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ive

100 Coins.

“다잉메세지도 아니고 뭐 이런 걸 남기냐? 그냥 암살자가 있다, 하고 이야기 하면 될 걸.”

“그럼…… 도망갈 수도 있잖습니까.”

엘빈의 말에 윤재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다리가 풀린 듯 자리에 주저앉는 윤재를 보며 엘빈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뭐, 맞는 말이긴 해.”

이곳 지하 공동은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통로가 계단 하나뿐이었다.

반면 1층 위쪽의 지상은 복도는 물론이고 어느 창문으로든 탈출이 가능했다.

그런 점에서 지하 공동은 윤재나 정규는 물론 시프먼까지도 도망칠 수 없는 장소였다.

“그런데 우리 좀 솔직해지자고. 네가 잡을 수 있을 줄 알았던 거 아니냐? 난 보험이고.”

“절 너무 잘 아시네요.”

“한 번만 속아준다. 다음은 없어.”

윤재와 엘빈의 대화에 시프먼은 눈을 가늘게 좁힌 채 입을 열었다.

“내가 있다는 걸 미리 알고 있었다?”

“뭐, 그런가 보더라고.”

“……그런데 뭔가 조금 이야기가 이상하군.”

시프먼은 윤재에게서 시선을 뗀 채 엘빈과 로이스를 돌아보았다.

“도망은 약한 것들이나 가는 게 아니었나?”

“그럼 지금 이 상황에서는, 네가 도망쳐야지.”

화악-!

엘빈의 몸에서 선명한 푸른색의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마력은 주위에 퍼져 있는 혈무운을 밀어내며 사방을 잠식해 나갔다.

시프먼의 눈이 조금 떠졌다.

그는 작게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보아하니 이름 없는 해당자는 아닌 것 같고, 이름이 뭐지?”

“워커 엘빈. 이쪽은 맥 로이스.”

“워커 엘빈?”

모를 리 없는 이름이었다.

엘빈이나 옆에 있는 로이스나, 이쪽 세상에서는 유명한 해당자들이었으니까.

최근 다크뮴의 토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의 활약으로 그렇지 않아도 꺼져 가던 머더러 클랜의 생명줄은 완전히 끊어졌다.

“……골치 아픈 녀석이 나타났군.”

“그쪽은?”

“시프먼. 헤럴드 시프먼이다.”

처음 엘빈이 자신을 소개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는 엘빈이 놀랐다.

“시프먼?”

그는 시프먼의 뒤쪽에 있는 윤재와 멀찌감치 떨어져 쓰러져 있는 정규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둘 다 안 죽은 게 용하네.”

“칭찬…… 입니까?”

“비슷하다. 그보다 상태 안 좋아 보이는데 말 하지 말고 쉬고 있지? 로이스, 넌 저 녀석들 좀 봐 주고.”

우드득-

엘빈은 목을 좌우로 꺾으며 몸을 풀었다.

“난 저 녀석을 상대해야겠으니까.”

“혼자 괜찮겠어?”

“여유지.”

파앗-

엘빈의 몸이 움직였다.

시프먼은 그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엘빈이 향한 방향은 전혀 달랐다.

‘설마?’

그가 무엇을 하려는 건지 눈치챈 시프먼이 다급히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키이이잉-

그 주위로 펼쳐진 육각형의 막들 때문에 곧장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젠장-!”

후웅-

콰앙-!

시프먼이 휘두른 주먹에 로이스가 만들어 낸 막이 깨어졌다. 한 번밖에 막아 내지 못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것 좀 빌린다.”

엘빈이 바닥에 쓰러진 정규의 옆에 멈춰 섰다. 그는 정신을 잃어버린 정규가 끝까지 쥐고 있던 검, 무하마드의 피를 반쯤 강제로 뺏어 쥐었다.

후웅-

평소 쓰지 않던 검인지라 엘빈은 적응하기 위해 허공에 몇 번 휘둘러 보았다.

시프먼은 그의 손에 무하마드의 피가 들어간 것을 보고는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알고 있었나?’

헤럴드 시프먼.

그의 능력은 상위 랭커들 사이에서 공공연하게 알려져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어느 정도 이름 있는 해당자들은 서로의 능력에 대해 조금씩은 알고 있었다.

엘빈은 시프먼의 능력, 혈무운에 대해 알고 그 파훼법을 금세 알아차렸다.

정규가 가지고 있는 검, 무하마드의 피가 그의 가장 큰 천적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좋아, 이제 좀 적응이 되네.”

엘빈은 시프먼을 돌아보며 물었다.

“오래 기다렸나? 미안하게 됐군. 새로 얻은 검에 적응을 조금 하느라.”

고작 서너 번 허공에 휘둘러 본 것으로 적응이 됐다니. 시프먼은 그가 자신을 놀리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화를 내지는 않았다.

감정에 먹혀 성급하게 움직여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엘빈이라면 그렇지 않아도 강적인 데다가, 지금 그의 손에는 무하마드의 피가 들려 있었다.

엘빈과 시프먼이 서로를 노려봤다.

이미 시프먼은 지척에 있는 윤재에게서도 관심을 거둔 지 오래였다.

로이스가 윤재를 보호하기 위해 막을 겹겹으로 쌓아 둔 데다가 잠깐이라도 시선을 떼는 순간 엘빈의 검이 날아올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잘 봐둬.”

윤재는 그게 자신에게 하는 말임을 알아차렸다.

“이게 진짜, 상위 랭커들의 싸움이다.”

그 말이 끝나는 순간.

파앗, 팟-

엘빈과 시프먼의 모습이 동시에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꽈아앙-!

* * *

쩌엉, 쩡-!

꽝, 꽈아앙-!

공동 가득 쩌렁쩌렁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귀가 찢어질 것만 같은 소리였다. 허공에서 검이 한 합, 한 합 부딪힐 때마다 주위로 마력이 흩어져 땅을 갈랐다.

로이스는 윤재와 정규의 앞에 서서 넓은 막을 펼쳐 놓았다. 엘빈과 시프먼의 싸움으로 흩어진 마력은 중상을 입은 두 사람에게 치명적일 수도 있었다.

‘저것이…….’

로이스의 보호를 받으며, 윤재는 엘빈과 시프먼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꿀꺽-

‘저것이, 랭커?’

두 사람의 싸움에 공동 전체가 울렸다.

검과 검이 부딪힐 때마다 울리는 파공성은 마치 짐승의 울음소리 같았다.

공동을 흔드는 마력의 파장은 지켜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조여지는 느낌이었다.

실감이 나질 않았다.

저기 있는 시프먼과 방금 전까지 자신이 싸웠다는 것이다.

아무리 정규와 함께 싸우고, 그 천적인 무하마드의 피를 이용했다지만 자신들과 시프먼의 차이는 그 정도로 매워질 만한 것이 아니었다.

‘아니, 아까와는 전혀 달라.’

지금 엘빈과 싸우고 있는 시프먼의 실력은 방금 전까지 자신들과 싸우던 때와 너무나도 달랐다.

차이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엘빈과의 싸움에서 여유를 부릴 수 없는 만큼, 마력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치고 있던 막을 풀어냈다는 것이다.

힘을 분산시키지 않았으니 이전보다 더 큰 마력을 사용할 수 있는 건 당연했다.

두 번째는 바로 마음가짐이었다.

시프먼의 입장에서 윤재와 정규는 어린아이나 다름없었다.

다 큰 어른, 그것도 주먹 꽤 쓰는 어른이 이제 막 걸음을 떼기 시작한 어린아이와 싸우는데 전력을 다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 마음가짐이 달라진 순간, 시프먼은 싸움 방식부터 확연하게 달라졌다.

“저 정도의 엘빈은 오랜만에 보네요.”

로이스는 두 사람의 싸움을 보고도 별다른 감흥이 없는 모양인지 차분한 목소리였다.

“뭐, 검 덕분인지…… 꽤 여유는 있어 보이지만.”

그녀의 말대로 엘빈과 시프먼의 싸움은 언뜻 호각으로 보이지만 점점 차이가 나타나고 있었다.

시종일관 여유가 있는 엘빈과는 달리, 싸움이 시작되고 5분 정도밖에 흐르지 않았음에도 시프먼은 점점 힘든 기색을 비추고 있었다.

로이스는 넋이 나간 듯한 표정의 윤재를 힐끔 흘겨보았다.

그러고는 다시 두 사람의 싸움으로 시선을 옮기고는 말했다.

“잘 지켜보세요. 저 정도 실력을 가진 해당자들의 싸움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될 테니까.”

그러고는 덧붙이듯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뭐…… 뭔가 보이기나 한다면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