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틀을 꼬박 이동해서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수없이 많은 절벽과 산을 넘는 힘든 여정이었지만, 폴킨 관문이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까지 오자 모두 기운이 넘치는 듯 팔짝팔짝 뛰었다.

승리의 가능성이 보인다.

이제 여기만 점령하면 이번 전쟁은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고, 그들은 조국을 위해 큰 공을 세우게 된다. 후계자가 못 되어 설움 받던 시절도, 서자로 무시당하던 세월도 이제 끝이었다. 그들은 하나하나가 당당히 고위급 사족이 되고, 철옹성 폴킨 요새를 점령했다는 이유로 시카족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웅들로 기

억될 테니까.

“자. 그럼 침묵 상태로 밤까지 기다린다. 습격 시간은 정확히 자정. 다들 작전에 차질을 빚지 않도록, 그때까지 푹 쉰다.”

수하를 쉬게 한 나는, 해가 떨어지자마자 바로 가면을 벗고 몰래 절벽 길을 내려가 폴킨 관문 내로 침투했다. 부대 작전 전에 해결해야 할 작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맬서스 백작이었다.

맬서스 백작은 중급의 마스터 검사이자, 폴킨 관문의 총사령관이다. 이자만 없다면 작전 성공 확률이 대폭 늘어난다.

게다가 혹시 모를 관문 내 환경 변수도 파악해 놓아야 했다. 예상치 못한 적의 전력이 있을 수 있는 일이고, 병력 이동에 특이사항이 있을 수 있으니까. 뭐, 카심 부대까지 왔으면 상관없었겠지만, 그렇지 못한 이상 작전에 더욱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

와글와글.

폴킨 관문의 유흥가는 번화했다. 술집마다 주민들과 병사들이 그득그득 차 있었고, 거리에는 술 취한 행인들로 소란스러웠다.

나는 인근 술집에 들러 술을 샀다. 이후 나는 얼큰하게 취한 척 술병을 양손에 쥐고 흐느적거리며 거리를 돌아다녔다. 위장이었다.

나는 일단 병영 앞을 지나쳐갔다. 경계는 삼엄했지만, 예상대로 경비병력을 제외한 대다수 병력이 안에 머물고 있었다. 빠르게 진입만 한다면 대다수 적병을 잠자리에서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봐. 너 누구지?”

뒤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폴킨 관문의 경비병들이었다. 나는 슬쩍 돌아봤다.

“나? 용병.”

“이 근처에서 못 보던 놈인데? 한번 신분패를 내밀어 봐라.”

아무래도 검문인 모양이었다. 역시 폴킨 관문은 경계가 삼엄했다. 나는 품 안에서 용병패를 꺼내 내밀었다.

“여기.”

“그런데 폴킨 관문에는 무슨 일로 왔지?”

“브라암으로 가려고 잠시 들렸지.”

한 경비병이 나를 힐끗 쳐다봤다.

“왜?”

“전쟁이잖아? 이 기회에 돈 좀 벌어보려고.”

경비병이 용병패를 휙 던져 돌려주었다.

“조심해라. 얼마 전에 용병군이 작살났다고 한다. 소문에 의하면 수천은 죽어나갔다고 하더라.”

나는 술병을 슬쩍 내보였다.

“훗. 용병들 팔자가 다 그렇지, 뭐. 하루만 살다 가자, 이게 바로 우리네 용병들의 인생관이자 좌우명이야.”

“하긴.”

경비병이 경계를 풀고 떠나가자, 나는 다음 코스로 향했다. 이번에 관문 성벽 인근이었다. 높아서 잘은 모르겠지만, 이동하는 횃불의 수를 볼 때, 100여 명쯤은 되어 보였다.

그런데 특이사항이 있었다. 성문 앞에 수많은 막사가 처져 있는 것이다. 수레도 쭉 늘어서 있고, 수백의 병사 이외에도 상당수의 짐꾼까지 있는 것으로 보아 수송 부대 같았다.

‘젠장. 오백인대 추가네.’

적 병력이 3,500명으로 늘었다. 보급 부대이기에 정예도는 높지 않겠지만, 그런대로 돌발 변수는 될 듯 보였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것이 끝이었다. 경비 수준도 평상시와 비슷하고, 병력 배치도 평상시와 같다. 아무래도 전선에서 먼 지역이라 특별히 경비 수준을 높인 것 같지는 않았다.

대충 정찰을 마친 나는 본 임무에 들어갔다. 맬서스 백작을 잡는 일 말이다.

‘백작을 잡는 일쯤이야 쉽지.’

맬서스 백작의 장점이자 단점은 바로 강박증에 가까울 정도로 아주 규칙적인 생활을 한다는 점이다. 해가 지고 나서 한참 지났으니, 분명 지금쯤 잠들어 있을 거다.

* * *

나는 어느 한적한 고급 주택가 담벼락 위를 폴짝폴짝 넘나들고 있었다. 지금 내 체내의 마나는 철저히 감춰져 있었고, 바닥을 딛는 발끝은 아주 조심스러웠다.

이곳은 폴킨 관문에서 근무하는 기사들의 거처가 밀집한 거리였다. 그리고 기사들은 일정 경지에 이른 마나 검사든 일반 기사든 모두 마나를 수련한다. 무척 예민한 감각을 지니고 있기에, 자칫 실수라도 하는 날이면 내 존재가 드러날 수 있었다.

‘저기군.’

주택가 한가운데 큰 저택이 하나 보였다. 문 앞에는 경비를 서는 기사 하나와 병력 다섯이 보였는데, 저택 주변 길로 둘씩 짝지어 이동하는 경비병 무리 넷이 보였다.

나는 바로 옆 고급 주택가 담장 안쪽에 몸을 숨기고는 타이밍을 쟀다.

그리고 곧 틈이 나자 나는 잽싸게 대로를 이동해 저택 담을 폴짝 뛰어넘었다. 일단 외부 경비에게는 들키지 않았다.

사뿐히 화단에 내려앉은 나는 주변을 살폈다.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고, 저택 불은 모두 꺼진 상태였다. 나는 저택 뒤로 가서 닫힌 창문에 얇은 막대를 넣어 고리를 풀고는 안으로 침입했다.

역시 내부도 고요했다. 백작을 시중드는 시종들의 기운이 몇몇 풍겨오지만, 방 안에 콕 처박혀 전혀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맬서스 백작은 누군가 밤에 돌아다니는 것을 무척 싫어한다. 그래서 시종들은 밤에 화장실이 급해도 자기 방 안에서 해결할 뿐, 밖을 나서지 않는다. 나왔다가 백작이 깨면 경을 치니까.

이에 나는 아주 편하게 저택 2층으로 올라갔다.

‘저기군.’

2층 가운데 방 문틈에서 진한 마나의 기운이 흘러나왔다. 이 정도면 분명 맬서스 백작이다. 나는 품 안에서 약초 뭉치 하나를 꺼내 불을 붙인 후, 1층에서 가져온 접시에 담았다.

바로 ‘로란의 독무’였다.

이후 나는 숨을 참은 상태에서 아주 조심스럽게 백작의 방문을 열고 독한 연기를 뿜어내는 접시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죽을까? 이용해 먹을 곳이 있어서 생포했으면 좋겠는데, 쩝. 죽으면 말고.’

로란의 독무는 연기를 맡은 사람의 몸을 마비시키고, 심하면 죽음에 이르게 한다. 지금 밤톨만 한 것 하나를 밀실 상태에서 통째로 태우고 있으니, 일반인이라면 무조건 죽겠지만, 마스터 검사인 백작이라면 살아남을 수도 있어 보였다.

한참 후, 나는 방 안으로 들어가 창문을 조금 열고 조심스럽게 연기를 밖으로 배출했다. 그리고 모든 연기가 빠져나가자, 침대에 누워 있는 맬서스 백작에게 다가갔다.

금발의 그는 시체처럼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싸대기를 몇 대 때렸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다. 단단히 마비 상태에 들어간 듯 보였다.

나는 백작의 호흡과 심장박동을 살피고는 비릿하게 미소 지었다. 미약하지만 살아있다. 나는 가져온 밧줄로 그의 온몸을 꽁꽁 묶고는 지하창고에 있는 오크통 안에 가둬버렸다.

* * *

나는 다시 부대가 있는 절벽으로 올라가 간단한 작전변경을 알렸다. 성문 앞에 있는 보급부대 병력을 대비한 인원 재배치였다. 이에 나는 서쪽 성벽에는 200명, 병영에 보낼 병력은 1,500명, 기사들 거주지역 1,300명, 동쪽 관문 성문에는 700명으로 다시금 나누고, 남은 300명을 내 밑의 예비병력으로 배치했다.

그리고 자정이 되자 일제히 부하들을 이끌고 내려와 폴킨 관문 점령 작전을 시작했다.

이윽고 도심 외곽으로 진입하자마자 각자의 임무지역으로 흩어지는 부하들.

나는 예비 병력을 이끌고 고급 주택가 지역 쪽으로 향했다. 가장 위험도가 높았고, 중간지역에 있어 어디든 빠르게 지원을 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체 저자들은 누구야?”

“보아하니 시카족 사람들 같은데, 혹시 시카족 연합군인가?”

우리가 유흥가 거리를 지나는 것을 본 관문 주민들은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했다. 아직 적의 이동임을 인식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곧 내가 거리를 배회하는 경비병들을 가차 없이 베어버리는 모습을 보고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하지만 그 비명은 공허한 메아리였을 뿐이었다. 우리는 비명보다 빠르게 각자의 작전 지역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딸랑, 딸랑.

멀리 병영 쪽에서 비상종이 한두 번 울리다가 말았다. 바얀이 순조롭게 병영 쪽을 제압하는 듯 보였다. 그다음으로 서쪽 성벽에서 횃불이 마구 흔들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쪽에서도 지금 전투가 벌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곧 고급 주택가에 도착한 나는 순찰 병력들을 가차 없이 베며 안쪽으로 계속 진입해 들어갔다.

이윽고 주택 안에 강제로 진입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창문을 깨고 문을 부수며 들어간 부하들은 곧 거의 팬티 차림의 기사들과 그 가족들을 칼로 위협하며 밖으로 끌고 나왔다.

나는 이내 코너를 돌아 백작의 관저로 향했다. 제거할 무장 병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저택을 지키던 기사가 어둠 속을 뚫고 우르르 몰려오는 우리의 모습에 잠시 넋이 나간 표정을 짓다가, 내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손을 뻗으며 소리쳤다.

“정지! 너희는 어떤 부대냐?”

결국, 그 기사는 검도 못 뽑아보고 내게 제압당했다. 주변에 무장한 병사들도 있었지만, 압도적인 병력 차이로 위협하는 우리를 보고 순순히 창을 내려놓고 양손을 높이 들었다.

사방에서 겁에 질려 살려달라 울부짖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브로스의 기사들은 옷조차 제대로 챙겨 입지 못한 상태에서 자신과 가족들의 목숨이 위협받자, 그대로 저항을 포기하고 순순히 포박당했다.

‘이거 너무 쉽게 제압되는데? 겉만 번지르르하고, 속은 완전히 맹탕이야.’

이런 평온한 전투는 나도 생전 처음 경험해 본다. 너무 순조롭고 조용해서 왠지 알 수 없는 불안감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물론 간혹 고성과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오지만, 이내 잦아들며 곧 사늘한 고요함을 더해왔다.

나는 바로 예비부대를 돌려 동쪽 관문 성벽 쪽으로 향했다.

보아하니 여기는 끝이었다.

잡혀 나온 기사 중에 지금 상황이 꿈인지 생시인지 자신의 뺨을 때리는 자도 나올 정도이니 오죽할까. 적 기사들은 모두 잠이 덜 깬 눈에 멍한 얼굴로 끌려나올 뿐, 저항의 의지는 전혀 없었다.

“적이다! 적이 쳐들어왔다!”

관문 쪽에서 온 듯한 몇몇 연락병들이 고함을 쳐대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내 외모만을 보고 아군 기사인 줄 급히 보고를 올리려다가, 뒤따라온 우리 병사들에게 포위되어 무장을 해제당했다.

나는 몇몇 병사에게 그들을 끌고 가라 명령하고, 서둘러 관문 쪽으로 향했다. 연락병이 왔을 정도면 관문 쪽이 제대로 풀려나가지 않는다는 뜻이 될 수도 있었다.

“막아라!”

“성벽을 점령하라!”

역시 관문 앞은 치열한 교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성문 앞 보급병력은 무사히 제압했지만, 관문 성벽 공략에는 난항을 빚고 있었다.

관문 성벽 위로 올라가는 길은 좌측 일자형 경사로 하나뿐, 위에서 장애물 설치해 틀어막아 버리자 진입 병력이 옴짝달싹 못하고 피해만 가중시키고 있었다.

나는 초조한 얼굴로 관문 성벽 위를 바라보는 나지르에게 향했다.

“나지르 어떻게 된 일이야?”

“저기, 그게. 성벽 위 일부 병사들이 저희가 침투하는 모습을 본 모양입니다. 도착했을 무렵에는 이미 경사로 쪽에 간이 장벽을 쌓아놓고,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관문 성벽은 아주 높다. 그만큼 멀리 내다볼 수 있었기에, 관문이 공격받는 것을 눈치챌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게다가 주택가와 이곳 관문 사이에는 넓은 공터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 때문에 진입 타이밍도 일부 늦었을 것이었다.

나는 조바심을 내는 나지르의 등을 도닥거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적이 먼저 눈치챘으면 뾰족한 수가 없지.”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내가 해결한다.”

나는 요조를 꽉 움켜쥐고 경사로 쪽으로 갔다. 적의 화살은 곧 떨어질 테니 가만 놔둬도 정리가 되겠지만, 그렇다고 굳이 희생을 감수할 필요는 없었다.

나는 맨 앞에 서서는 진입 병력과 함께 성벽 위를 향해 돌진했다.

덕분에 화살이 나를 향해 빗발쳤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프레이커 가죽 갑옷에 모조리 튕겨져 나갔으니까.

나는 거의 성벽 위까지 다다르자 힘껏 몸을 날려 지휘하고 있던 기사를 단칼에 베어버렸다. 그리고 요조를 크게 휘둘러 간이 장벽과 함께 근처에 있는 방어 병력을 모조리 쓸어버렸다.

“마스터께서 길을 열었다! 돌진해!”

길이 열리자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풀려나갔다. 활을 들고 저항하던 로브로스 병사들은 밀고 들어오는 수백의 병력에 기가 질려 스스로 무기를 버렸고, 일부 칼과 창을 들고 저항하던 적 병사들도 우리의 포위공격에 빠르게 제압되어 나갔다.

그리고 얼마 후 관문 성벽 위 전투는 칼을 내린 한 로브로스 병사의 항복 선언으로 모두 끝이 났다.

‘된 건가?’

곧 폴킨 관문 전역에서 카라의 깃발이 올랐다. 거의 무혈입성과도 같은 이번 승리에 아군은 환호성을 내질렀고, 적군과 시민들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우리에게 끌려가거나 혹은 창문 너머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작전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비록 전투는 끝났지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남아 있었다. 나는 부하들의 흥분 상태를 날카로운 언성으로 진정시키고, 전후 처리를 시작했다.

“바얀. 포로들을 한 곳에 모아 감시하고, 성벽 방어를 강화해.”

“예.”

“그리고 나지르는 순찰조를 편성해서 관문 내 치안을 확립하고, 도심 내 자원과 군수 물자 품목 파악해 놔.”

“예.”

나지르와 바얀에게 임무를 맡긴 나는 맬서스 백작을 꺼내와 인근 창고에 정중히 가둔 후, 마법 통신소에 들려 대사막의 모든 토후에게 오늘 벌어진 전투 결과를 세세히 알렸다.

한 마디로 얘기하자면 이번 전쟁 이제 끝났으니 알아서 기라는 뜻이자, 대사막 세력과 로브로스 군을 이완시켜 놓으려는 작업의 일환이었다.

현재 바스타인 공작이 이끄는 로브로스 군은 본국으로부터 오는 보급 루트가 모두 막혔지만, 대사막 세력을 대상으로 한 현지 보급선은 남아 있었다.

물론 그들 세력도 먹고살아야 하니 새 발의 피 정도만 지원할 수 있겠지만, 이것조차 철저히 끊어놔야 로브로스 군의 움직임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 똥침 작전(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