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ive

203.

화아아악-!

꽈릉-!

두 자루의 검이 부딪치며 새하얀 마력과 검붉은 마력이 뒤엉켰다.

번개가 바로 옆에서 내려치는 듯한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검붉은 마력과 새하얀 마력이 뒤섞여 서로의 색을 빼앗아 갔다.

쉭, 시이이익-

윤재의 검이 엘빈의 어깨를 노리고 아래로 베어져 갔다. 엘빈은 몸을 비틀며 검을 살짝 옆으로 비껴냈다.

치이-

한쪽 편에 있던 날개가 베어지며 새하얀 마력이 흩어졌다.

하지만 애초부터 진짜가 아닌, 마력을 응축시켜 형상화시켰던 것에 불과한 날개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후웁-!”

츠아악-

엘빈의 검이 윤재의 목을 노리고 베어졌다.

거리는 턱없이 멀었다. 하지만, 윤재는 그것을 마냥 무시할 수 없었다.

핏, 피피핏-

피피피피피피피픽-

사방에서 느껴지는 작은 바람 소리들.

윤재는 잠시 눈을 감고 집중했다. 그 직후, 윤재가 서 있던 사방의 공간이 조금씩 베어졌다.

스아아악-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엘빈이 베어 낸 공간은 윤재의 몸이 아닌, 그 주위 사방이었다.

엘빈은 예상치 못한 대응에 놀라 잠시 몸이 굳어졌다. 싸우다 보면 조금이라도 움직이기 마련이건만, 윤재는 자신의 공격에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팟-

윤재의 신형이 흐려지며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러고는 검붉은 마력을 길게 흘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병갑을 발아래 디딤돌 삼아 튕기며 움직임을 가속한다. 엘빈은 정신없이 속도를 높이며 움직이는 윤재를 보며 검을 휘둘렀다.

콰악-!

스아아악-

다시 한 번, 공간이 베어지며 그 안으로 공기와 마력이 스며들었다.

윤재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엘빈은 순간, 윤재의 움직임을 눈에서 놓쳤다.

‘어디지?’

츳-

짧게 나타난 기척.

엘빈의 몸이 빙글 뒤로 돌아갔다.

쩌엉-!

“크윽…….”

황급히 자세를 잡았지만, 제대로 잡히지 않은 자세로 인해 힘에서 밀려났다.

주춤거리며 균형을 잃고 뒤로 물러나는 엘빈을 향해 윤재가 계속해서 공격을 이어 갔다.

캉, 카카캉-

카가가각- 쩡-!

쉴 새 없이 몰아치는 검.

일정한 형식도 없고, 변칙적이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엘빈의 것처럼 검이 직선적이고 기본에 집중된 것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처음 보는 종류의 검.

‘임기응변에 집중한 건가?’

핏, 피핏-

치이익-

엘빈의 몸에 하나둘 상처가 늘어 갔다.

처음 단추가 잘못 끼워진 탓에 한 번 균형을 잃고 난 뒤로, 엘빈은 계속해서 수세에 밀리고 있었다.

자잘한 상처라고는 하지만 결국 그런 상처가 쌓이면 무너지기 마련이었다. 엘빈은 지금과 같은 공방이 이어져서 좋을 게 없다고 판단했다.

스팟-

사아아악-

뒤로 조금씩 물러나던 엘빈은 발로 바닥을 굳게 디디고 그대로 튕기듯 앞으로 달려들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대응에 윤재의 검이 엘빈의 허리를 깊게 베고 지나쳤다.

전과는 달리 꽤 큰 상처를 입었지만, 반대로 엘빈은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거리를 확보할 수 있었다.

“잡았다.”

쉬이익-

콱-!

검을 휘두르는 대신, 엘빈은 다른 한쪽 손을 윤재의 목을 향해 내뻗었다.

하지만 단숨에 목을 움켜잡고 상황을 반전시키려던 엘빈의 의도는 반쪽짜리 성공에서 그쳐야 했다.

‘팔?’

그 찰나의 순간, 윤재의 팔이 중간에 가로막은 것이다. 이번에도 아까와 마찬가지로 미리 엘빈의 수를 읽고 있기라도 한 것만 같은 대응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꾸우우욱-

엘빈은 움켜잡은 윤재의 팔에 힘을 주었다.

“팔 한쪽 정도는 괜찮겠지?”

우드득-

윤재의 팔에서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엘빈은 손에서 느껴진 감촉에 확신이 들었다.

‘팔 하나는 갔고.’

푸욱-

그 순간, 엘빈은 허벅지에서 느껴진 화끈한 감각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급히 윤재의 팔을 잡고 있던 손을 떨어뜨리고 뒤로 물러나며 검을 휘둘렀다.

피이익-

츠악-!

엘빈의 검이 목을 노리고 날아오자 윤재는 다음 공격을 이어 가지 못하고 마찬가지로 뒤로 물러났다.

동시에 엘빈의 허벅지에 박혀 있던 윤재의 검이 뒤로 빠지며 허벅지를 다시금 크게 베어 냈다.

“으음…….”

“다리 하나는 갔고.”

으스러진 팔을 덜렁거리며 윤재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엘빈은 한 손으로 허벅지의 상처를 매만지며 물었다.

“……일부러 교환한 건가?”

“그 상황에서 제가 내릴 수 있는 최적의 판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후우-”

엘빈은 피가 묻은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상할 만큼 지치는 싸움이었다. 쉬울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세 쌍의 날개를 펼친 상태로도 이렇게까지 어려울 줄이야.

‘게다가 저 녀석…….’

무엇보다 열이 받는 건, 바로 윤재의 상태였다.

‘아직 밑천도 다 안 깠단 말이지.’

겉으로 보기에는 최선을 다해 싸우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직접 부딪치고 있는 자신은 알 수 있었다.

윤재는 아직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패를 전부 드러낸 게 아니었다. 정말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씨익-

“내가 꽤 쉽게 보였나 봐? 그렇지?”

화악-

엘빈의 등에 펼쳐져 있던 날개가 흩어져 검에 모여들었다.

새하얀 마력이 둘린 검이 거대하게 변했다. 섬뜩한 느낌에 윤재는 잠시 뒤로 물러났다.

‘저건 조금 위험해 보이는데.’

평소보다 반 뼘 이상 길어지고 거대해진 검.

정규가 사용하는 거인의 반지와 비슷해 보였지만, 느낌은 전혀 달랐다.

그저 크기만 부풀려지는 거인의 반지와는 달리 엘빈의 검은 보다 위험한 느낌이 풍겼던 것이다.

‘거대한 마력의 덩어리라……. 저건 검이라기보다는 폭탄이라고 해야겠어.’

저 안에 담긴 힘이 어느 정도일지는 가늠이 되지 않는다.

지난 2년 동안, 엘빈이 터득한 것은 단순히 세 쌍의 날개를 펼쳐 낸 상태로 싸우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그 이상의 새로운 기술을 만들어 내는 것.

엘빈은 그것을 훌륭하게 이뤄 낸 모양이었다.

“그럼 저 역시…….”

“아니. 이쯤 하지.”

스으으-

윤재와 엘빈 사이로, 또 다른 하나의 거대한 존재감이 나타났다.

익숙하고도 반가운 목소리에 윤재는 기운을 거둬들이며 고개를 돌렸다.

“언제 오셨습니까?”

“아까부터 와 있었다. 너희가 무시한 거지.”

저벅-

김진석은 윤재와 엘빈의 사이로 끼어들며 아직도 기운을 거둬들이지 않고 있는 엘빈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왜 멈추는 겁니까?”

“아직 그걸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걸로 아는데? 중간에 멈출 수도 없으면서 무작정 쓰고 보려는 거냐?”

“…….”

불만이 가득한 표정의 엘빈은 김진석의 말에 곧 검에 집중시켰던 기운을 거둬들였다.

백의를 통해 새로 만든 기술은 아직 다루기가 까다로웠다. 대련 중 써먹기에는 중간에 멈추기가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위험부담이 있었던 것이다.

김진석이 중간에 끼어든 까닭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자칫 두 사람의 대련이 돌이킬 수 없는 큰 부상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던 것이다.

휙-

엘빈은 김진석에게서 몸을 돌리고 공동위로 향하는 계단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로이스는 당황해서 엘빈의 이름을 부르며 급히 그의 뒤를 따라갔다.

“쯧. 어지간히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군.”

“덕분에 살았습니다.”

“엄살은. 너도 아직 숨겨 둔 게 남았잖아? 시계태엽도 사용하지 않았고.”

“설마요.”

“못 본 사이에 능청이 늘었군. 아니지. 여유가 는 건가?”

김진석의 물음에 윤재는 대답 대신 작게 웃어 보였다. 말을 아끼는 그의 모습에 김진석은 더 추궁하지 않고 작게 혀를 쳤다.

“얼른 올라가서 팔부터 고쳐. 그 상태면 아무리 실력 있는 해당자에게 부탁해도 고치는 데 반나절은 걸릴 테니까.”

“감사합니다.”

“팔부터 고치고, 바로 와라. 아르한 녀석도 너에게 할 말이 있다니까.”

“네.”

윤재는 김진석과 아르한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곧장 공동 위 계단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정규는 그런 윤재의 뒤를 빠르게 쫓아갔다.

“어때 보였어?”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아르한이 물었다.

김진석은 윤재가 올라간 계단 쪽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모르겠다.”

“모르겠다니?”

“실력이야 두말할 것도 없지. 엘빈 녀석과 대등하게 싸운 거니까. 너도 저 녀석 실력은 알잖아?”

“그래, 알지. 사실상 널 제외하면 엘빈보다 강한 해당자는 없다고 봐야 할 테니.”

엘빈은 이미 오래전부터 아르한이 눈여겨보고 있던 해당자였다.

엘빈이 마천루 클랜에 처음 들어 왔을 때부터 아르한은 그의 재능과 성장 가능성을 높게 평가했고, 과연 몇 년 지나지 않아 금세 상위 랭커가 되는 기염을 토했다.

그런 그의 재능은 김진석과 백천을 만나고부터 더욱 빠르게 개화했다.

백천의 도움으로 마력의 절대량과 순도가 높아지는 실험을 받았고, 김진석의 지도하에 더욱 정교한 검을 배울 수 있었다.

더군다나 백의라는 기술을 이용한 마력의 극대화까지. 당장 김진석은 엘빈이 몇 년 안에 자신을 능가할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런 엘빈을 상대로…….

“그런데 윤재 저 녀석, 싸우는 내내 표정에 여유가 있더라고.”

“여유?”

“뭐라고 해야 할지 정확히 말을 못하겠군. 특별히 봐 주고 있다는 느낌은 아닌데…… 자기보다 더 강한 상대와의 싸움에 익숙한, 그런 싸움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서 자신과 대등한 상대와의 싸움에는 별다른 긴장이나 감흥을 못 느끼는 것처럼 보이더군.”

“좀 더 확인이 필요해?”

“아니. 그럴 필요는 없지.”

이미 엘빈과의 싸움을 통해 윤재가 지난 2년간 단순히 놀고먹지만은 않았다는 것이 확인된 상태였다.

김진석은 굳이 남은 밑천을 다 알아내겠다며 그와 싸울 생각은 없었다.

“이봐. 너, 이름이 뭐지?”

“네? 류, 류스이라고 합니다.”

김진석의 물음에 한쪽에 굳어져 서 있던 류스이가 그에게 바짝 다가와 대답했다.

‘내 눈앞에 천외천이…….’

1억이 넘는 수많은 해당자들의 우상.

천외천의 해당자, 김진석.

류이스 역시 그를 우상으로 여기고 있었다.

“지금부터 본 것, 들은 것. 알겠지?”

“네?”

김진석은 한 번에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류스이를 보며 답답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다 퍼뜨리라고.”

* * *

윤재는 병실로 들어가 엘빈과 함께 상처를 치료했다.

엘빈은 베이고 찢어진 상처와 허벅지에 회복 계열의 스킬을 받고는 붕대를 둘렀고, 윤재는 뼈를 일일이 조립했다.

우득, 으드득-

“윽…….”

끔찍한 소음에 윤재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뼈가 부러지면 이게 문제였다. 그 상태 그대로 치료했다가는 부러진 뼈가 안쪽에서 제대로 붙지 않고 틀어질 수가 있었던 것이다.

결국 뼈를 하나하나 붙이고 그 뒤에 치료를 진행해야 하는데, 마취를 하더라도 그 과정은 속이 거북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뭘 어떻게 싸우면 사람 팔이 이렇게 됩니까? 뭐 어디 공룡한테 짓밟히기라도 했어요?”

“그냥, 무식하게 힘만 센 사람이 있습니다.”

나이 든 중년 의사의 물음에 윤재는 그렇게 대답하며 옆쪽을 힐끗 흘겼다.

그곳에는 이미 치료를 끝내고 누워 있는 엘빈이 있었다. 윤재의 말을 뻔히 들었을 텐데도 엘빈은 나 몰라라 하며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가능하면 오늘 하루는 팔 쓰지 마세요. 따로 회복 계열의 스킬은 있으세요?”

“네, 있긴 합니다만…….”

“가능하면 바로 쓰지 말고 자연히 나을 때까지 기다려요. 그편이 세포기관이 살아나고 몸에 적응하는 데는 더 나을 겁니다. 스킬의 도움은 어디까지나 당장 죽을 위기를 넘기는 것뿐이지, 장기적으로는 자연히 회복되는 게 낫다는 거예요. 알아듣겠죠?”

“네,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 약 바르세요. 치료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탁-

중년 의사는 그렇게 말하고는 손바닥만 한 크기의 약통을 옆에 내려놓았다.

하얀탑 클랜에서 개발한 약은 어지간한 부상도 반나절이면 낫게 만들 정도로 효과가 뛰어났다.

윤재는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의사가 내려놓은 약을 팔과 다른 상처에 바르기 시작했다.

“방금 공룡이라고 들었는데, 잘못 들은 건가?”

“아, 들으셨습니까?”

“숨질래?”

“별로 그러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천연덕스레 대답하는 윤재와 엘빈의 사이에 묘한 기류가 돌았다.

마치 방금 전 김진석이 말려서 중간에 끝나 버린 싸움을 다시 이어 가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둘 다 그만 안 해요, 지금?”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로이스가 중간에 서서 눈을 부라렸다. 엘빈은 가장 먼저 그녀에게서 눈을 피하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시비는 저 녀석이 먼저 걸었다.”

“틀린 말도 아닌데 뭘? 무식하게 힘만 센 거 맞잖아.”

“끙.”

약한 모습을 보이는 엘빈을 보며 윤재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엘빈이 유독 로이스에게 약하긴 했지만, 2년 전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정규는 윤재에게 가까이 다가가 귀를 빌렸다. 윤재는 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건가 싶어 귀를 가까이 대었다.

옆을 보니 엘빈과 로이스는 애써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이어서 정규의 말이 이어지고, 윤재의 표정이 턱 굳어졌다.

“어……?”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윤재가 엘빈과 로이스를 돌아보았다.

“진짜……?”

“네. 진짜.”

“언제부터?”

“1년쯤 됐나요? 언제부터였어요?”

“1년…… 맞아요.”

대답은 로이스에게서 나왔다. 부끄러운 듯 고개를 푹 숙이는 그녀를 보며 엘빈이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왜 숙여? 뭐 죄 지었어?”

“고백은 누가 했습니까? 엘빈 씨가 했어요?”

“누가 고백하든, 그런 게 뭐가 중요…….”

“제가 했어요.”

의외의 대답이었다.

로이스의 대답에 윤재는 멀뚱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을 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결국 로이스는 잠시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하더니 말을 이어 갔다.

“이 답답한 녀석이 계속 제자리걸음만 해서, 제가 다가가 봤어요. 계속 그대로 살다가는 화병으로 죽을 것 같았거든요.”

“용감하시네요.”

“그렇게 생각해요? 고마워요.”

작게 웃으며 말하는 로이스와는 달리, 엘빈은 쑥스러운 듯 고개를 돌렸다. 로이스는 그런 엘빈의 목에 팔을 올리며 귀를 꼬집었다.

‘보기 좋네.’

오래전부터 두 사람의 관계가 이렇게 발전할 거라고는 생각하고 있었다.

적어도 로이스는 그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이 보였으니까. 엘빈 역시 그런 로이스의 마음을 알고도 밀어내지 않는 것이 마음이 아주 없지는 않아 보였다.

보기 좋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윤재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이상하리만치 속이 아팠다.

질투는 아니었다. 단지, 자신의 오래전 모습이 머릿속에 아픈 과거가 되어 떠올랐을 뿐이었다.

급히 팔에 약을 바른 윤재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규가 따라 일어나며 물었다.

“어디 가려고요?”

“팔만 안 쓰면 되는 거니까 일어나 보려고.”

“그러니까, 어디 가려고요?”

“아르한 씨하고 김진석 씨 만나러. 인사도 못 드렸잖아? 어차피 얼굴 보고 인사할 만한 사람도 몇 명 없는데, 얼른 안부나 전해 드리게.”

“같이 갈까요?”

“아니, 됐어.”

당장 이 정도 부상은 그렇게 큰 것도 아니었다. 뼈를 맞추고, 회복 계열의 스킬을 받은 상태였다. 더군다나 특별한 재료를 섞어 만든 약을 바르기까지 했다.

다른 이도 아니고 윤재 정도의 체력을 가진 해당자라면 이 정도 부상은 몇 시간 안에 털어 낼 수 있었다.

더군다나 마취제를 한 만큼 딱히 아프거나 한 것도 아니었다.

윤재는 곧장 병실을 나와 건물의 최상층으로 향했다. 최상층, 즉 아르한의 집무실 입구에는 언젠가 보았던 것 같은 얼굴이 서 있었다.

“오셨습니까?”

“아, 예. 저희 구면인가요?”

“리 차홍이라고 합니다. 멜른에서 엘빈 씨와 함께 본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클랜장님의 업무 보좌 역할로 있습니다.”

“아, 그랬군요. 아르한 씨는 안에 계십니까?”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리 차홍은 윤재를 집무실 안쪽으로 안내했다. 문을 직접 열어 주며 윤재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생각보다 빨리 왔군.”

“대접이 부담스럽네요.”

“넌 그만한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지. 마음 같아선 아직도 우리 클랜에 들어와 줬으면 할 정도고.”

“아직도 말입니까?”

“그냥 하는 말이야. 이제 와서 그런 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아, 거기 앉아.”

아르한은 김진석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윤재는 탁자를 사이에 두고 소파에 마주 앉아 아르한이 건네는 술병을 받았다.

“아직도 못 끊으셨습니까?”

“술은 여기 오기 전부터 내가 좋아하던 취미거든. 끊을 생각 없으니 잔소리는 그만두지.”

“알겠습니다.”

“뭐 해? 안 들어?”

아르한이 가만히 앉아 있는 김진석을 향해 말하자, 김진석은 반쯤 비운 술병을 들어 올렸다.

쨍-

세 개의 술병이 부딪혀 맑은 소리를 만들었다. 아르한은 독한 술을 한 모금 넘기고는 입을 열었다.

“뭐 하다 왔는지는 안 묻지. 너 나름대로 뭔가를 열심히 한 건 알겠으니까.”

“시원해서 좋네요.”

윤재는 같은 말을 두 번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똑같은 말을 반복해서 하는 것도 피곤한 일이었다.

“앞으로 일정은 어떻게 할 거지?”

“별달리 생각하고 있는 일정은 없습니다. 당장 이것 때문에 뭘 할 수 있는 것도 없고요.”

“오늘 말고. 앞으로 1년 동안의 계획 말이다.”

“1년이라…….”

용들과 약속된 기한.

그중 2년이 지나가고 앞으로 1년이 남았다. 1년이라면 그리 길다고 할 수도 없었다.

“할 일 없으면, 며칠 시간 좀 내지.”

“무슨 일 있습니까?”

“그래. 길게 뺄 것도 없어. 사나흘 정도면 돼. 어차피 지금 상태로는 무리하게 움직일 수도 없지 않나?”

아르한의 말에 윤재는 정곡을 찔렸다는 듯 어색하게 웃으며 물었다.

“눈치채셨습니까?”

“그 난리를 쳤는데 몸이 멀쩡할 리가 없지. 역행의 부작용이야 전부터 알고 있던 거니까.”

“이건 무슨 짓을 해도 극복이 안 되더군요. 그나마 전보다는 조금 부작용이 줄어들긴 했습니다만…….”

“몸 추스른다 생각하고, 사흘 정도만 시간 좀 비워. 네 얼굴을 좀 알리려면 대외 활동도 좀 해야 할 테니까.”

“얼굴?”

아르한의 말에 윤재는 그 말뜻을 이해하기가 어려워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음 자세한 말은 김진석이 이어받았다.

“1년 후에 있을 전쟁에 대해서는 이미 모르는 해당자가 없을 정도다. 대형 클랜은 물론이고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일반 해당자들까지도 반쯤 강제적으로 전쟁에 참여할 수밖에 없게 됐지. 어차피 이 싸움에서 지면 다 죽은 목숨이니까.”

“그런데요?”

“문제는 전쟁의 핵심인 열쇠. 바로 너다.”

“문제라니, 어떤 문제가 된다는 겁니까?”

“각 클랜 대표들의 의견이 갈리고 있어서 말이지. 네가 죽으면 사실상 이 싸움이 의미가 없어지니까. 전쟁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의견은 물론, 그 밖의 모든 자유를 구속해야 한다는 녀석들도 상당수야.”

예상치 못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사실상 전쟁의 승패에 따라 목숨이 오가는 상황. 그런 상황에 누군가의 죽음이 자신의 죽음과 직결된다는 것은 적잖은 불안 요소로 느껴질 것이다.

자칫 윤재가 전쟁의 선봉에 섰다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이번 전쟁은 시작하자마자 패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것을 우려하는 해당자들이 제법 많았다.

“현재 너에 대해 다른 해당자들이 알고 있는 정보는 5년 차에 들어선 애송이라는 것뿐이야. 제프리를 죽였다고는 하지만, 그것 외에는 겉으로 보이는 공적도 없고. 실력을 보여 줄 수 있을 만한 지표가 없다는 거지.”

“사탄을 잡은 게 접니다.”

“그래, 그건 사실이지. 하지만 혼자 잡은 것도 아닐뿐더러, 그걸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 공개된 자리도 아니었고. 대부분 여론은 사탄을 잡은 게 나라고 말하고 있지.”

윤재는 지금껏 별다른 대외 활동을 하지 않았다. 윤재, 정규와 교류하는 해당자는 손에 꼽을 정도였고, 공적을 쌓을 만한 사건도 그리 많지 않았다.

사탄을 잡았던 것 역시 그 자리에 김진석이 함께 있었다는 이유로 그 공적이 김진석에게로 넘어간 상태였다. 윤재의 입장에서는 억울한 일이었다.

“하…….”

“너나 정규나 랭커들 사이에서는 그냥 실력 조금 있는 5년 차 해당자라는 의견이 많다. 후하게 쳐줘 봤자 이제 막 랭커라 불릴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겠거니 하고 있지.”

“5년 차라…… 그게 문제가 되는 겁니까?”

“시간이 절대적인 문제는 아니지만, 많은 해당자들은 그 시간에 의문을 품고 있어. 이제 겨우 5년 차밖에 되지 않은 해당자가 강해 봤자 얼마나 강하겠냐고. 뭐, 당연하다면 당연한 의문이지. 나라도 널 알지 못했다면 그렇게 생각했을 테니까.”

시간은 절대적이지 않다.

하지만 이면세계로 넘어온 지 오래된 해당자들이 상대적으로 더 강하다는 건 당연한 이야기였다.

일반적인 1년 차 해당자와 5년 차 해당자가 싸운다면 100중 99는 5년 차 해당자의 승리로 끝날 테니까.

윤재나 정규를 실제로 보지 못한 수많은 해당자들은 그런 두 사람의 실력에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결론이 뭡니까?”

“그 정도 수준밖에 안 되는 열쇠가 전쟁에 나가서 개죽음을 당하느니, 애초부터 위험요소를 제거하자. 그게 바로 몇몇 랭커들의 의견이다.”

“위험요소를 제거하는 거라면…….”

“아예 묶어 놓자는 거지. 필요할 때 꺼내 쓸 수 있도록.”

“환장하겠네.”

어이가 없어서 웃음밖에 안 나온다.

이건 도구 취급이나 마찬가지였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되는 겁니까?”

“보여 줘야지.”

아르한은 망설임 없이 준비한 대답을 꺼냈다.

“네가 없이는 전쟁을 이기기 힘들다는 걸.”

“무대는 어딥니까?”

“아카데미.”

윤재의 물음에 대한 답은 이번엔 아르한에게서 나왔다.

사락-

그는 탁자 위에 접어 놓았던 종이를 펼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2년 전부터 열린, 신규 해당자들을 교육하는 아카데미다. 멜른에 건설되었고, 수십만 명 단위를 수용할 수 있을 만한 규모로 만들어져 있지.”

“그런데요?”

“학생이 많은 만큼 이곳에 들어가 있는 교관의 숫자도 많아. 5년 차가 넘는 해당자들을 평교관으로 놓고 있는데, 그중 랭커만 거의 50명에 달하지.”

“50명?”

“많지? 현존하는 랭커들 중 거의 절반가량이 여기 교관으로 등록되어 있다고 보면 돼. 뭐, 실제로 교관 노릇을 하는 녀석은 반도 안 되지만.”

“감투라는 거군요.”

“비슷하지. 아무튼 여기라면 무대로는 꽤 쓸 만하지.”

50명의 랭커들.

그들이 모여 있는 장소.

윤재는 아르한이 말한, 사나흘이라는 시간이 어떤 것인지 바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가서 뭘 하든 수습은 해 주시는 겁니까?”

“그럼.”

아르한은 씩 웃으며 말했다.

“가서 크게 한 번 휘젓고 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