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Youngest Son of Sunyang

[145] I ate one first 4

“도, 도준아…. 지금… 그게 무슨 말이냐…?”

한참 만에 입을 연 고모는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제 말 그대롭니다. 오세현 대표는 이 일에 관심 없어요. 계약서대로 이행하는 건 오로지 제 뜻입니다.”

“그러니까 네 뜻이 도대체 뭐냐고? 진심이야? 내 회사를 네가…?”

“제가 헛소리한 적 있습니까? 내년부터 순양유통의 주인은 제가 될 겁니다. 물론 유통 산하의 백화점, 호텔, 골프장, 콘도 할인마트 체인. 이 모든 것을 다 가진다는 뜻입니다. 이제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확실히 이해되십니까?”

확실하게 이해하는 건 어려울 것이다. 퍼즐은 스스로 맞춰야 한다. 퍼즐 조각 자체를 만져본 적 없으니 어떤 그림인지 알 도리가 없다.

정물화라면 쉽게 이해하겠지만, 이 그림은 추상화다. 이해하는 데 한참 걸린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단 하나의 사실은 깨달았다.

“너… 너 이 자식, 설마 날… 배신한 거야? 날 이용했어?”

“언제 우리가 같은 편이었던 적이 있던가요? 우리 집안 사람들은 항상 서로를 경계하며 살지 않나요? 배신, 이용…. 이런 단어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고모가 날 동업자라고 여긴 적 한 번도 없는 것처럼요. 단지 이용하려고만 했죠.”

“어린놈의 새끼가, 감히 날 농락해? 가만…. 너 이 자식…. 주식 투자도 다 네놈 계략이었던 거야?”

“네 배나 벌었을 때 팔라고 한 건 접니다. 잊었어요? 다 팔았다고 했고, 저도 모르게 다시 사 모은 건 고모 아니었나요? 무슨 소리 하시는 겁니까?”

“야!”

놀람도, 경악도, 혼돈도 사라졌다. 아니 버렸다, 단지 분노만 남겨두고 내게 쏟아내려 한다.

이 사람의 분노를 내가 다 받아내야 할 필요도 없고 그런 자비로운 마음도 없다.

“소리 그만 지르시고 마음 가라앉히세요. 지금 백화점 그룹의 향방을 결정하는 순간입니다. 순양유통의 대주주로서 진서윤 사장님을 그 자리에 계속 앉혀 둘 것인지 말 것인지, 아직 정하지 않았습니다. 냉정하게 이성을 찾는 모습을 보여주셔도 모자랄 판입니다.”

“야 이 자식아. 계약서대로 해! 그래 봤자 30%야. 대주주? 인정해주지. 하지만 미라클은…. 아니, 너는 아무것도 못 해. 주주는 나눠주는 배당금이나 챙겨.”

고모는 화려한 모피코트를 휘날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가! 이 건물에서 당장 나가! 넌 자격 없어. 일 년에 한 번 주주총회 자리나 지켜!”

“앉으세요. 대주주 말씀 아직 안 끝났습니다.”

“뭐야?”

시뻘건 핏발이 고모의 흰자위를 다 덮었다.

“말씀하셨다시피 30% 지분의 대주주로서 주식 투자로 회사 돈을 날려 먹은 고모를 배임 횡령으로 고소할 생각입니다.”

고소라는 말이 화살처럼 꽂혔는지 고모는 입을 떡 벌렸다.

“대주주가 몸을 움직이면 대표이사나 임원 물갈이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죠. 특히 고모처럼 회사 시스템에도 없이 회사를 주물럭거리며 손해를 끼치고 돈이나 빼돌리는 사람은 하루빨리 사라져야죠.”

정신을 차린 고모는 입술을 삐죽이 내밀며 비웃었다.

“할아버지가 그건 안 가르쳐주디? 우리가 왜 회사 시스템에 없는 사람인지? 바로 이런 때를 위해 그런 거야. 지배는 하되 책임질 일이 없는 존재. 그게 바로 우리야.”

“그런 건 배우지 않아도 압니다. 저뿐만이 아니죠. 전 국민이 알아요.”

“알아도 어쩔 수 없으니 보고만 있는 게지. 너도 그 국민과 다를 바 없어. 어떻게 할 수도 없을걸? 네 말대로, 대주주님께서는 대표이사나 임원이나 갈아치워. 그놈들이 다 책임져야 하니까.”

“과연 그럴까요?”

난 휴대전화를 꺼내 단축번호를 눌렀다.

“네. 접니다. 모두 들어오시죠. 해명해야 할 시점 같습니다.”

“뭐, 뭐야? 누구랑 통화한 거야?”

“책임질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은 어떤 생각인지 들어봐야죠. 고모를 대신해서 책임질 생각이 있는지, 아니면 있지도 않은 죄 뒤집어쓰기보다는 저 살자고 고모를 향해 하나같이 손가락을 가리킬지.”

회의실 바깥에서 발걸음 소리가 울리자 고모의 시선은 문을 향했다.

“그들이 동시에 고모를 지목하면 어쩔 수 없을 겁니다. 아, 그런 걸 배신이라고 하죠.”

이때 회의실 문이 활짝 열리며 임 상무를 비롯한 백화점, 호텔 대표이사들이 줄지어 들어왔다.

그들은 고모의 시선을 피한 채 대회의실 의자에 자리 잡았다.

“쓸데없는 인사말은 건너뛰죠. 여기 계신 분들은 이미 미라클과의 계약서 내용을 잘 아실 테니까요.”

회의실 상석에 앉은 고모의 얼굴에는 핏기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진서윤 사장님이 잃어버린 천사백억, 이 돈의 출처는 바로 여러분이 책임진 회사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진서윤 사장님께서는 여러분의 충심을 굳건히 믿고 계시더군요. 그 돈에 대한 책임은 여러분이 안고 가신다고요. 맞습니까?”

단 한 명도 입을 열지 않았다.

“침묵은 긍정을 뜻합니다. 여러분께서 책임지실 겁니까!”

테이블을 탕 치며 소리치자 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임 상무였다.

“죄송합니다. 사장님. 나이 먹고 노후를 감옥에서 보낼 수는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사장님.”

한 명이 시작하자 나머지 모두도 고모에게 머리를 숙이며 죄송하다는 말만 던졌다.

“다, 당신들….”

이미 사색이 된 고모는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한평생 순양그룹에 몸담고 충성을 바친 사람들이기에 더 믿고 싶지 않은 거다.

“누… 누가 감옥 간다고 그래? 우리 순양을 못 믿어? 저놈이 아무리 난리 쳐도 문제는 없어요. 최악의 경우라고 해도 집행유예로 끝나.”

임 상무가 모두를 대신해서 입을 열었다.

“우리 같은 아랫것들이 집행유예로 끝날 정도면 사장님은 무혐의 받으시겠군요. 아니면 기소유예? 뭐가 두려우십니까?”

“임 상무!”

고모가 소리쳤지만 이미 늦었다. 임 상무는 싸늘한 시선으로 그녀를 노려볼 뿐이다.

“임원들이나 대표이사 먼지까지 털어서 약점 잡으시려는 생각은 그만두세요. 혹시 단 한 명이라도 조사 대상에 오르면 제가 직접 고모를 고소할 것이고, 이분들 전부 증인이 될 겁니다.”

나의 마지막 경고를 끝으로 불편한 침묵이 시작되었다.

모두가 자신들이 가진 주사위를 던졌으니 결과만 기다린다. 그 결과를 알려줄 딜러는 나밖에 없었다.

“여러분들은 회사의 향방이 어디로 흘러가든, 지금의 위치는 절대 변하지 않을 겁니다. 서로 칼을 겨누는 형국이니 함부로 휘두르지 못하지요. 안심하시고 돌아가십시오.”

이들은 허겁지겁 일어나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숨 막힐 듯한 자리를 벗어나는 그들의 뒷모습은 큰 짐을 내려놓은 듯 가벼워 보였다.

텅 빈 회의실에 남은 고모는 정신이 반쯤 나간 듯 천장을 바라볼 뿐이었다.

“자, 이제 상황은 잘 아셨을 테고…. 현실적인 문제를 이야기해봅시다. 며칠 뒤에 돌아올 천사백 어음, 어떻게 막으실 겁니까? 할아버지는 계열 분리가 끝난 회사에 돈 던질 분이 아니시니 막을 방법은 없을 겁니다. 아, 큰아버지들이 계시긴 하지만…. 관둡시다. 저보다 더 독한 분들인데.”

내 말을 듣고 있는지 아닌지조차 알기 힘들 정도로 그녀는 무표정하기만 했다.

슬슬 짜증이 솟구쳤지만, 고모가 판단 가능할 정도까지 정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래야 준비한 계약서의 글자라도 읽을 것 아닌가?

천장을 향하던 시선이 나를 향했을 때 그녀는 이성을 되찾은 듯 보였다.

“고모. 지금부터 제가 손을 내밀 겁니다. 그 손을 잡으시면 우리는 한배를 탄 동지가 될 거예요. 전 자기 살자고 충실한 사람의 뒤통수치는 고모와 다릅니다.”

“내가 네 밑에서…? 감히 그딴 개소리를 내게?”

“오세현 대표를 보세요. 그분이 제 밑의 사람으로 보입니까? 동등해 보이지 않던가요?”

눈만 깜빡거리는 고모는 내 말의 의미를 알아채는데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그, 그럼… 미라클 인베스트먼트의 실질적인 대표이사가 너란 말이냐?”

“그보다 좀 더 크게 보세요. 95% 이상의 주식을 가진 대주주이며 이 회사가 운용하는 자금의 70% 이상이 제 돈입니다. 실질적인 대표이사는 오세현 대표가 맞죠. 전 전문경영인을 머슴이나 아랫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소유만 할 뿐, 경영은 온전히 맡기죠.”

막대한 펀드까지 내 돈이라는 걸 알려주자 회사를 뺏어버리겠다고 말했을 때보다 더 놀랐다.

“이제 제 눈을 다시 보고 결정하세요. 아진그룹을 인수하고, 순양자동차를 먹은 게 제 작품이라는 말입니다. 그게 2년 전 제가 대학교 신입생 때였어요. 이런 나를 진짜 적으로 삼고 싶으세요? 아니면 동지로 하고 싶으세요?”

“도, 도대체 넌…?”

“제 손잡으세요. 고모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절 못 이깁니다. 차라리 제 손잡고 재벌가의 일원으로 누릴 수 있는 삶을 계속하세요. 큰아버지들은 절대 이런 기회를 고모에게 안 줍니다. 아시죠?”

“이 사실을 아버지도 아시니? 네 할아버지 말이야.”

“유일하게 제 본래의 모습을 아시는 분입니다. 그러니까 자동차를 순순히 내어주신 겁니다. 아시겠어요? 할아버지가 절 총애해서 밀어주는 게 아니라 우리 집안에서 유일하게 순양그룹을 믿고 맡길 만하기 때문에 총애하시는 겁니다.”

“서, 설마…. 벌써?”

말을 잇지 못했지만, 그녀가 알고 싶은 건 뻔했다.

“할아버지도 손자보다는 아들을 더 사랑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금융 부분 정도만 주시는 거고요. 하지만 할아버지는 이미 짐작하시고 계실 겁니다. 언젠가는 제가 전부 다 차지한다는 것을요.”

고모의 머릿속에서 추상화의 본모습이 슬슬 그려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표현하기 힘들었던 안갯속의 그림자가 실체를 드러내니 충격을 넘어 망연자실한 모습을 보였다.

어쩌면 포기하는 중인지도 모른다.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졌을 때 밧줄 하나를 내려주면 고모와의 지루한 싸움은 끝난다.

“전 숨김없이 모든 걸 말했으니 고모의 선택만 남았습니다. 제 손을 거부하시면 감옥에서 십 년은 썩게 만들어드리죠. 천사백억의 횡령 사실이 새천년의 첫 뉴스가 될 겁니다.”

그녀가 단 하나의 사실만 알기를 바랐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할아버지가 고모를 도와주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 고모보다 더 사랑하는 순양그룹을 지탱할 유일한 사람이 나라고 믿고 있다는 사실.

“내가 네 손을 잡으면… 어떻게 되지?”

“절 대신해서 백화점 그룹을 이끌게 해드리죠. 오세현 대표가 절 대신해서 미라클을 이끌 듯이 말입니다.”

“지, 지금처럼?”

“임원 인사는 제가 최종 결정합니다. 지금처럼 회사 자금을 마음대로 쓰지 못할 거고요. 아, 호화로운 생활은 영위하게 해드리죠. 특별한 실수만 없다면.”

동아줄에 꿀을 좀 발라 놓는 것도 빠른 선택을 도와주는 방법이다.

“내가 뭘 해야 하지?”

이제 계약서 글자 정도는 읽을 수 있을 만큼 정신이 든 것처럼 보인다.

난 준비한 서류를 내밀었다.

“핵심만 말씀드리죠. 고모가 보유한 순양유통 주식 중 일부를 천사백억에 사겠습니다. 그럼 제가 55%의 최대 주주가 됩니다.”

딴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거부하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안다.

1차 부도 그리고 배임 횡령. 마지막으로 법정 구속.

실룩거리는 얼굴의 고모에게 펜을 내밀었다.

“제 손을 잡으세요. 그럼 진양철 회장의 딸로서 누릴 수 있는 건 하나도 잃지 않을 겁니다.”

그녀의 떨리는 손이 펜 끝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