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ive

Triplicate.

윤재는 숲을 헤매지 않고 한 방향을 향해 쭉 나아갔다.

간혹 수풀 따위가 가로막으면 검으로 베었다. 가야 할 길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자, 잠깐만요!”

그런 윤재의 뒤로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윤재는 잠시 멈칫하더니 몸을 뒤로 돌렸다. 그러자 익숙한 얼굴이 그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그 여자군.’

어디로 가냐고 물었던 여인.

그녀는 제법, 아니 상당한 미인이었다.

나이는 스물 중반 정도 되어 보였는데, 어디서나 대접을 받을 만하게 생겼다.

콧대가 높고, 턱선이 갸름했다. 주먹만 한 얼굴과 여리해 보이는 어깨는 보호본능을 자극시켰다.

그녀는 윤재를 힘겹게 쫓아왔는지 잠시 숨을 헐떡거렸다.

얼마나 뛰었다고. 윤재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물었다.

“무슨 일이지?”

“저, 저는 정유라라고 해요.”

“그런데?”

네 이름 따위는 궁금하지 않다는 반문이었다.

그런 윤재의 반응에 정유라는 잠시 멈칫하더니 물었다.

“혹시…… 뒤따라가도 될까요?”

“아니.”

윤재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정유라는 눈을 크게 뜨더니 소리쳤다.

“왜, 왜요! 혼자보다는 둘이 훨씬 낫지 않겠어요?”

“혼자가 편해.”

“분명 도움이 될 거예요.”

“짐이 되겠지. 너, 좀비를 직접 죽이긴 했나?”

윤재는 아무런 이물질도 묻어 있지 않은, 정유라의 말끔한 검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정유라는 당황해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말을 더듬었다.

“그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좀비를 죽이는 것을 지켜만 보았겠지. 누군가의 뒤에 숨어서. 아닌가?”

윤재의 물음에 정유라는 어떤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기어이 입을 다물었다.

그러면서 무엇이 그리 억울한지 그녀는 울상을 지었다.

윤재는 그런 정유라를 보다 몸을 획 돌렸다.

“끝까지 지금처럼 누군가의 뒤에 붙어서 살아남을 생각이라면 그래, 마음대로 해라. 하지만 적어도 이번엔 번지수를 잘못 찾았어.”

그 말을 끝으로 윤재는 다시금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까운 시간만 낭비했군.’

뒤에서 ‘뭐야, 똥차였잖아?’라는 짜증스러운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윤재는 속으로 실소를 머금었다.

그는 이곳 이면세계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이 괴물 따위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진짜 위험한 건 같은 사람이지.’

좀비 정도, 아니 그보다 더 강한 괴물이라 할지라도 겁을 먹지만 않는다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다.

당장 지금의 윤재는 처음 이면세계에 떨어졌을 때와 비교하면 훨씬 강해진 상태였으니.

진짜 위험한 적은 괴물이 아닌, 바로 같은 사람이었다.

이면세계는 무법지대다.

지금 당장이야 어떨지 몰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이면세계에 차차 적응해 나갈 것이다.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백 명.

그것은 즉 누군가가 살면 누군가는 죽게 된다는 뜻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언제까지 현실의 윤리와 도덕이 남아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윤재는 그것이 무너지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정유라처럼 누군가에게 붙어 어부지리를 얻으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미인계? 그래, 그것도 능력이라면 그럴 수 있었다.

그 정도만 된다면 윤재도 크게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당장 응급처치는 해 놓았지만, 일은 벌어지겠지.’

백 명만이 생존할 수 있다는 조건이 붙은 이상, 분명 살인을 결심하는 사람은 나타날 것이다.

윤재는 단지 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자리가 아수라장이 되는 것을 막아 놓았을 뿐이었다.

‘뭐, 이만하면 내가 할 일은 다 한 셈이고…….’

윤재는 더 이상 다른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기로 마음먹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근처일 텐데…….”

윤재는 숲 속 깊숙이 들어와 눈앞에 나타난 가파른 절벽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절벽이 나타나면 등을 돌려 왔던 길로 돌아가겠지만, 윤재는 그러지 않았다.

[튜로리얼이 시작되고 3일째 마지막 날, 누군가 던전을 발견했다. 절벽 아래를 따라 움직이던 사람들이었다. 사람 한 명이 겨우 들어갈 만한…….]

튜토리얼의 첫 번째 단계를 끝내고 윤재가 움직일 곳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튜토리얼의 배경인 숲은 가파른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절벽은 사람들이 튜토리얼 장소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지만, 단지 그것뿐만은 아니었다.

절벽은 어떤 비밀을 가지고 있었다.

일기에는 그 비밀에 대해 적혀 있었다.

윤재는 그것을 기억하고, 곧장 절벽을 향해 쉼 없이 달려온 것이다.

“찾았다.”

윤재는 절벽의 한쪽 구석에 뚫려 있는 작은 구멍을 발견했다.

사람 한 명이 겨우 들어갈 만한 구멍.

윤재는 망설임 없이 절벽에 나 있는 구멍으로 들어갔다. 몸을 최대한 숙여 천천히 움직여야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

윤재는 크게 심호흡했다.

사실 이 안으로 발을 들이기까지 윤재는 제법 많은 생각을 했다.

[마침 근처에 있던 나도 뒤늦게 던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던전 안에 있는 괴물은, 처음 만난 좀비들보다 훨씬 강했다. 첫날 던전에 들어왔다면 죽었을지도 모른다.]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위험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좀비 따위는 잊어버려야 할 만큼.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다.

일기에는 던전에 들어온 사람들이 누구보다 빠르게 강해졌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던전에 들어오는 건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빠르게 강해질 수 있다는 뜻은, 그만큼 은경과 민아를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진다는 뜻이었으니 말이다.

윤재는 검을 손에 쥔 채 던전 안으로 계속 걸어 들어갔다.

처음에는 겨우 사람 한 명이 들어갈 만큼 입구가 좁았지만, 조금 더 나아가자 손을 양팔 넓이로 벌려도 될 만큼 넓어졌다.

더군다나 천장에 달린 촘촘한 보석 따위가 내부를 밝혀 주어서 앞을 보는 데도 큰 무리가 없었다.

그렇게 윤재가 막 조심스레 한 걸음을 내디뎠을 때.

키아아아아-!

갑작스레 들려온 괴성에 윤재가 몸을 비틀었다.

사아악-

동시에 휘두른 검이 섬뜩한 소리와 함께 무언가를 베어 냈다.

툭-

윤재는 바닥에 떨어진 사체를 내려다보았다.

지네를 닮은 괴물.

괴물은 입을 크게 벌린 채 머리와 몸통이 분리되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길이는 2미터에 두께는 한 뼘 정도.

괴물의 사체를 내려다보는 윤재의 눈앞에 놈의 이름이 떠올랐다.

[식육충]

지네를 닮은 식육충은 머리가 베어졌음에도 바로 죽지 않고 기다란 몸을 꿈틀거렸다.

윤재는 그것을 더 이상 바라보지 않고 다시금 검을 휘둘렀다.

튜토리얼의 보상으로 더욱 날카로워진 윤재의 검은 식육충의 몸을 단숨에 토막 냈다.

[던전에서 처음 만난 괴물은 식육충이었다. 빠르고 위협적이긴 하지만 먹이를 발견하면 괴성을 지르는 습성이 있어서 그런지 반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껍질이 단단하지는 않지만 생명력이 질겼다.]

서걱, 서걱-

식육충을 몇 토막으로 나누자 곧 꿈틀거리던 몸이 움직임을 멈췄다.

[10업적 포인트를 획득하였습니다.]

[반사 능력이 1 상승합니다.]

업적 포인트 10.

고작 1포인트를 주었을 뿐인 좀비에 비해 그 수치가 상당했다.

윤재는 일기의 어떤 문장을 떠올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스탯이 잘 오르지 않더라도 업적 포인트를 악착같이 모을 걸 그랬다. 튜토리얼이 다 끝나고 업적 포인트에 따라서 보상이 달라졌다.]

업적 포인트는 중요하다.

당장 살아남기 위해서만이 아니더라도, 어떤 보상을 얻기 위한 수단이 되기도 하니까.

10업적 포인트.

이 정도면 한 마리 한 마리가 위험하더라도 충분히 위험을 감수할 만했다.

튜토리얼이 끝나고 난 뒤 다음으로 이어질 무언가를 생각해서라도 최대한 많은 업적 포인트를 모으는 게 중요했다.

무엇보다 단 한 마리를 잡았을 뿐인데도 스탯이 올랐다.

비교적 초반인 만큼 스탯이 빠르게 상승한다고 일기에 적혀 있긴 했지만 이만하면 기대 이상으로 빠른 속도였다.

무엇보다…….

‘이 끝에 있는 게 중요하지.’

윤재는 쭉 이어져 있는 던전의 깊숙한 곳을 바라보았다.

던전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무언가’.

윤재가 노리고 있는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무리를 이루지 않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이곳으로 향한 이유이기도 했다.

튜토리얼의 다른 누구보다 앞서가기 위해서.

은경과 민아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

‘조금만 기다려.’

다시금 아내와 딸을 떠올린 윤재는 입술을 깨물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

[10업적 포인트를 획득하였습니다.]

[10업적 포인트를…….]

[민첩이 1 상승합니다.]

두 마리의 식육충을 더 제거하고 얻은 포인트와 스탯.

“허억, 헉.”

윤재는 거칠게 숨을 내쉬며 작게 미소 지었다.

‘이걸로 민첩 스탯은 19.’

벌써 던전에 들어와 잡은 식육충만 해도 수십 마리에 달했다.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히 스탯이 빠르게 오르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몸으로 말이다.

스탯이 하나하나 오를 때마다 힘과 감각이 조금씩 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이 차곡차곡 쌓이자 이제는 자신의 몸이 아닌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처음에는 갑작스럽게 튀어나오던 식육충들이 제법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민첩과 반사 능력의 스탯이 몇 개 더 오르고, 몇 번씩 상대하며 경험을 쌓다 보니 적응이 되었다.

‘이번엔 조금 위험했어.’

두 마리의 식육충이 동시에 나온 건 처음이었다.

한 방향이 아닌 두 방향.

반사적으로 몸을 깊숙이 숙이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했다.

[업적 순위를 발표하겠습니다.]

[1위 : 김윤재]

[2위 : 김두형]

[3위 : 안철운]

[…….]

그때 윤재의 눈앞으로 기다란 메시지가 떠올랐다.

[이면세계의 시간은 한국과는 많이 다른 모양이었다. 난 밤 10시에 처음 이면세계로 넘어왔다. 그런데 한참 시간이 지나, 해가 지고 자정이 되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순위를 발표하겠다고.]

윤재는 자신이 던전에 들어오고 꽤 시간이 지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벌써 바깥은 완전히 해가 저물고 밤이 깊었다니.

[업적에 따른 보상이 지급됩니다.]

[업적 포인트를 확인합니다.]

[업적에 따라 3일간의 식량과 랜덤 스탯 5포인트가 지급됩니다.]

[체력이 2 상승합니다.]

[물리 저항이 1 상승합니다.]

[마력이 2 상승합니다.]

업적에 따른 보상.

윤재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죽어라 사냥하고 업적 포인트를 모은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매일 자정, 업적 포인트에 따라 지급되는 보상.

랜덤으로 오르는 것이지만 스탯 5포인트는 제법 큰 보상이었다.

무엇보다 마력 스탯이 오른 건 제법 운이 좋았다.

“빵인가?”

윤재는 자신의 옆에 놓여 있는 푸석푸석한 빵과 주머니에 담겨 있는 물을 확인했다.

양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3일간의 식량이라고 하더니 그래 봤자 최소한 굶어 죽지 않을 정도일 뿐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계속해서 움직이던 터라 슬슬 허기가 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앞으로도 움직이기 위해선 뭐라도 먹어 둬야 한다.

윤재는 잠시 자리에 앉아 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이고 빵을 먹기 시작했다.

‘그래도 이거라도 있어야지.’

윤재가 식량을 걱정하지 않았던 이유는 업적 포인트만 획득하면 식량이 자연히 따라올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업적 포인트를 얻지 못하면 굶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지금까지는 순조롭다.’

윤재는 업적 포인트 순위에서 가장 위쪽에 자신의 이름이 있는 것을 확인했다.

어째서 이것을 알려 주는지, 그거야 뻔했다.

위기감.

당장 높은 순위에 있는 사람들이야 안심할 수 있었다. 상위 백 명은 살아남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백 번째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는 사람들, 혹은 그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순위를 보고 오히려 조급함을 느낄 것이다.

이대로 가다간 자신들이 죽게 되리라는 것을 눈으로 확인했으니까.

“진짜 빌어먹을 시스템이군.”

어떻게 해서든 서로에게 칼을 겨누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기껏 한 번 아수라장이 되는 걸 막아 놓았지만, 결국엔 살인이 벌어질 게 분명하다.

지금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업적 포인트였다.

업적 포인트를 얻지 못하면 당장 사흘 뒤 목숨이 달아날 판이니 말이다.

‘살아남은 사람은 186명.’

원래 198명이 살아남아 있었다.

그런데 그 수가 12명이나 줄어들었다.

아마 대부분 사람은 한 번쯤 그런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86명만 더 죽으면.

혹은 높은 순위에 있는 다른 누군가가 죽으면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갑작스럽게 발표된 순위는 사람들에게 조급함을 심어 주고, 살인을 부추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