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ive

56.00.

5분의 휴식, 다시 전진.

그리고 다시 5분의 휴식.

시간과의 싸움인 만큼 엘빈은 강행군을 고집했다. 다른 이들 역시 그런 엘빈의 뒤를 묵묵히 따랐다.

아주 잠깐 눈을 붙일 정도의 시간도 없었다.

육체적인 능력이 극에 달한 해당자들은 하루 이틀 정도 잠을 자지 않더라도 몸에 큰 무리가 없었다.

“거의 다 왔습니다.”

윤재는 멀리 보이는 거대한 문을 가리켰다.

“저깁니다.”

고작 이틀.

일전, 윤재와 정규가 통과했던 시간과는 차원이 다른 속도였다. 휴식 없는 강행군의 결과였다.

엘빈은 홀로 문을 향해 앞장서서 다가갔다. 혹시라도 다른 어떤 함정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실험실 앞에 도착한 엘빈은 걱정과 함께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제발 그 영감탱이가 우릴 기다리고 있었으면 좋겠군.”

실험실에 도착했다고 해도 정작 아브람이 없으면 모두 헛수고였다.

이미 한 번 도망쳤던 만큼 아브람이 자신들을 피해 움직인다면 답이 없었다.

엘빈은 실험실의 문을 열기 전,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다들 정신 똑바로 차려라. 실수하는 놈 있으면 여기서 안 죽어도 내 손에 죽어.”

“예!”

“그럼…… 열지.”

엘빈은 그 말과 함께 문을 툭 밀었다.

그그그그극-

5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철문이 안쪽으로 열렸다. 넓은 공터와 함께 매캐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생각보다 훨씬 빠르군.”

익숙한 목소리가 먼저 귀에 들어왔다. 이어 공터 한가운데 서 있는 아브람의 모습이 모두의 눈에 들어왔다.

엘빈은 문 안쪽으로 발을 들였다.

“용케 도망 안 가고 여기 있었군.”

“도망? 내가?”

아브람은 작게 웃었다.

“너희들 따위에게 말이냐?”

“그전에 도망쳤던 건 누구였더라?”

“그때와 지금 상황이 같다고 생각하느냐?”

아브람은 그렇게 물으며 엘빈을 비롯한 마천루의 해당자들을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시선이 윤재에게서 멈췄다.

아니, 정확히는 그의 손목에 채워져 있는 팔찌에서.

아브람의 입가로 미소가 더욱 진하게 번졌다.

“딱 좋구나.”

그렇지 않아도 언젠가 다시 찾으러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마침 제 발로 찾아와 주었으니 아브람의 입장에서는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수고를 덜어 주었으니 말이다.

“물론 상황이 같진 않지. 그런데 넌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스릉-

엘빈은 처음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

쏴아아-

동시에 그의 몸에서 풍기던 마력의 파장이 돌변했다.

고고하던 기세는 보다 날카롭고 거칠게 바뀌었다.

근처 해당자들은 저도 모르게 그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조금이라도 더 다가갔다가는 온몸이 난도질당할 것 같은 착각이 들었기에.

“그때 계속 싸웠으면 어떻게 됐을 것 같아?”

“……확실히, 그때와는 느낌이 다르긴 하구나.”

검을 뽑아 든 엘빈의 기세는 이전과도 사뭇 달랐다.

누가 뭐래도 그는 이면세계에서도 알아주는 강자였다. 아무리 아브람이라 하더라도 지금의 상태로는 결코 얕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데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다.”

아브람은 그렇게 말하며 텅 빈 플라스크 병을 들어 보였다.

익숙한 형태의 병. 윤재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설마…….”

“역시 먹어 본 놈이 빨리 아는군.”

윤재의 반응에 엘빈을 비롯한 해당자들이 긴장했다.

마력 정제의 물약.

아브람이 그것을 만들어 예전의 마력을 되찾으려 한다는 것은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가능한 한 그 전에 찾아내 그를 제거하려 했던 것이다.

“아쉽지만 한발 늦었구나.”

“……아니.”

윤재는 아브람의 말을 부정했다.

“네가 준비해 뒀던 물약은 총 세 병 아니었나? 고작 한 병 가지고 전성기 시절의 마력을 되찾을 수 있었을 리 없지. 네 말대로 그건 먹어 본 내가 잘 알아.”

윤재의 말에 아브람의 눈매가 작게 좁혀졌다.

그 말대로였다.

한 병으로는 부족하다. 전성기 시절의 힘을 되찾기 위해서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했다.

“아무래도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은 것 같은데?”

윤재의 말에 엘빈의 목소리가 한층 여유로워졌다.

아직 최악의 상황은 아닌 셈이었다.

하지만…….

“아니, 상황은 바뀌었다.”

우우우우웅-

그 순간, 돌연 거대한 공동이 크게 울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바닥에서 새빨간 빛이 뿜어져 나왔다.

갑작스러운 현상에 일행은 당황했다.

‘이건…….’

윤재의 시선이 공동의 바닥으로 향했다.

거대한 원. 그리고 내부를 가득 채운 가느다란 선.

공동 전체가 거대한 마법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여긴 내 세상이란 말이다, 이 벌레들아!”

몸을 숙인 아브람이 손바닥을 땅에 맞대려는 순간.

“어딜-!”

엘빈이 그것을 저지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쩌엉-!

아브람의 목을 베어 내던 엘빈의 검은 무언가에 부딪혀 허공에 멈추고.

우우우우우우우웅-!

공동의 떨림은 극에 이르렀다.

“으…….”

“아아아아악-!”

엘빈을 따라온 마천루의 해당자들이 돌연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머리를 부여잡으며 자리에 쓰러졌다. 그들만큼은 아니었지만 엘빈 역시 검을 거두고 몸을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이건…….”

엘빈은 검을 들지 않은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았다.

어지럽다.

아니, 단순히 어지러운 것만이 아니었다.

무언가가 빨려 나가는 듯한 기분.

정신을 부여잡지 않으면 그대로 쓰러질 것만 같았다.

“무슨 짓을…….”

엘빈은 바닥에서 손을 떼는 아브람을 노려보았다.

그는 제법 놀란 표정으로 엘빈을 바라보았다.

“대단하군. 여기서도 정신을 멀쩡히 유지할 수 있나?”

“뭘…… 한 거냐?”

“자네들 때문에 일이 귀찮아졌지만…… 혹시 모르니 어쩔 수 없었네.”

웅, 우웅-

아브람은 떨림을 멈추지 않는 공동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 마법진은 말일세, 내 역작이지. 인간의 영혼을 빨아들이는, 살아 움직이는 괴물이라고 할까.”

“뭐……?”

영혼을 빨아들여?

엘빈은 자신의 머릿속은 물론이고 정신마저 흔들리는 원인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 이 거대한 공동 자체가 자신의 영혼을 잡아당기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해당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엘빈과는 달리 끔찍한 비명을 지르면서까지 영혼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발악하고 있었다.

그나마 엘빈은 멀쩡한 편이었다. 정신이 없긴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서 있고, 말하고 움직일 수 있으니.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게. 그렇지 않으면 자네 영혼은 순식간에 잡아먹히고 말 테니.”

친절한 조언임에도 엘빈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수 없었다.

‘조금만 방심해도…… 큰일 나겠군.’

아브람이 만든 마법진은 본래 멜른에서 죽어 간 사람들의 영혼을 끌어당기는 용도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아브람은 방금 전, 마법진의 용도를 조금 뒤틀어 놓았다.

크게 바꿀 것도 없었다.

영혼을 끌어당기는 범위.

그것만 변경해도 충분했다.

본디 멜른이라는 거대한 범위 전체를 감당하던 마법진이었다.

비록 육신에서 빠져나와 힘을 잃은 영혼을 끌어당기는 게 전부라고 해도 범위가 범위인 만큼 마법진의 흡입력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그 마법진의 힘이 이 작은 공동에 집중되고 있었다.

수십, 수백만의 영혼을 끌어당기던 힘이 말이다.

“꺽, 꺼으으…….”

몇몇 해당자들은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졌다.

“젠…… 장…….”

엘빈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자신조차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상황에서, 다른 이들이 멀쩡히 움직일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힘들어 보이는군.”

아브람의 이죽거림에 엘빈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는 영감도…… 만만치 않아 보이는데?”

그 물음에 아브람의 미간이 작게 꿈틀거렸다.

엘빈의 지적은 정확했다.

아무리 자신이 만들어 낸 공간이라지만, 아브람 역시 마법진의 영향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물론 준비해 두기는 했다.

마법진의 영향을 최대한 받지 않도록 여러 가지 마법을 몸에 둘러놓았으니까.

하지만 수백만 명에 달하는 인간의 영혼을 빼앗기 위한 마법진의 영향은, 겹겹이 몸에 두른 마법조차 뚫어 내고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왜, 이렇게 안 하면…… 질 것 같나?”

“……말이 많군.”

“큭. 그래, 잘 알겠어. 당신이 얼마나 겁쟁인지…… 대마법사? 웃기고 있네.”

엘빈은 비틀거리며 말을 이었다.

“쪽팔린 줄 알아, 영감탱이야.”

“이노옴…….”

아브람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 역시 내심 전성기의 힘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해 이런 수를 쓸 수밖에 없어 자존심이 상하던 차였다.

그런 점을 엘빈이 계속해서 긁어 대자 머리끝까지 화가 차오른 것이다.

“오냐. 다른 놈들보다 네놈부터 먼저 죽여 주마!”

화륵, 화르륵-

엘빈의 주위로 수많은 불의 구체가 떠올랐다.

주먹만 한 크기의 불의 구체들.

작지만 하나하나가 가진 위력은 사람 하나를 숯덩어리로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아, 젠장…….”

엘빈은 눈앞이 흐릿해져 고개를 흔들었다.

서둘러 반응하지 않으면 이대로 끝이다.

당장 주위에 생겨난 저것들이 폭발했다가는 죽는 건 둘째치고, 정신을 잃고 영혼이 떨어져 나갈지도 모른다.

“잘 가라.”

아브람이 막 엘빈의 주위로 불의 구체를 폭발시키려는 순간이었다.

사악-

촤악-!

아브람의 등이 크게 베어지며 피 분수가 튀어 올랐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집중이 깨지며 불의 구체들도 사라져 버렸다.

“크윽…….”

아브람은 눈을 크게 뜨며 몸을 돌렸다.

그러면서 팔을 뻗어 마력을 있는 그대로 쏘아 냈다.

콰자자작-!

탁, 타다닥-

아브람의 마력은 대상을 잃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조금 얕았나?”

“네놈…….”

아브람은 자신의 등을 베어 낸 이를 노려보며 물었다.

“어떻게…… 움직이는 게냐?”

“어떻게냐고 물으면…….”

그 물음에 윤재는 엘빈을 비롯한 다른 해당자들을 둘러보며 대답했다.

“나도 잘 모르겠는데?”

* * *

아브람이 마법진을 발동시킨 직후.

엘빈을 비롯한 해당자들은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머리를 쥐어뜯었다.

다른 이들에 비해 큰 티는 없었지만, 아브람 역시 미세하게 움직임이 불편해진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왜들 저래?’

윤재는 그들이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알게 된 건 아브람과 엘빈의 대화를 듣고 난 뒤였다.

‘영혼을 끌어당겨?’

어처구니없는 마법진이었다.

엘빈을 비롯한 해당자들은 마법진에 영혼이 잡아먹히지 않도록 정신을 붙잡고 있었던 것이다.

아브람 역시 비교적 자유로울 뿐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고.

‘난 왜 멀쩡하지?’

윤재는 다른 이들과 달리 자신은 마법진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자 의아했다.

얼마 전, 딘 알라도르의 스킬에 영향을 받지 않은 것과 상황은 비슷했다.

그때와 다른 게 있다면 아브람의 마법진은 딘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강력한 마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역시, 이것들 때문인가.’

윤재는 자신의 손목에 채워진 ‘자하르의 족쇄’를 내려다보았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자신의 몸속에 흐르고 있는 마력 회로, 그리고 그 마력 회로를 움직이고 있는 두 번째 심장.

그 모든 것들이 마법진의 힘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있었다.

‘기회는…… 있다.’

윤재는 엘빈에게 한눈이 팔린 아브람을 바라보았다.

그는 마법진에 영혼이 빨려 들어가지 않도록 정신을 집중하는 한편, 이 자리에서 가장 위험한 엘빈을 경계하고 있었다.

당장 엘빈이 저 정도인데 그보다 한참 약한 자신이 이렇게 멀쩡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하는 모양이었다.

‘한 번.’

윤재는 아브람이 움직이려는 때를 기다렸다.

‘기회는 딱 한 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