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ive

99.

머더러 클랜과의 전쟁은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트룸과 가라안을 비롯한 여러 도시의 머더러들이 빠르게 토벌되었다.

머더러 클랜에서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지거나 거점에 틀어박혀 의미 없는 저항을 지속했다.

씨앗의 존재도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마귀목이 죽고, 씨앗은 부화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사실상 머더러 클랜은 종속 자체가 불가능했다.

‘이제 끝난 건가?’

마천루 클랜의 거처.

그 안에서 윤재는 전쟁이 지속되는 동안 신세를 지고 있었다.

의미 없는 하루하루는 아니었다.

그동안 매일같이 정규와 대련을 하거나, 틈틈이 시간이 나는 대로 엘빈이나 로이스와 대련하기도 했으니까.

쏴아아아아-

막 몸을 씻고 나온 윤재는 샤워장 벽에 걸어 두었던 수건으로 머리를 털었다.

탁 트인 넓은 방, 침대에 앉은 윤재는 옷가지와 함께 놓아두었던 일기를 꺼내 들었다.

‘다음 페이지는 언제쯤이지?’

일기의 기록은 어느 순간부터인가 열리지 않고 멈춰 있었다.

머더러 클랜과의 전쟁 직후부터였다. 악마의 씨앗이 부화하고, 머더러 클랜과의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그 이후부터의 기록이 없었다.

‘미래가 너무 많이 달라진 탓인가?’

원래의 미래에서는 수많은 사람이 죽는다.

가라안의 지하 미궁을 발견하고, 마귀목을 베어 냈지만 이미 부화한 씨앗들은 마귀목의 통제를 벗어난 이후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악마의 씨앗의 존재는 그것들이 부화하기 한참 전부터 알려진 상태였고, 베어진 마귀목으로 인해 씨앗은 싹도 틔우지 못하고 썩어 버렸다.

그리고 지금, 머더러 클랜은 유례가 없는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아니, 사실상 끝난 거나 다름없지.’

지금껏 윤재가 해 온 일들을 생각해 보면, 일기에 기록된 미래와 앞으로 펼쳐질 미래는 적잖이 차이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 이유로 일기가 열리지 않는 거라면 제법 곤란한 상황이었다.

탁-

“답답하군.”

여지까지 수도 없이 읽었던 같은 부분을 다시금 되풀이하듯 읽어 내려간 윤재는 한숨과 함께 일기를 덮었다.

그러고는 다시금 문을 열고 방을 나섰다.

“어? 형, 어디 가요?”

막 방을 나온 윤재를 발견한 정규가 다가왔다.

윤재는 자신을 따라 나오는 정규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러는 너는 왜 나왔냐?”

“그냥, 잠도 안 오고 몸이나 풀까 해서.”

“같은 이유다.”

“엘빈 씨한테 가 볼까요? 그 인간, 늙은이처럼 밤잠이 없어서 아직 안 잘 텐데.”

“너무 늦었어. 당장 어제 다크뮴 토벌을 다녀와서 피곤할 거고.”

다크뮴 토벌.

머더러 클랜의 가장 큰 거점을 지우는 일이었다. 다크뮴은 사실상 머더러 클랜의 심장과 같은 도시였으니까.

그리고 바로 어제, 그 다크뮴이 토벌되었다. 머더러 클랜은 더 이상 남은 거점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머더러 클랜은 이름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뿔뿔이 흩어진 잔당은 아마 오랜 시간을 두고 조금씩 해결될 것이다.

“하긴 그러겠네요. 아쉽지만 우리끼리 가죠.”

“무슨 놀러 가냐?”

“킥킥. 기분은 비슷한데요?”

“요새 별일 없다고 풀어졌다.”

윤재의 타박 아닌 타박에 정규는 평소처럼 재잘재잘 떠들었다.

1층에 도착한 두 사람은 지하 공동으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갔다.

막 공동에 도착했을 즈음이었다.

스카악-

윤재는 대뜸 검을 뽑아 들며 몸을 뒤로 돌렸다. 정규는 그런 윤재를 보며 자신도 덩달아 얼굴을 굳혔다.

“갑자기 너무 진지해지는 거 아니에요?”

“검 뽑아라.”

“너무 갑자기…….”

“아무래도 대련이 아니라 실전을 해야 할 모양이야.”

윤재의 말에 정규는 휙 몸을 뒤로 돌렸다.

공동으로 들어오는 입구, 자신들이 걸어 내려온 계단 쪽에 낯선 사람이 한 명 서 있었다.

“감은 좋군.”

“아까부터 자꾸 우리 둘 말고도 한 명이 더 있는 것 같더란 말이지.”

“일부러 들켜 준 거다. 어디 얼마나 대단한 녀석들인지 보려고 말이지. 수준을 알아보기엔 이만한 것도 없거든.”

거구의 남자는 벽에 등을 기대고 있다가 몸을 바로 세웠다.

어두운 그늘에서 나타난 실루엣은 꽤 낯이 익었다. 한 번 봤을 뿐이지만, 그 모습은 쉽게 잊히지 않았다.

“……시프먼?”

“그러고 보니 우린 구면인가? 난 너희 얼굴을 본 기억이 없지만 말이지.”

윤재와 정규가 시프먼을 처음 보았던 건 머더러 클랜의 시험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시프먼은 거대한 덩치나 이름만으로도 쉽게 잊힐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반면 시프먼은 그 당시 너무나도 많은 해당자를 한눈에 내려다보느라 윤재와 정규를 발견하지 못했다.

물론 소식으로는 많이 접하긴 했다.

신규 해당자가 딘 알라도르를 죽였다는 소식을 듣고, 두 사람을 꽤 눈여겨보고 있었으니까.

사진으로도 본 적은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얼굴을 직접 본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대체 여긴 어떻게 들어 온 거지? 여긴 마천루 클랜의 중심인데.”

“경비가 꽤 허술하더군. 애초에 이곳에 있는 윗대가리들은 모두 자기 실력에 자신이 있는 놈들일 테니 말이야. 아랫것들을 경비로 세워 놔 봤자 고만고만한 놈들뿐이지.”

“……죽이고 들어 왔나?”

“내일 아침쯤이면 들킬지도 모르겠지만…… 그 정도면 시간이야 충분하지.”

시프먼은 그렇게 말하며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대충 내 용건은 알겠지?”

“머더러가 사람을 찾는 경우는 하나뿐 아닌가?”

애초에 머더러 클랜에서 자신들을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목적이 자신들을 죽이기 위함이라는 것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시프먼 씩이나 되는 실력자가 직접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지만, 예상에서 크게 벗어난 건 아니었다. 그렇기에 윤재는 지금처럼 차분할 수 있었다.

“잘 아는군. 그럼 그 이유도 알겠고.”

“이유 없이도 사람 죽이는 쓰레기들이 너희 아니었나? 무슨 거창한 이유를 가져다 붙이려고?”

머더러를 향한 윤재의 적개심은 여전했다.

시프먼은 그 말투와 눈빛에서 윤재가 얼마나 머더러를 혐오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시프먼의 입장에서는 윤재가 괘씸하기도 했다. 저런 녀석이 잘도 머더러 클랜의 시험을 봤구나, 싶었다.

내내 여유 있는 얼굴을 하던 시프먼의 표정이 차갑게 식으며 목소리에 살기가 흘러나왔다.

“그래도 이유는 알고 죽어야 덜 억울하지 않겠나?”

“이유? 글쎄, 말도 안 되는 이유라면 하나 떠오르긴 하는데 말이지.”

“뭐?”

“내가 사람 죽이는 데 눈이 시뻘개진 개새끼들 집안에 불을 좀 질렀지. 이게 죽어야 할 이유인가 헷갈리기는 하는데…….”

윤재는 씩 웃으며 시프먼을 정면으로 노려보았다.

“개새끼 입장에서는 열이 좀 받지 않겠어?”

“…….”

그 말은 어디 틀린 데가 없었다.

보통 세상의 입장에서 윤재가 한 일은 칭찬, 아니 칭송받아 마땅한 일이니까.

“그래. 너희 입장에서는 그게 잘한 일 일지도 모르겠군. 덕분에 앞으로 이쪽 세상은 별다른 일 없이 이전과 같이 흘러가게 될 테니까.”

덤덤한 목소리.

살기를 풀풀 흘리며 말하는 것보다 오히려 그것이 더 섬뜩하게 느껴졌다.

저벅-

시프먼은 윤재와 눈을 마주하고 난 뒤로, 처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세상은 변화가 필요하다. 이쪽 세상에 넘어온 지 아직 반년도 되지 않은 애송이가 그것을 알 리 없지.”

“변화라…….”

윤재는 그 말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변화. 좋은 말이지.”

뿌득-

발트릭스를 쥔 손에 힘을 주며 윤재는 씹어 내뱉듯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딴 걸 변명이라고 지껄이기에 너희가 벌여 놓은 짓거리는 너무 역겹지 않나?”

“……혀가 너무 길었군.”

콰득, 콰드드득-

시프먼이 내디딘 발아래가 갈라졌다.

압도적인 양의 마력이 공동 전체를 감싸기 시작했다. 시프먼의 마력은 윤재와 같은 붉은색을 띠고 있었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윤재의 마력보다 훨씬 더 진하다는 점이었다.

‘피 냄새?’

윤재는 코끝을 자극하는 익숙한 냄새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붉은색의 마력은 마치 피를 안개로 흩어 놓은 것처럼 보였다. 더군다나 그 안에는 피 냄새가 가득 섞여 있어, 코를 마비시킬 정도였다.

“어…… 어?”

윤재는 잠시 몸을 휘청거렸다.

비린 혈향이 코를 자극하는 순간, 눈앞이 어지러워졌다. 몸의 균형도 무너진 것처럼 정신이 흐려지고 깊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이 안개 때문인가?’

윤재는 급히 마력을 끌어올려 정신을 부여잡았다.

어지러운 느낌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공동 가득 퍼져 있는 안개는 시프먼의 마력과 함께 핏물이 섞여 있었다.

“……이건 진짜 피냐?”

“냄새를 맡아 보면 알 수 있지 않나? 이런 냄새는 인위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게 아니지.”

뿌득-

시프먼의 대답에 윤재는 이를 갈았다.

“당연히 네 피는 아니겠고.”

“혈무운이라는 스킬이다.”

시프먼은 손바닥을 위로 펼쳤다.

그의 손 위에 진한 핏물이 올라와 작은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간단히 말하자면 나에게 유리한 전장을 만드는 스킬이지. 특이한 건 이 스킬의 숙련도를 올리려면 사람의 피가 필요하다는 거지만.”

“사람을 잡아먹고 숙련도가 오른다고?”

“지금까지 모은 건…… 대략 십만 명 분 정도인가. 아니지, 얼마 전에 폐기한 실험체들의 피까지 먹어치웠으니 천 명분 정도는 더 늘었겠군.”

아무렇지 않은 듯 덤덤하게 이야기하는 시프먼을 보며 윤재는 할 말을 잃었다.

도대체 그는 자신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이고 그 피를 먹어치웠는지 알고 있는 걸까?

아무리 미치광이 살인마라지만, 일말의 죄책감마저 없는 건가 하는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 그리 놀라지 마라. 곧 네놈들의 피도 여기 섞여 들게 될 테니까.”

“……네 피는 여기 섞일 가치도 없다.”

어지러웠던 머리가 차갑게 식혀졌다.

눈이 흔들리던 것도, 초점이 정확하게 돌아왔다. 시프먼은 속으로 작게 놀라며 윤재를 바라보았다.

‘정신력만큼은 인정해야겠군.’

혈무운의 효과는 기본적으로 상대의 정신을 뒤흔들어 놓는 데 있었다.

물론 그 안에서 자신의 힘을 올리는 등 유리한 전장을 만드는 효과도 있었지만 어지간한 마력과 정신력으로는 혈무운 안에서 저런 집중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곱게 죽을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너희가 저지른 죗값은 백 번, 천 번을 죽어도 부족하니까.”

“혓바닥 한 번 길군.”

그렇게 말하던 윤재의 시선이 시프먼의 뒤쪽, 계단으로 향했다.

윤재의 시선을 따라 뒤를 돌아본 시프먼은 씩 웃으며 말했다.

“누군가 도와주러 올 거라 생각하나? 걱정 마라. 이곳까지 오면서 누군가에게 들킨 적도 없을뿐더러, 이 공동에서 새어 나가는 마력은 내가 전부 막아 놓은 상태니까.”

“……그래. 그거 참 고마운 말이네.”

윤재는 바짝 긴장했다.

이곳은 머더러 클랜의 심장부였다. 이곳까지 오면서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다는 건 시프먼의 은신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뜻이었다.

더군다나 공동에서 새어 나가는 마력을 전부 제어하면서도 이 정도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건 아직 시프먼에게는 그만큼의 여력이 더 남아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어쩌면 엘빈과 같은 수준의 실력자일지도 모른다.’

윤재는 정규를 돌아보았다.

시프먼의 살기에 바짝 얼어 있던 정규는 손끝을 잘게 떨고 있었다. 입술도 파랗게 질린 것이, 혈무운의 영향을 적잖이 받고 있는 모양이었다.

“정신 똑바로 차려.”

“네, 네?”

“정신 차리라고. 오히려 지금 이 환경이 너한테는 더 나을지도 모르니까 겁먹지 말고.”

“그게 무슨 소리인…….”

“간다.”

더 이상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시프먼도 이 이상 기다릴 생각이 없는지 슬슬 허리춤에서 칼을 꺼내 들고 있었다.

째깍-

윤재는 발트릭스에 마력을 두르며 시계태엽을 작동시켰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사라진다?’

눈앞에 서 있던 시프먼의 모습이 주위에 퍼져 있던 피 안개 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아니, 사라진 게 아니야.’

사라진 것처럼 느껴지는 거다.

시프먼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단지 기척이 사라져 마치 없는 사람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

그에게서는 사람이라면 응당 느껴져야 할 모든 기척이 사라져 있었다.

“……환장하겠군.”

보이는데 보이지 않는다.

이런 상대는 처음이었다. 시야에서 녀석이 사라지는 순간 그대로 끝장이다. 지금 의지할 수 있는 건 오직 시각뿐이었다.

쾅-!

윤재는 녀석이 먼저 덤벼들기 전, 자신이 먼저 달려들었다.

시프먼은 기다렸다는 듯 기다란 회칼을 휘둘렀다. 두 자루의 검이 순식간에 번쩍 빛을 내며 부딪혔다.

쩌어엉-!

징, 지이잉-

먼저 검을 날린 쪽은 윤재였다.

하지만 뒤로 물러나게 된 것도 마찬가지로 윤재였다.

몸을 날리며 있는 힘껏 검을 휘둘렀건만 힘에서 밀린 것이다.

‘근력이 대체 몇이야?’

윤재는 뒤로 주춤 물러나면서도 시프먼의 모습을 눈에서 놓치지 않게끔 집중했다.

시계태엽은 최대 속도로 돌려놓은 상태였다. 지금 이 순간, 녀석의 움직임을 놓치면 끝장이라는 걸 아는 것이다.

“제프리를 죽였다더니, 역시 제법 실력은 있군.”

파스스스-

위쪽에서 들려온 소리에 윤재는 무의식중에 고개를 돌렸다.

허공에서 혈무운이 뭉쳐 십여 자루의 날카로운 검조각을 만들었다. 하나하나가 마력의 덩어리로 어지간한 철판조차 우습게 뚫을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딱 그 수준 정돈데.”

‘……돌겠네.’

윤재는 시프먼을 바라보며 온 신경을 집중했다.

쐐액, 쐐애애애액-!

그러고는 십여 개의 비수를 눈으로 보지도 않은 채 하나둘 피해 내기 시작했다.

핏, 피잇-

상처가 하나둘 생겨났다. 긁힌 상처들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빠르게 늘어났다.

상처가 화끈거리며 통증이 밀려들었다. 혈무운을 응집시켜 만들어 낸 비수는 평범한 비수와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통증이…….’

작은 생채기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어지간한 격통에 못지않았다. 그 통증에 못 이겨 잠시 몸이 굳어질 뻔했다.

정규의 상태를 돌아볼 겨를도 없었다.

지금 이 상태에서 시프먼을 시야에서 놓쳤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훤히 보였다.

시프먼은 윤재가 마력으로 응집된 비수를 피해 낼수록 점차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판단력은 훌륭하군.’

윤재는 자신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만약 윤재가 비수를 신경 쓰느라 자신에게서 시선을 떼었다면 그대로 상황은 뒤집어졌을 것이다.

기척을 숨길 수 없는 비수의 기척을 오감으로 읽어 내고, 자신에게서는 시선을 떼지 않는다는 판단은 정말 훌륭했다.

‘움직임도 신규 해당자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야. 저 정도면 제프리가 상대할 수 없을 만하겠어.’

시프먼의 시선이 멀찍이 떨어져 간신히 비수를 피해 내고 있는 정규에게로 향했다.

‘차이가 있긴 하지만 저 녀석도 실력은 상당하고. 정말 둘 다 신규 해당자가 맞는 건가?’

실력만 놓고 보면 윤재가 정규보다는 몇 수 위였다.

자신에게서 줄곧 시선을 떼어 놓지 않은 채 다른 감각들에 의존해 비수를 피해 내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하지만 분명 윤재나 정규, 두 사람 모두 규격 외의 실력을 가지고 있는 건 확실했다.

‘조금 더 강도를 높여야겠군.’

촤악-

시프먼은 회칼을 들지 않은 한 손을 앞으로 뻗었다.

슷, 스스스스-

그러자 처음 날아왔던 것보다 배는 많은 수의 비수가 허공에 생겨났다. 더군다나 그것은 처음 날아들었던 비수보다 훨씬 더 빨랐다.

“어디, 언제까지 여유가 있나 볼까?”

녀석이 자신에게서 시선을 떼는 순간이 끝이다.

이건 게임이었다.

녀석이 자신이 만들어 낸 비수를 어디까지 피해 낼 수 있는가 하는.

그리고 그 게임의 승자는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쐐액, 쐐애애애액-!

수십 개의 비수가 윤재를 향해 쏟아졌다.

윤재는 시프먼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오직 감에 의지해 비수를 피해 냈다.

하지만…….

팍, 파팍-

“아아악-!”

윤재와는 달리 정규는 모든 비수를 다 피해 내는 게 무리였던 듯, 몇 개의 비수가 몸에 박혀 비명을 질렀다.

“저 녀석 수준은 딱 이 정도군.”

좋아, 시프먼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입가에 씩 미소를 지었다.

“말 했지? 곱게 죽을 생각은 하지 말라고.”

으드득-

내내 시프먼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던 윤재는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변태 같은 새끼…….”

“마음대로 지껄여라.”

슷, 스스슷-

시프먼은 윤재를 향해 쏘아 내던 비수의 개수를 더 늘렸다.

“너는 아직 부족한 것 같으니…… 조금 더 고생해야겠어.”

촤르르르륵-

윤재를 향해 다시금 비수가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그 순간, 윤재의 움직임에 가속이 붙었다.

챙, 채채챙-!

윤재는 비수를 피하고, 검으로 쳐 냈다. 물 흐르듯 이어지는 동작에 시프먼의 눈살이 작게 좁아졌다.

‘아까보다 더 빨라졌다?’

아니, 빨라진 게 아니었다.

익숙해진 것이다.

윤재는 오감에 의지해 날아오는 비수를 피해 내는 데 ‘적응’했다. 처음보다 더 빨라지지 않아도,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그것을 피해 내고 있었다.

스스스슷-

시프먼은 계속해서 비수를 만들었다.

속으로는 적잖이 놀란 상태였다.

‘한 번 만에 시각을 버린 싸움에 익숙해졌다라……. 재능이라는 건가?’

윤재는 본능적으로 자신을 눈에서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인지했다.

더군다나 그렇게 시각을 버린 채 다른 감각에 의존한 싸움에 금세 적응해 버린다.

재능이라는 말 외에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이건 예상치 못한 경우였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처음보다 몇 배는 많아진 비수를, 녀석은 간발의 차이로 피해 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틈틈이 자신을 향해 달려들 준비를 한다.

“……위험한 녀석이군.”

무슨 특별한 스킬이 있는 건지는 모른다.

하지만 당장 저 움직임이나 판단력 등은 아직 반년도 되지 않은 신규 해당자가 보여 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어차피 죽일 계획이긴 했지만…….’

시프먼은 앞으로 뻗었던 손을 위로 들어 올렸다.

그와 동시에 윤재를 향해 쏟아지던 마력의 비수들이 우뚝 멈춰 섰다.

“후욱, 훅-”

감각에 의지해 비수를 피해 내던 윤재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갑작스럽게 멈춰진 공세에 무언가 더 큰 위기감이 느껴졌다.

‘뭘 할 생각이지?’

시프먼은 들어 올렸던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슷, 스스슷-

파스스스-

공동의 천장 가득,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무수히 많은 비수들이 생겨났다.

등골이 오싹해지며 윤재의 이마에 절로 식은땀이 맺혔다. 굳이 눈으로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 공동을 가득 메우고 있는 비수의 수가 얼마나 많은지.

“이건…… 사기잖아.”

수천? 수만?

대체 몇 개나 될지 모를 이 많은 비수들을 모두 피해 낸다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막을 수 있을까?’

콰작, 콰작-

윤재의 온몸에 마병갑이 둘렸다.

그것은 보험이었다.

시프먼이 만들어 낸 비수를 자신의 능력으로 막아 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아무리 마병갑이 A등급의 스킬이라고 해도, 시프먼의 비수 역시 그와 비슷한 등급의 스킬일 가능성이 높았다.

더군다나 스킬의 숙련도는 더욱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막기보다는 피하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더 이상 여유가 없다.’

몇 개의 비수가 몸에 박힌 정규는 지금도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시프먼은 일부러 정규를 죽이지 않고 천천히 괴롭혔다.

쉽게 죽이지 않겠다는 말뜻은 바로 이것이었다.

녀석은 자신과 정규를 천천히 말려 죽일 작정이었다. 단숨에 죽이려 했다면 처음부터 간을 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피하기보다는…….’

뿌득-

윤재는 온몸의 마력을 끌어올려 마병갑을 겹겹이 몸에 씌웠다.

‘견뎌 낸다.’

애초에 저 많은 비수를 피해 낸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제 남은 방법은 막는 것뿐.

저 무수히 많은 비수를 온몸으로 견뎌 내며, 시프먼을 향해 달려드는 것이다.

파앗-

윤재는 더 이상 비수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 대신 시프먼을 향해 전력으로 달려들었다.

‘가소로운 녀석이…….’

시프먼의 손이 아래로 떨어졌다.

쏴아아아아-

그 순간, 수만 개의 비수가 아래로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깡, 까가가강-!

쨍, 째쟁-!

윤재의 몸 위로 쏟아진 비수가 튕겨져 나갔다.

마병갑에는 여러 흠집이 생겨났다. 하지만 깨어지지는 않고, 상처가 생기면 다시 그 위로 다른 갑옷을 덧씌웠다.

‘어떻게…….’

시프먼은 자신의 비수가 윤재의 갑옷을 뚫어 내지 못하자 깜짝 놀랐다.

아무리 주위로 힘이 퍼져 나가지 않도록 힘을 분산시켰다지만, 일개 신규 해당자가 자신의 비수를 막아 낼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결국 윤재는 비수의 소나기를 견뎌 내고 시프먼을 향해 전력으로 날아들었다.

쉬익-

쩌엉-!

두 자루의 검이 부딪혔다.

이번에는 어느 누구도 물러나지 않았다. 첫 번째 공방과는 달리 두 사람의 힘이 비슷하다는 뜻이었다.

검을 맞댄 시프먼의 눈이 잘게 흔들렸다.

부딪힌 윤재의 검에서 익숙한 힘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기?’

분명 마기였다.

그것도 제법 농도가 짙은, 상당한 수준의 마기.

해당자가 마기를 다룬다?

그런 경우는 시프먼이 알기로 하나뿐이었다.

쨍-!

윤재의 검을 튕겨 낸 시프먼은 적잖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어떻게 마기를 다루는 거지? 분명 씨앗은 모두 죽었을 텐데?”

시프먼은 윤재의 몸속에서 씨앗이 부화했다고 생각했다. 그가 알기로 인간이 마기를 다룰 수 있는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대답해라. 대체 어떻게, 네가 마기를…….”

“혓바닥이 길다고…….”

스카악-

윤재는 다시금 시프먼을 향해 단숨에 내달리며 소리쳤다.

“말 했지-!”

쩌어엉-!

두 자루의 검이 다시금 부딪혔다.

온 힘을 다한 일격이었지만, 시프먼은 여전히 조금의 미동조차 없었다. 그의 눈이 흔들리는 까닭은 오직 하나, 윤재가 마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었다.

‘씨앗이 부화하려면 아직 시기가 이르다. 더군다나 마귀목도 죽은 상태에서 어떻게…….’

윤재가 다루고 있는 마기의 양은 상당했다.

저 정도 마력과 마기를 가지고 있다면 혈무운을 응집시켜 만들어 낸 비수를 버텨 내는 것도 이해 못할 일은 아니었다.

“어딜 그리 한눈을 파나?”

“……!”

휘익-

콰직-!

뒤쪽에서 내려친 기다란 검이 시프먼의 발 옆에 박혀 들었다. 짧게 움직이며 검을 피해 낸 시프먼은 몸을 비틀며 회칼을 짧게 휘둘렀다.

촤악-

“악!”

허리가 깊게 베어진 정규는 짧은 비명과 함께 이를 악물었다. 그러고는 곧장 바닥에 처박았던 검을 뽑아 크게 휘둘렀다.

후웅-!

사아아악-!

정규가 검을 휘두른 것과 함께 넓게 퍼져 있던 혈무운이 베어졌다. 정규의 검이 지나간 자리로는 피가 섞인 안개가 사라졌던 것이다.

탁, 타닥-

시프먼은 윤재와 정규에게서 거리를 벌려 조금 물러섰다. 그는 정규를 바라보며 눈살을 작게 찌푸렸다.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 거지?”

정규의 모습은 조금 이상했다.

마치 주위에 흩어져 있는 피가 물감이라도 되는 것처럼 온몸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눈도 잔뜩 충혈된 것이 정상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반대로 방금 전 보여 주었던 움직임은 처음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시프먼의 물음에 정규는 들고 있던 검을 앞으로 내밀며 대답했다.

“덕분에…… 이걸 어떻게 써먹는지 알겠거든.”

붉은색을 띤 검신을 확인한 시프먼의 눈이 처음으로 작게 흔들렸다.

“무하마드? 그걸 왜 네가 가지고 있지?”

“주웠지. 너희 창고에서.”

“……그게 거기 있었나?”

무하마드의 피.

정규가 머더러 클랜의 창고에서 가져온 검이었다.

피를 잡아먹고 더 강해지는 검.

피에 담겨 있는 생명력을 잡아먹고 더 큰 마력을 가져오며, 광폭화를 이용해 사용자의 신체능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리는 아이템이었다.

많은 양의 피를 먹여야 한다는 까다로운 조건이 붙는 아이템이었지만, 그것은 지금 상황에서 조건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사방에 퍼져 있는 모든 안개가 피를 머금고 있었다. 십만 명분의 피가 응집된 혈무운이 퍼져 있는 이상, 무하마드는 끊임없이 정규에게 힘을 공급할 수 있었다.

‘귀찮게 됐군.’

정규의 실력이 제법 뛰어나다고는 하지만, 윤재에 비하면 몇 수는 아래였다.

더군다나 그 윤재조차도 시프먼에 비하면 어린아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하물며 정규는 신경 쓸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녀석이 무하마드의 피를 가지고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무하마드의 피는 시프먼이 가지고 있는 능력, 혈무운과 가장 극악한 상성의 아이템이었다.

혈무운은 애초에 시프먼 자신에게 유리한 환경을 만드는 스킬이었다.

더불어 시프먼이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스킬과 전투 방식은 혈무운을 깔아 놓은 환경을 기반으로 했을 때 더욱 극대화된다.

그런데 저 무하마드의 피를 들고 있는 해당자에게는 혈무운이 시프먼 본인보다 더 이로운 환경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무하마드의 피를 이용해 극대화된 마력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한계치를 넘어선 만큼 증발한다. 내가 쓰기 적당한 아이템은 아니었지.’

처음 시프먼도 저 아이템의 존재를 알게 됐을 때 사용해 보려고 시도했었다.

하지만 무하마드의 피는 혈무운이 먹어치운 피를 강제로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먹어치운 피의 생명력을 이용해 마력을 극대화시켰지만, 곧 어느 정도를 남겨 두고는 증발해 버렸다.

오히려 혈무운의 스킬 숙련도만 갉아먹을 뿐이다. 무하마드의 피는 자신이 사용하든, 상대가 사용하든 존재 자체만으로도 시프먼에게는 골치 아픈 아이템이었다.

“후우- 귀찮게…….”

시프먼은 진지해질 필요성을 느꼈다.

예상치도 못한 녀석이 최악의 상성을 가진 아이템을 들고 왔다.

지금까지는 녀석들을 천천히 목을 졸라 죽일 작정이었다면,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다.

눈앞에 있는 둘은 이제 더 이상 쉽게 가지고 놀 수 있는 장난감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그냥…… 죽여야겠어.”

저벅-

지금껏 내내 혈무운을 뭉쳐 만들어 낸 비수를 이용해 공격을 해 오던 시프먼이 직접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하마드에 내장된 스킬, ‘광폭화’가 진행 중인 정규는 그런 시프먼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집중했다.

기척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지만, 시각으로 보이는 시프먼의 움직임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민감해졌다.

“……온다.”

“네!”

윤재의 말에 정규가 대답하는 그 순간이었다.

삭-

스스슷-

시프먼의 모습이 공동 가득 퍼져 있는 혈무문으로 녹아들며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촤아악-

윤재의 몸이 바닥을 긁으며 뒤로 돌아갔다. 어느새 윤재는 시계태엽을 최대한으로 작동시킨 후였다.

쉬이이이익-

쩌어어어어엉-!

어떻게 움직이는지 눈으로 보았고, 시계태엽을 작동시킨 덕분에 반응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막아 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찌릿, 찌릿-

시프먼의 검을 막아 낸 윤재의 몸이 허공으로 떠오르며 손아귀가 찢어져 나갔다.

‘무슨 힘이……!’

방금 전과는 느낌이 전혀 달랐다.

윤재는 서둘러 검을 회수해 휘둘렀다. 시프먼의 검은 정확히 자신의 목을 겨냥해 날아오고 있었다.

쩡, 쩌저정-!

콰앙-!

검과 검이 부딪치는데 마치 폭탄을 검으로 막아 내는 것만 같았다.

한 합, 한 합 검이 어떤 궤도로 날아오는지 눈으로 좇는 것조차 버거웠다. 그런 검을 직접 막아 내는 건 더더욱 힘에 부쳤다.

정말 무서운 건, 저렇게 움직이면서도 어떠한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시각을 제외한 어떤 감각으로도 공격을 예측할 수 없었다.

‘조금이라면 긴장을 늦추면 바로 죽는다.’

찢어진 손아귀를 ‘질긴 생명’을 이용해 겨우 회복시켰다. 그렇지 않으면 손이 찢어져 검을 휘두를 수조차 없을 것 같았다.

스스스-

그 순간, 윤재의 등 뒤로 혈무운이 응집된 비수가 생겨났다. 그것은 지금껏 만들어진 어떤 비수보다도 더욱 길고 날카로웠다.

그 날카로운 예기가 섬뜩하게 등 뒤에서 느껴진 순간, 윤재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이건 피할 수가…….’

째앵-!

그 순간, 무하마드가 뒤쪽에서 비수를 쳐 냈다.

혈무운을 잡아먹고 증폭된 마력과 ‘광폭화’의 효과로 강해진 정규는 평소보다 몇 배는 빠르게 움직였다.

정규는 기다란 무하마드를 크게 휘두르며 단숨에 시프먼의 목을 쳐 냈다.

사악-

하지만 정규의 검은 또다시 허공에 퍼져 있던 혈무운을 베어 낼 뿐이었다.

순간 시프먼의 모습을 눈에서 놓친 정규는 고개를 좌우로 돌렸다.

‘어디지?’

꽈아아앙-!

위쪽에서 들려온 쩌렁쩌렁한 공명음.

정규는 고개를 위로 들어 올려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확인했다.

그곳에서는 윤재와 시프먼이 위쪽으로 몸을 날려 검을 부딪치고 있었다.

“크읍…….”

검을 쥔 손목을 다른 한 손으로 감싸며 윤재가 주춤 아래로 내려왔다. 시프먼은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귀찮게…….”

쿵-

시프먼의 발이 땅을 울리는 순간, 혈무운의 기운이 요동쳤다.

그것은 순식간에 윤재의 발아래로 모여들었다. 윤재는 검을 휘두르며 그것을 치워 내려 했지만, 발트릭스로는 혈무운을 베어 낼 수 없었다.

촤르르륵-

콰아아아-!

발아래에 모여든 혈무운의 기운이 폭발하듯 윤재의 몸을 위로 덮쳐 올라갔다. 마치 피가 폭발하는 것만 같은 광경이었다.

“형-!”

“네 걱정이나 하지.”

정규가 막 윤재를 향해 달려가려던 순간, 시프먼의 음성이 옆에서 들려왔다.

쉬이익-

꽝-!

반사적으로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검을 휘두른 정규는 자세가 무너지며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시프먼은 더 기회를 주지 않겠다는 듯 아래로 몸을 숙인 채 정규의 품으로 더욱 깊게 파고들었다.

푹, 푸푸푹-

“컥, 커억!”

정규의 배에 시프먼의 회칼이 연달아 박혀 들었다. 화끈한 느낌에 정규는 이를 악물며 품으로 깊숙이 파고든 시프먼을 향해 주먹을 내뻗었다.

후웅-

주먹이 허공을 내질렀다. 시프먼은 몸을 한 발짝 뒤로 빼며 정규의 주먹을 그대로 바라보았다.

“상처 입은 몸을 돌보지 않는다라…… 검 덕분인가?”

“내가 좀…… 튼튼…… 하거든.”

“허세는 일류군. 실력은 아직 이류지만.”

“그…… 래. 난 아직…… 이류지.”

씨익-

정규의 입가가 크게 벌어졌다.

‘웃어?’

불길한 느낌에 시프먼은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정규의 입이 열렸다.

“그리고 저 형은, 일류고.”

콰우욱-!

뒤쪽에서 검이 아래로 떨어졌다.

쩌엉-!

시프먼은 피하지 못하고 회칼을 위로 들어 올려 검을 막아 냈다. 자세가 제대로 잡히지 않아서 그런지, 막아 낸 검이 제법 묵직하게 느껴졌다.

‘언제……?’

아래로 내려친 검의 주인은 뻔했다.

윤재였다.

온몸에 피칠을 한 상태에서도, 윤재는 곧장 시프먼의 뒤를 잡고 그의 머리로 검을 날린 것이다.

시프먼은 그가 검을 휘두르기 직전까지 기척을 느끼지 못한 상태였다. 그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시프먼이 윤재의 검을 막아 낸 순간, 상처 입은 정규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검을 피하지 않고 막았다. 그리고 그것은 자세가 고정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정규는 그 틈을 빠르게 이용했다.

목표는 허리였다.

단숨에 몸을 반으로 베어 낼 생각으로, 정규는 검을 있는 힘껏 휘둘렀다.

‘어딜…….’

당연하게도 시프먼은 그런 정규의 검을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꾸우욱-

뒤에서 어깨를 짓누르는 힘에, 시프먼은 순간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갑자기 무슨 힘이?’

윤재의 힘이 심상치 않았다.

잠깐이나마 압도적인 스탯 차이를 무시하고 시프먼의 움직임을 멈췄을 정도였던 것이다.

윤재는 지금 이 한순간에 도박을 걸고 있었다.

‘마지막 기회다.’

우웅-

윤재의 손에 들려 있는 발트릭스가 짧은 울음을 흘렸다.

반마검 발트릭스가 가지고 있는 능력 중 하나.

마기와 체력을 이용해 일시적으로 원하는 스탯으로 변환이 가능하다는 것.

윤재는 지금, 자신의 모든 마기와 체력을 쏟아부어 ‘근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린 상태였다.

“따악…….”

쉬이이익-

정규의 검이 시프먼의 허리로 날아들었다.

“한 대만 맞자.”

콰직-!

정규의 검이 시프먼의 허리에 박혀 들었다.

말 그대로 ‘박혀’들었다.

“어……?”

예상치 못한 상황에 정규의 표정에 얼이 빠졌다.

무하마드의 피는 어지간한 바위도 두부처럼 베어 낼 만한 절삭력을 가진 아이템이었다.

더군다나 광폭화로 늘어난 스탯 덕분에 평소의 몇 배로 증폭된 마력을 두르기까지 했다.

당연히 이번 공격 한 번에 시프먼의 허리를 두 동강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결과는, 검이 허리에 반 뼘 정도 박혀 들어갔을 뿐이었다.

“건방진 짓거리를…….”

시프먼은 으득 이를 깨물며 바로 정면에서 달려들었던 정규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콰앙-!

“커억-!”

시프먼의 손에서 뿜어진 피가 정규의 가슴을 두드리며 몸을 멀찍이 날려 버렸다.

쾅-!

빠르게 날아간 정규의 몸이 벽에 처박혔다. 다행히도 그 순간까지 정규는 손에 쥐고 있던 검, 무하마드의 피를 놓지 않은 상태였다.

시프먼은 몸을 뒤로 돌리며 한 손을 쫙 펼쳤다. 어느새 그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던 정규의 손은 검을 꽉 움켜잡고 있었다.

까아앙-!

단단한 쇳소리와 함께 윤재의 검이 시프먼의 손에 막혔다. 윤재의 휘둥그레 떠진 눈이 시프먼과 마주쳤다.

“너도…….”

툭-

시프먼의 손이 어느새 윤재의 가슴 위에 맞닿았다.

“이만 죽어라.”

콰앙-!

“커억-!”

정규와 마찬가지로 윤재의 몸이 멀리 날아갔다.

배에는 손바닥만 한 크기의 구멍이 뚫린 채로.

쾅, 콰직-!

멀리 날아가는 윤재를 바라보던 시프먼의 표정이 작게 찌푸려졌다. 손에 느껴진 감각이 예상했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그사이에 몸을 비틀었나?”

원래는 단번에 심장을 날려 버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시프먼이 힘을 쏟아붓는 순간, 윤재는 몸을 비틀어 간발의 차이로 급소를 보호했다.

물론 치명상이라는 것만은 변함이 없었다.

몸에 바람구멍이 시원하게 뚫렸으니까.

저 상태로 움직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끅, 끄으…….”

뒤쪽에서 들려온 신음 소리에 시프먼은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곳에서는 마찬가지로 정규가 아직도 살아서 몸을 일으키려 하고 있었다.

윤재도, 정규도, 어느 한 명 죽지 않았다.

시프먼은 고개를 위로 들어 올려 한숨을 푹 쉬었다.

“후우-”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아무리 공동 바깥으로 마력이 새어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힘을 분산시켰다지만, 저런 풋내기들을 상대로 아직도 끝을 보지 못하다니.

“수지가 맞지 않는 장사군.”

저벅, 저벅-

시프먼은 낮게 혀를 차며 정규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느새 허리에 있던 상처는 모두 아문 상태였다. 시프먼이 가지고 있는 회복 스킬은 윤재의 ‘질긴 생명’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효과가 뛰어났다.

“진짜…… 괴물이네…….”

극, 그극-

윤재는 질긴 생명으로 조금씩 몸을 회복시키며 검을 지지대 삼아 일어났다.

그러고는 시프먼의 허리에 약간 남아 있는 상처를 바라보았다.

시프먼은 윤재의 시선이 자신의 허리로 향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작게 비웃음을 지었다.

“기대라도 했나?”

“무슨…… 마술을…… 부린 거지? 대체 왜…….”

“마술? 아, 스킬을 말하는 건가?”

뭘 그리 당연한 걸 묻냐는 듯, 시프먼이 대답했다.

“스킬이 아니라 스탯이다. 물리 저항.”

“뭐……?”

“너희들이 아무리 날고 기어 봤자 애초에 내 발밑이라는 거지. 힘을 감추기 위해 상당분의 마력을 쏟아붓고 있지만 스탯이 어디 가는 건 아니거든.”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었다.

아니, 납득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 정도까지…… 차이가 난다고?’

자신이 마병갑을 두른 것처럼 어떤 스킬을 사용한 것도 아니었다.

단순히 물리 저항이라는 스탯의 차이 하나 때문에 시프먼은 온 힘을 다한 정규의 일격에도 고작 반 뼘 정도의 상처를 입은 것이다.

“그리 놀란 표정 지을 것 없다. 당연한 결과지. 애초에 너희 같은 벌레들이 날 어찌해 보겠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소리였다.”

“잘…… 났다.”

윤재는 그렇게 말하며 입가를 비틀어 웃었다.

“신규 해당자한테 칼빵 맞고…… 그렇게 자기 위로하면…… 안 쪽팔리냐?”

“……그래, 내가 또 말이 길었군.”

저벅, 저벅-

시프먼은 조금 더 빠른 걸음으로 윤재에게 다가왔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거리. 하지만 윤재는 검으로 몸을 지탱하고 서 있는 게 겨우였다.

시프먼은 회칼을 위로 높게 들어 올렸다.

“남길 유언은?”

그 물음에 윤재는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좆까.”

“귀담아듣도록 하지.”

그 순간.

쉬이이이익-!

시프먼의 회칼이 윤재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쩌어엉-!

“……어?”

“아.”

시프먼과 윤재의 반응이 갈렸다.

두 사람 사이에 생겨난 반투명한 육각형의 막.

윤재는 그것을 확인하고는 씩 웃었다.

“너무…… 늦었잖습니까.”

“딱 맞게 온 것 같은데?”

시프먼은 계단 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서는 두 사람의 해당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중 엘빈이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시프먼을 향해 인사했다.

“미안하지만 선수를 좀 바꿔야 할 것 같은데.”

구원투수의 등장이었다.

* * *

늦은 밤, 엘빈과 로이스는 윤재의 방을 찾았다.

두 사람은 다크뮴의 토벌을 마치고 트룸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엘빈은 늦은 밤 윤재와 할 이야기가 있어 약속을 잡아 놓은 상태였다.

“이놈은 어딜 간 거야?”

“아직 지하에서 정규 씨와 대련 중인 거 아니야?”

“약속을 어기는 녀석은 아닌데.”

엘빈은 이상하다는 생각에 몇 번 더 방문을 두드렸다. 이대로 돌아갈까, 아니면 로이스의 말대로 지하 공동으로 내려가 볼까 고민이 되었다.

끼익-

“모르겠다.”

“야!”

로이스는 대뜸 방문을 여는 엘빈에게 소리를 질렀다.

아무리 대답이 없어도 그렇지, 저러는 건 아무래도 예의가 없었다.

“먼저 약속을 어긴 건 이 녀석이야. 그리고 만약에라도 쳐 자고 있으면 대가리를 쥐어박아서라도 깨워야지.”

“내일 오면 되지 뭘 그래?”

“아니, 그러기에는…….”

엘빈은 몸을 숙여 바닥에 떨어져 있던 종이를 주워들었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는 것 같거든.”

“그건 뭐야?”

“문틈에 끼워져 있던 건데, 아무래도 나 보라고 적어 놓은 것 같다.”

“뭐라고 적혀 있는데?”

엘빈은 종이를 펼쳐 읽었다.

내용은 별다른 게 없었다. 몇 개의 단어가 적혀 있을 뿐이었다.

“공동, 머더러.”

“……암살.”

옆에서 함께 종이를 읽어 내려간 로이스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어서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