그녀를 박살 낸 갈색 머리의 마법사, 맥스웰이 충혈된 눈을 드러내며 히죽거렸다.

“역시 고레벨 라트나인의 경험치 보상은 기분이 끝내준단 말이지.”

칼날에 묻은 피를 닦으며 루슬란이 혀를 찼다.

“다들 너무 취한 거 아냐?”

그레이스가 눈을 흘겼다.

“그러는 루슬란, 당신도 충분히 취했잖아?”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남 말 할 처지는 아니었다.

그 역시 발라스란 이름의 영술사를 난도질하며 한껏 흥분한 상태였으니까.

“그럼 이제 하나 남았는데 루슬란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쓰러진 여성 마법사, 케이트를 바라보았다.

“이건 다 함께 죽여야겠지?”

맥스웰과 그레이스가 고개를 저었다.

“굳이 그럴 필요 있나?”

“파티 플레이 모드로 바꾸고 그냥 당신이 죽여. 그럼 경험치는 동등하게 들어오잖아?”

“하긴 그렇군. 악타룬에선 파티 플레이를 할 일이 없어 까먹고 있었다.”

검을 뽑아 들고 루슬란은 케이 트에게 다가갔다.

그의 눈동자에 문득 욕망이 스쳐 지나갔다.

“그냥 죽이긴 좀 아깝군. 예쁜 얼굴인데.”

순간 살 수 있을까 싶어 케이트는 희망을 가졌다.

이래 봬도 헌터들 사이에선 미녀 소리 꽤나 듣곤 했다.

하지만 그 희망은 바로 사라졌다.

“그래도 이 정도 고위 레벨은 범하는 것보다 죽이는 게 낫지.”

주저 없이 루슬란은 케이트의 심장에 칼날을 틀어박았다.

“어, 어어억……

바들바들 떠는 그녀의 눈동자에서 점차 빛이 사라져 갔다.

동시에 루슬란과 맥스웰, 그레이스의 눈앞에 동일한 메시지가 떴다.

rlv. 62 마법사 퇴치. 경험치 3,857,250을 획득했습니다.」

「파티 플레이 모드. 파티원에게 경험치가 분배됩니다.」

「경험치 1,285,750을 획득했습니다.」

「원주민 살해에 따른 추가 보상이 주어집니다.」

가이드라인의 ‘보상’이 혈관을 타고 흐른다.

신경중추를 자극하며 뇌까지 도달해 지고의 쾌락을 안겨 준다.

“하악! 으음!”

"흐흐흐..."

“헤헤헤……?”

황홀경 속에서 지구인들은 한없이 행복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