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ive

84.00.

5대 클랜을 비롯한 여러 대형 클랜이 연맹을 맺었다.

머더러 클랜의 척살이 완료될 때까지로 제한되어 있었지만, 클랜이 이 정도 규모로 뭉친 건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들은 동원할 수 있는 전력을 최대한 끌어모았다. 이면세계 곳곳에 퍼져 있는 머더러 클랜의 거점을 동시에 공격하기 위해서였다.

윤재와 정규 역시 그 안에 포함되었다.

“왜 하필 가라안이지?”

회의가 끝나고 엘빈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윤재에게 물었다.

그의 얼굴에는 의문보다는 호기심이 가득해 보였다.

윤재는 그의 눈을 마주하다가 슬쩍 피하며 대답했다.

“그쪽이 가장 손이 부족해 보여서요.”

“손이 부족하다라…….”

대답은 그럴싸했다.

가라안.

그곳은 그야말로 보잘것없는 도시였다.

시작의 마을인 멜른보다도 작은 규모에다가 출몰하는 괴물이나 퀘스트, 어느 것 하나 특별할 게 없는 그런 도시.

그렇기에 어느 한 도시를 거점으로 두고 살아가는 해당자들 역시 가라안은 그리 선호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머더러 클랜 역시 마찬가지였다.

“손이 부족한 건 당연하지. 가라안에 있는 머더러 클랜의 클랜원들은 사실상 버려진 놈들이나 마찬가지니까.”

머더러 클랜의 수많은 지점 중 가라안의 거점은 일종의 유배지나 마찬가지였다.

클랜에서 죄를 짓거나 특별한 성과를 내지 못한 무능한 클랜원들을 그곳으로 보내는 것이다.

사실상 버려진 것이나 다름없는 해당자들.

당연히 그들의 실력도 머더러 클랜 내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녀석들뿐이었다.

그런 장소에, 인원을 가장 적게 배치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넌 가라안에 대해 알고 있는 것도 없잖아?”

윤재는 단 한 번도 가라안에 대해가 본 적이 없었다.

물론 회의 도중 가라안에 대해 알 수 있을 만한 대화가 오가긴 했다.

대부분의 해당자들은 가라안을 무시하고 그곳에 있는 머더러 클랜의 해당자들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가라안은 그만큼 배척받고 무시받는 도시였다.

그럼에도 윤재는 가라안을 선택했다. 마천루 클랜의 임시 클랜원 겸 스페어 자격으로 말이다.

물론 그 자격을 얻을 수 있었던 건 로이스와 엘빈의 보증과 추천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런데 왜 하필 그곳이지?”

“저는 멜른과 다크뮴을 제외한 다른 도시에 대해 잘 알지 못합니다. 그중 멜른은 모든 도시 중 유일하게 머더러 클랜의 거점이 없는 곳이고, 다크뮴은 머더러 클랜의 주요 거점이 있는 곳이죠.”

“그런데?”

“둘 다 제가 활동할 무대는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다크뮴에서 벌어질 전쟁은 지금의 제가 활동하기에는 너무 큰 무대니까요.”

“그래서 만만한 가라안을 선택했다?”

“네.”

그 대답이 실망이었을까?

엘빈은 맥빠진 얼굴로 말했다.

“이유가 너무 심심하군.”

뚜벅-

그 말과 함께 엘빈은 저 앞으로 걸어갔다.

뒤늦게 걸어 나온 정규는 잔뜩 우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난 죽을 거야…….”

“왜 또?”

“결국 이 아수라장에 뛰어드는 거잖아요.”

아수라장이란 머더러 클랜과의 전쟁을 말하는 것이었다.

정규의 투덜거림에 윤재는 피식 웃었다. 정규의 저런 모습은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니었다.

“넌 가끔 보면 엄살이 너무 심해.”

“하아.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네요.”

“뭐가?”

“아까 회의 때 들어 보니까 그나마 가라안이라는 도시에는 약한 놈들밖에 없다면서요? 그럼 좀 쉽겠네.”

언제나와 같던 장난스러운 투덜거림은 금방 사라졌다.

눈빛도 다시 날카로워졌다.

한 번 윤재를 따라가기로 마음먹고,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 정규는 금세 마음을 굳힌 모양이었다.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불평하기보다 진지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쉽겠다고?”

윤재는 정규의 말에 어깨를 으쓱이며 회의장 반대편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글쎄다.”

“……그거 무슨 의미예요?”

정규의 물음에 윤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곧이어 잠시 진지해졌던 정규의 얼굴이 울상으로 변했다.

“아, 대체 뭐냐고요!”

* * *

마천루 클랜은 철저히 실력만을 가지고 클랜원을 받았다.

5대 클랜 중 인원수가 가장 적은 곳이 바로 마천루 클랜이었다. 그리고 그런 만큼 마천루 클랜은 어지간한 실력이 아니고서는 들어갈 수 없었다.

그래서일까? 마천루 클랜의 해당자들은 대부분 자신의 클랜에 깊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가라안의 포탈 앞에 모여 있는 해당자들은 저마다 소속된 클랜의 해당자들끼리 무리 지어 있었다.

인원수가 가장 많은 터너 클랜부터 맥시멈 클랜과 마천루 클랜 등 무리는 여러 갈래로 나누어져 있었다.

“저 녀석들은 뭐지? 뭔데 소속이 마천루 클랜으로 되어 있어?”

그중 마천루 클랜의 무리에서는 기존 클랜원들이 처음 보는 두 해당자를 흘깃거리고 있었다.

그들의 가슴에는 마천루 클랜을 상징하는 문양이 붙어 있었다. 적아를 구분하고 서로의 소속을 알리기 위한 증표였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자신들과 같은 증표를 가슴에 달고 있으니 의아한 것도 당연했다.

“엘빈 씨가 데리고 온 해당자들이지? 듣기로는 클랜에 들어 올지도 모르는 스페어라고 하던데.”

한 해당자가 목소리를 죽여 대답했다.

하지만 처음에 불만인 투로 이야기를 꺼낸 해당자는 자신의 기분을 숨길 생각이 없는 듯 여전히 짜증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스페어? 우리 클랜이 그런 것도 키웠나?”

스페어란 클랜에서 눈여겨보는 해당자를 의미했다.

지금 당장은 실력이 부족해 클랜원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미래의 가능성을 보고 클랜원처럼 지원해 주는 해당자.

그게 바로 스페어였다.

훗날 뛰어난 해당자로 성장하면 클랜으로 끌어들일 수 있도록, 미리부터 투자하는 것이다.

하지만 굳이 스페어를 두지 않아도 마천루 클랜에 들어오고자 하는 해당자들은 줄을 서 있었다.

마천루 클랜은 물론 5대 클랜에는 전부 스페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은연중 5대 클랜은 스페어를 두고 있는 다른 클랜을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데…….

“스페어가 뭐야, 쪽팔리게 진짜.”

마천루 클랜의 해당자, 지클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제법 커서 귀가 밝은 해당자라면 듣지 못하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당연히 이야기의 도마 위에 올려 진 윤재와 정규 역시 그 목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아니, 저것들이…….”

“내버려 둬라.”

발끈해서 움직이려던 정규를 윤재가 말렸다. 마천루 클랜의 해당자들을 노려보던 정규는 윤재를 휙 돌아보며 쏘아붙이듯 말했다.

“아니, 그럼 저것들이 뭐라 하든 무시하라고요?”

“이해해야지. 저들 입장에서 우리는 굴러들어온 돌이나 마찬가지니까.”

윤재는 자신과 정규가 저들에게 어떤 존재인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5대 클랜에서 무시하는 스페어라는 존재, 더군다나 그런 스페어가 가슴에 마천루 클랜의 문양까지 달고 있었다.

반면 저들은 이면세계에 들어오고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난 실력자들이었다.

마천루 클랜에 들어오기까지 겪은 수고는 아마 자신들이 겪어 온 고생과는 차원이 다를 것이다.

“우리를 추천해 준 건 엘빈 씨야. 여기서 우리가 소란을 피울 순 없지.”

“……젠장.”

정규는 아직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윤재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엘빈은 반발이 있을 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신들은 추천하고 스페어로서 이 자리에 설 수 있게 해 주었다.

그것은 악마의 씨앗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온 대가이기도 했지만, 엘빈의 호의이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마천루의 클랜원들과 마찰을 빚었다가는 그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꼴에 지나지 않는다.

“병신들. 쪼는 거 하고는.”

윤재와 정규를 노려보던 지클은 정규가 자신들을 향해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다가 몸을 돌리자 비웃음을 가득 섞어 중얼거렸다.

당연하게도 윤재와 정규가 들릴 수 있게 큰 목소리로 말이다.

“저게 진짜…….”

“참아, 참아.”

“아오오오오-!”

윤재가 정규를 말렸고, 마천루 클랜 쪽에서는 다른 해당자들이 지클을 말렸다.

“지클, 그만해라. 어찌 되었건 엘빈 씨의 추천으로 온 해당자들이다. 그리고 곧 있으면 함께 싸워야 할 동료들이고.”

지클의 행동을 중재하기 위해 나선 해당자는 바로 가라안의 책임자이기도 한 권기황이었다.

그의 중재에 지클은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곧, 언제 얼굴을 그랬냐는 듯 뒤쪽의 권기황을 돌아보며 활짝 웃었다.

“안 그래도 그만하려고 했습니다. 저런 것들에게 관심 줄 필요가 있습니까?”

“……그래. 그 정도면 됐다.”

권기황은 몸을 휙 돌려 자신의 위치로 돌아갔다.

곧 인원이 파악되자 포탈 앞쪽에 모여 있던 연맹의 해당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클은 그런 권기황의 등을 빤히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좁혔다.

‘재수 없는 새끼.’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엘빈을 등에 업고 마천루 클랜의 스페어랍시고 들어온 윤재나 정규도.

같잖게 실력 좀 있다고, 감투 좀 썼다고 무게를 잡고 자신을 통솔하려고 드는 권기황도.

전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곧이어 권기황은 자리에 모여 있는 수많은 해당자들 앞으로 섰다.

마천루 클랜의 대표로 나온 그는 이번 가라안 섬멸의 총책임자이기도 했다.

“저는 마천루 클랜의 해당자, 권기황이라고 합니다. 지금부터 이번 작전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작전은 간단했다.

표적은 머더러 클랜. 목표는 섬멸.

주의사항은 그 누구도 도망치지 못하게 할 것.

그걸 위해서라도 머더러 클랜의 거점과 그 구역을 완벽하게 포위할 필요가 있었다.

‘수가 생각보다 많아.’

가라안에 거주하고 있는 머더러 클랜의 해당자들은 총 3백 명 정도였다.

가장 규모가 작은 거점이었음에도 수가 제법 많았다. 이 정도면 어지간한 중견 클랜의 총원과 맞먹는다.

이 중 얼굴과 이름 등 신상이 파악된 머더러 클랜의 해당자들은 총 2백 명이었다.

섬멸대의 총책임을 맡은 권기황은 그들 2백 명의 얼굴을 빠르게 숙지시켰다.

홀로그램처럼 한 명 한 명의 얼굴이 허공에 떠올랐다. 권기황은 그들의 이름과 신상, 특징 등을 설명했다.

“경우에 따라 적아가 파악되지 않는 상대는 가능한 한 제압하길 바랍니다.”

머더러 클랜이 거점으로 삼고 있는 지역에는 머더러 클랜원만이 있는 게 아니었다.

대부분 그곳을 꺼려하긴 하지만, 특별한 이유가 있어 그 지역에 머무는 해당자나 거주민들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 자리에 있는 해당자들은 서로 가슴에 달고 있는 클랜의 문양으로 적아를 구분할 수 있지만, 다른 해당자들은 그게 아니었다.

‘제압이라…….’

우스운 소리였다.

‘그걸 지킬 녀석이 과연 이 자리에 얼마나 있을지.’

윤재는 힐끗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중에서 유독 방금 전 자신을 뒤에서 신나게 씹었던 지클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재미있다는 듯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권기황의 말은 결코 지켜질 것 같지 않았다.

‘이 짧은 시간 안에 저 많은 사람의 얼굴을 숙지하는 것도 무리야.’

평범한 해당자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머더러 클랜 해당자들의 신상을 공개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했다.

이 짧은 시간에 저들 모두의 얼굴을 기억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특히나 목숨이 오가는 상황에서라면 더더욱 그렇다.

‘사실상…… 그 지역 내의 모든 해당자들을 척살하겠다는 소리겠지.’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몇 가지 주의점과 작전을 설명하던 권기황은 조금 더 목소리를 키워 말했다.

“그럼 지금부터 머더러 클랜의 척살을 시작합니다.”

그 말에 자리에 모여 있는 해당자들은 긴장의 끈을 부여잡았다.

“해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