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ive

79.00.

마천루 클랜의 건물 안에 마련된 접대실은 제법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윤재와 정규는 곧장 리 차홍에게서 접대실로 안내받았다. 그것은 리 차홍이 두 사람을 귀중한 손님으로 대접하겠다는 의미였다.

당연했다.

두 사람은 엘빈과 로이스는 물론 마천루 클랜 내에서도 제법 신경을 쓰고 있는 인물이었다.

당장의 실력도 제법 뛰어날뿐더러 신규 해당자라는 점이 두 사람의 가치를 더욱 높여 주었다.

앞으로의 성장 가능성을 놓고 본다면 두 사람은 지금껏 나타난 그 어떤 해당자보다도 가치가 있었다.

괜히 엘빈과 로이스가 반복해서 클랜의 가입을 제안한 게 아니었다.

덕분에 윤재와 정규는 다과와 차 등을 대접받으며 편하게 기다릴 수 있었다.

“여길 이렇게 빨리 오게 될 줄은 몰랐네요.”

“뭐, 이야기할 데가 여기밖에 없으니까.”

윤재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느긋하게 과자를 먹고 차를 마시는 모양새가 썩 여유로워 보였다.

소소한 잡담과 진지한 대화가 조금 오갔다. 그러는 사이 접대실의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생각보다 금방 보네.”

“윤재 씨, 정규 씨. 여기는 무슨 일로 오셨어요?”

서류 더미에서 탈출한 엘빈의 얼굴에는 생기가 어려 있었다. 로이스 역시 윤재와 정규가 제법 반가운지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정규는 두 사람에게 꾸벅 인사했고, 윤재는 자신들의 맞은편에 앉는 그들에게 말을 건넸다.

“잘 지내셨습니까?”

“아니, 별로.”

“저도 잘 지낸 것 같지는 않아요.”

표정들이 어두웠다. 무슨 큰일이라도 있나 싶어 윤재가 물었더니 돌아오는 대답은 투정에 불과했다.

클랜의 징계로 멜른에 더 머물게 된 엘빈, 그리고 그런 엘빈의 뒤처리를 하느라 고생한 로이스.

윤재와 정규는 한동안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웃었다.

“참, 그런데 정말 무슨 일로 오신 거예요? 다크뮴에서의 일은 어떻게 됐고요?”

윤재와 정규는 다크뮴으로 간다고 했다.

목표가 뭔지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머더러 클랜의 시험에 대해 알고서 그곳으로 떠났다.

지금이 딱 그때쯤이었다.

머더러 클랜의 시험이 시작될 시기.

그런데 그 시기에 두 사람이 다시 멜른으로 돌아왔다.

“그거라면…….”

윤재는 품에서 배지를 꺼내 탁자 위로 내밀었다.

“이렇게 됐습니다.”

“그건…….”

“……지금 제정신이냐?”

로이스는 깜짝 놀랐고, 엘빈은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윤재가 내민 배지.

그것은 날카로운 단검 모양을 한 머더러 클랜을 상징하는 배지였던 것이다.

머더러 클랜에 가입했다는 증거.

처음 머더러 클랜의 딘 알라도르를 죽인 것을 계기로 알게 된 윤재와 정규가, 머더러 클랜에 들어간 것이다.

“대체 뭔 짓거리를 하려고 거길 가나 했더니…… 우리 클랜도 걷어차고 간다는 곳이, 머더러냐?”

엘빈은 처음 윤재와 정규를 알게 됐을 때부터 두 사람을 탐냈다.

이후 아브람 사건을 겪고 난 뒤 그 감정은 더 커졌다. 어떻게 해서든 두 사람을 마천루 클랜으로 끌어들이고 싶어 했다.

하지만 가는 길이 달랐다. 윤재와 정규는, 아니 정확히 윤재는 마천루 클랜에 들기를 거절했다.

납득할 수 있었다. 어느 단체에 속하게 된다는 건 그만큼 걸리는 제약이 생긴다는 거니까. 무리를 꺼려하는 성향이라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데 이건 경우가 달랐다.

뿌득-

“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 아닌가?”

엘빈의 눈빛이 살벌했다.

금방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윤재의 멱살을 틀어쥘 것 같은 모습이었다.

‘대충 예상은 했지만.’

엘빈의 반응이 심상치 않을 거라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의외는 그 옆에 있는 로이스였다.

그녀 역시 엘빈 못지않게 살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의 반응에 윤재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지어졌다.

‘나쁘지 않아.’

이런 격한 반응은 오히려 고마웠다.

설명이 필요하다. 그 말은 곧 엘빈이 자신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말해 주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들이 자신을 아끼고 있다는 방증이니까.

“진정부터 하십시오.”

“그건 앞으로 네가 할 일이지.”

“……알겠습니다.”

생각보다 더 크게 화가 난 모습에 윤재는 한숨을 작게 쉬었다.

아무래도 서둘러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우선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 시험을 보긴 했지만, 머더러 클랜에 들어간 건 아닙니다.”

“무슨 소리야? 그럼 이 배지는 뭔데?”

“시험을 봤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머더러 클랜의 시험을 통과하고 얻은 배지입니다.”

“……그 시험을, 하루만에 통과하고 온 거냐?”

“네.”

머더러 클랜의 시험은 무기한으로 진행된다.

기한은 정해져 있지 않았다. 적당히 인원이 채워졌다 싶을 때 놈들은 통보 없이 시험을 중단한다.

시험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윤재와 정규는 단 하루 만에 통과하고 멜른으로 돌아왔다.

‘난놈들이긴 난놈들이군.’

시험 내용은 매년 바뀐다. 하지만 그 시험의 내용은 하나같이 사람을 죽이는 일과 관련되어 있었다.

“너희들…… 누굴 죽이고 그 시험을 통과했지?”

“중요한 겁니까?”

“큰 문제는 아니지. 이쪽 세상에서 모르는 사람 한둘 죽인 것쯤 비난받을 일도 아니니까.”

대수롭지 않게 말하던 엘빈은 돌연 눈을 가늘게 좁히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내가 너희를 잘못 봤다는 의미겠지.”

“……좋습니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윤재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꾹꾹 누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신이 다크뮴으로 간 목적 중 하나.

바로 아내와 딸을 죽인 범인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 과정에서 윤재는 필연적으로 과거의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괴로운 과거를 꺼내는 만큼 당연히 윤재의 얼굴에도 그늘이 짙어졌다.

“……그곳에서 녀석을 만났습니다.”

꽈악-

의식하지도 않았는데 절로 주먹에 힘이 들었다.

이야기를 듣던 엘빈과 로이스 역시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운이 좋았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 제 표적이 바로 박윤성이더군요. 그래서 그 자리에서 녀석을 죽였습니다. 정규 역시 그곳에 함께 있던 해당자 중 하나가 표적이었습니다. 이제 설명이 됐습니까?”

“……괜한 걸 물었군. 미안하다.”

중간에 몇 번이고 이야기를 멈출까 고민하던 엘빈은 고개 숙여 사과했다.

이야기하는 내내 윤재의 표정이 좋지 않았던 것은 뻔했다.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모든 이야기가 끝난 지금도 윤재의 얼굴에는 분노와 그리움, 허탈함과 같은 여러 복잡한 심정이 뒤섞여 떠올라 있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네요.”

로이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일이 있었다면…… 오히려 머더러, 살인자 놈들을 싫어할 텐데.”

“싫어합니다.”

윤재는 생각할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혐오합니다.”

“……무슨 뜻인지 대충 알겠어요. 시험은 봤지만, 머더러 클랜에 들어간 건 아니라는 말.”

“다른 목적이 있었던 거냐?”

“큰일이 하나 있죠.”

“큰일이라고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로이스가 불안한 목소리로 묻자 엘빈은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리 호들갑이야? 설마 아브람 사건보다 더 큰일이…….”

“더 큰일입니다. 훨씬.”

“…….”

두 사람의 입이 다물어졌다. 말문이 막힌 엘빈을 돌아보며 로이스가 표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입이 방정이야.”

“……반성하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서류 더미 사이에서 일이 터지기를 기대하던 엘빈은 두 손을 위로 들어 올렸다.

사건을 바라긴 했지만 아브람이 날뛰던 것보다 더 큰일을 바랐던 건 아니었다.

“그래서? 대체 무슨 일인데?”

이야기할 준비가 됐다.

윤재는 옆에 앉아 있는 정규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정규는 품에서 종이에 싸맨 물건을 꺼냈다.

“이것 때문입니다.”

“뭐야?”

엘빈의 물음에 정규는 싸매고 있던 종이를 풀어 내용물을 보였다.

작고 검은 구슬.

엘빈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건…….”

“뭔가 아시겠습니까?”

“기분 나쁜 물건인데. 뭐하는 물건인지는 모르겠지만.”

엘빈은 그렇게 말하며 구슬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이리저리 살피다 눈살을 구겼다.

“뭐야, 감정이 안 돼?”

“나도 마찬가지야. 이거 대체 뭐 하는 물건이에요?”

두 사람의 놀람은 당연했다.

감정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일종의 잠금이 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대개 그런 잠금이 된 아이템은 높은 스탯을 가진 해당자들이 잠금을 해제하고, 감정이 가능했다.

그리고 이 자리에 있는 엘빈과 로이스는 이면세계에서도 이름을 날리는 강자들이었다.

사실상 그들이 감정할 수 없는 아이템이란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효과는 물론 아이템의 이름조차 감정이 되질 않아요. 이 정도 잠금이면…… 감정하는 데만 몇 달은 걸리겠어요.”

엘빈과 로이스가 이름조차 감정할 수 없는 아이템이라면 그 효과를 알아내기란 사실상 힘들다고 봐야 한다. 특별한 수를 쓰더라도 시간이 꽤 오래 걸릴 게 분명했다.

“머더러 클랜에서 이번 시험을 통과한 해당자들에게 나눠 주고 있는 물건입니다.”

“머더러 클랜에서 이런 걸 나눠 준다고요?”

“네. 이걸 저희보고 먹으라고 하더군요.”

“대체 이게…….”

“악마의 씨앗이라는 겁니다.”

“뭐, 뭐라고요?”

예민한 단어가 나와서일까?

더 이상 놀랄 것도 없다고 생각한 로이스는 다시금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윤재는 탁자 위에 올려놓은 씨앗을 집어 들며 말을 이었다.

“머더러 클랜에서는…… 이 씨앗을 이용해 악마를 만들어 낼 작정입니다.”

* * *

일기에 기록된 이야기는 머더러 클랜의 시험에 휩쓸리게 된 사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을 읽어 내려가던 표정이 점차 하얗게 질렸다.

“이게…… 뭐야.”

아브람이 난동을 부린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다시 이런 일이 벌어진단 말인가.

이건 아브람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재앙이었다. 일기를 잡고 있던 윤재의 손이 덜덜 떨릴 정도였다.

[……다크뮴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에게 머더러 클랜의 초대장이 날아왔다.

……나는 살아남았다. 때로는 도망치고, 때로는 싸웠다. 살아남겠다는 집념 하나만 가지고서.

……머더러 클랜의 시험이 끝났다. 살인마 놈들을 죽이고 빼앗은 아이템이 수중에 있었다. 이걸 팔아 돈으로 바꾸면 다시 포탈을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머더러 클랜의 시험은 다크뮴에 거주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진행되었다. 그들의 참여 의사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일기의 기록은 도망치고, 죽이고, 살아남는 치열하고 처절한 일상에 대한 이야기였다.

다크뮴이 어떤 곳인지, 그곳에서 벌어지는 시험이 얼마나 잔인한 것인지.

그리고 그 시험에서 자신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머더러 클랜은 그처럼 시험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 갔다.

윤재는 일기를 읽는 내내 마치 생존을 주제로 한 하나의 소설을 읽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다크뮴을 빠져나왔다. 그 지옥 같은 곳에서.]

그리고 그 이야기의 결말은 썩 나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여기까지만 읽었더라면 말이다.

[나중에서야 알았다.

악마의 씨앗.

그게 처음 세상에 나타난 건 머더러 클랜의 시험이 있었던 얼마 전이라는 사실을.]

일기에는 악마의 씨앗으로 인해 벌어진 일들이 적혀 있었다.

처음 악마의 씨앗이 세상에 나타난 건 그 씨앗을 먹고 빠르게 강해진 해당자들로부터였다.

[머더러 클랜의 신규 해당자들은 모두 이 악마의 씨앗을 삼켰다. 별 볼 일 없던, 그저 그런 실력의 해당자들이 갑작스럽게 강해지고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구슬, 즉 씨앗을 삼키고 힘을 얻는다.

여기까지만 보면 나쁠 건 없었다. 그것만이라면 단지 삼키는 것만으로도 강한 힘을 주는 뛰어난 아이템일 뿐이니까.

하지만 문제는 씨앗의 효능이 그게 다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씨앗은 그들의 배 속에서 자라났다. 뿌리를 내리고 서서히 느리지만 꾸준하게 그들의 존재를 바꿔 나갔다.

인간이…….

악마가 되었다.]

그것이 바로, 재앙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