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Youngest Son of Sunyang

[256] Alliance Fato 1

하지만 입 밖으로 낼 수 있는 말도 있다.

“큰아버지께서 동조하지 않으신다면 다음 주 이사회는 열리지 않을 수도 있겠죠?”

“동조? 넌 내가 이 일의 종범(從犯)이라고 생각하는구나. 장남이 시키는 대로 끌려가는 동생, 그렇게 생각하는 거냐?”

“그러길 바랍니다.”

“이번에도 좀 미안하긴 한데, 내가 나서면 나섰지 다른 사람 뒤따르는 짓은 못 해.”

“음…. 이사회는 무조건 열리겠군요.”

“그래. 결과도 바뀌지 않을 거야. 이사회가 끝나면 넌 순양그룹에서 네 지시를 따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다.”

확신에 찬 그의 말에 난 쓴웃음을 지었다.

“제가 큰아버지께는 눈 밖으로 날 짓은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혼자만의 착각이었군요.”

“네가 손자면서 그룹 지분을 물려받았을 때, 모든 사람의 눈 밖에 난 거다. 다른 손자들처럼 통장이나 집문서 하나 받았다면 내가 널 그룹의 중요한 자리에 앉혔을 거야. 네 자질은 그냥 썩히기에는 참 아까우니까 말이다.”

진정성이 듬뿍 묻어나는 말이다.

“똘똘한 조카까지만 허락한다, 경쟁은 안 된다. 이 말씀이군요.”

“경쟁?”

진동기 부회장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그 단어는 30년 뒤의 너라면 인정하마. 지금의 넌 아무리 뛰어나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어린애다. 경영은 숫자가 아냐. 이 말의 진의를 알려면 한참 더 배워야 할 거다.”

“얼마나 더 배워야 할까요?”

“이미 말했다. 30년은 더 배워라.”

난 머리를 슬쩍 긁으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곤란하군요. 전 배우는 건 앞으로 3년 정도로 끝낼 생각이었는데…. 서른이면 배운 걸 써먹어야 할 나이 아니겠습니까?”

“뭐, 그건 네가 판단할 문제고. 물어야 할 건 다 물었지? 그럼 이만 가봐라. 참, 네 사무실은 다음 주부터 다른 사람이 쓸 거다. 온 김에 짐 빼고 정리하는 게 좋겠지?”

진동기 부회장은 손을 들어 문을 가리켰다.

난 그에게 머리를 숙이고 인사하기 전 마지막 말을 남겼다.

“오늘 저녁 뉴스를 놓치지 말고 꼭 보십시오. 제 대답을 들으실 수 있을 겁니다.”

뉴스라는 말에도 그는 콧방귀를 꼈다.

“조카 재산을 뺏는 큰아버지를 성토라도 하려고? 너라면 기자들이 벌 떼처럼 모여들겠지. 꽤 핫한 뉴스거리는 될 테니까 말이야. 하지만…. 아니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 그 정도라도 해서 네 화가 좀 풀리면 다행이고.”

“제가 고작 화풀이 정도 하려고 뉴스에 나오겠습니까?”

웃으며 인사를 하자 그가 조금은 당황한 것이 느껴졌다.

둘째 큰아버지는 아마도 오늘 저녁 식사를 건너뛰게 될 것이다.

* * *

“서울중앙지검 형사부 검사입니다. 원래 특수부 출신인데 물불 안 가리고 날뛰다가 형사부로 떨어졌습니다. 다음 정기인사 때 지방 발령이 확실한 놈이라 사직서를 만지작거리는 중입니다.”

장도형 부사장은 인사 파일을 건네며 설명했다.

“누가 소개한 겁니까?”

“지금은 변호사인 제 고등학교 선배가 특수부 시절에 이 친구를 데리고 있었습니다. 최근, 몇 번이나 찾아와 변호사 개업을 심각하게 생각 중이라며 고민을 털어놓았답니다.”

“일단 들이받고 보는 스타일이군요.”

인사 파일의 주인공이 만진 사건을 보니, 이런 검사를 데리고 있었던 부서장도 머리 꽤나 아팠을 것 같았다.

하지만 단순한 정의감만으로 움직인 놈도 아니다.

건드린 사건들이 전부 굵직하다. 대어를 건드려야 실패하더라도 출세한다는 걸 읽은 놈이 분명하다.

“하지만 성공한 케이스도 없어요. 전부 흐지부지 끝나버리니 오명만 자꾸 쌓인 겁니다.”

“대충 언질은 줬죠?”

“네. 옷 벗고 검찰청 떠나는 데 적절한 사건이라고 생각한답니다.”

자동차는 서울 강북의 좁은 길을 요리조리 달렸다. 지금 내 뒤에 붙은 큰아버지들의 눈과 귀를 떼어내려면 복잡한 시내를 몇 바퀴 도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다.

꼬리를 따돌리고 다시 경기 북부의 한적한 고깃집으로 달렸다.

가든이라고 붙은 이름을 보니 아주 오래된 식당인 게 확실했고 탁 트인 정원까지 갖춘 곳이니 숨어서 사진 찍는 놈은 염려할 필요가 없었다.

저격수가 기다리는 별실의 문을 열자 앉아 있던 두 사람이 벌떡 일어났다.

나이 많은 사내는 장도형 부사장의 친구라는 변호사일 게 뻔하고 긴장한 표정의 사내가 바로 내가 필요한 저격수일 것이다.

“아이고, 이런 유명한 분을 뵙게 되다니 영광이올시다. 허허.”

너스레를 떨며 명함을 꺼내는 중년 사내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대신 장도형 부사장에게 말했다.

“부사장님. 긴한 이야기를 해야 하니 딴 방에서 식사하십시오. 인사는 나중에 하죠.”

“아, 네.”

명함을 꺼내던 변호사는 장도형의 눈짓에 황급히 밖으로 나갔다. 이 기회에 재벌가와 엮였으면 하는 기대가 있었던지 나가는 발걸음이 무거워 보였다.

“앉읍시다. 검사님.”

“아, 네.”

삼십 대 중반을 향해 달려가는 사내는 그리 초조해 보이지도 않았고 긴장한 것 같지도 않았다.

마음 비운 게 확연히 드러났다.

“곧 검찰을 떠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의 앞에 놓인 술잔에 소주를 따르며 말했다.

“아, 네. 그렇게 됐습니다.”

“그 조직이 튀는 사람을 가만히 두고 보지 못하죠. 군대보다 더하다고 들었습니다.”

“진도준 씨도… 아, 이거…. 뭐라 불러드려야 할지….”

“괜찮습니다. 어차피 대학 후배 아닙니까? 편히 부르세요.”

그는 이마를 탁 쳤다.

“아차차. 깜빡했어요. 우리 과 출신이죠? 재벌 3세가 법대 출신이라는 게 흔한 일이 아니어서 생각 못 했습니다.”

“저도 익숙하지 않아요. 입학만 했지 제대로 공부한 적이 없어서…. 흐흐.”

역시 우리나라는 학연이, 그중에 대학이 최고다. 지연은 계층 간의 구분이 없어 흐릿하고 고등학교는 무작위 추첨이라 우월함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반가운 인연이 아니다.

하지만 대학은 비슷한 부류끼리 모이다 보니 다른 어떤 곳보다 끈끈함이 있다.

조금 전까지 불편한 기색이 역력하던 이 사람도 대학 후배라는 인연 하나만으로 갑자기 편한 표정으로 변했다.

“그래도 우리 후배님은 참 대단해요. 그쪽 애들은 집안만 믿고 판판이 노는 애들이 대부분인데, 참! 성적도 어마어마했죠?”

재벌과는 맺힌 게 많은 사람이라 그런지 곱지 않은 말부터 쏟아낸다. 기업 비리 파헤치다 윗선의 압력으로 수사 중단한 적이 많은 사람답다.

“옛이야기만 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합니다. 소주 마시며 모교 이야기하는 건 이번 일 끝나고 나서 하는 걸로 미루죠.”

그는 손에 든 술잔을 내려놓았다.

“서두르는 걸 보니 급하시군요.”

“네. 오늘 저녁 뉴스에 때려야 하니까요.”

“오늘?”

“기자 동원은 전화 한 통이면 끝납니다. 대본도 나와 있는데 배우가 없어요.”

“캐스팅은 끝난 거 아닙니까? 두둑한 개런티를 보장받고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만.”

그가 찡그린 얼굴로 말했지만 난 미소를 지었다.

“감독 입장에서 연기력은 확인해야 하니까요.”

난 서류 뭉치를 그에게 쓱 밀었다.

“대본 먼저 보시죠. 오디션은 그 후에….”

주연 배우 후보인 검사는 후다닥 서류를 펼쳤다.

한 장 한 장 꼼꼼히 읽어 가던 그는 눈을 빛낼 때도 있었고 답답한지 물을 들이켤 때도 있었다.

고기 한 점 올리지 않은 숯불의 열기가 식을 때쯤 서류를 덮었다.

“누군지 빠졌군요.”

“그 누구가 누군지를 찾아내는 게 검사가 할 일이죠.”

“찾아내야 합니까?”

이미 대본의 끝이 어디로 가는지 짐작한 걸 보니 머리 회전은 쓸 만했다.

“아뇨. 범인이 누군지 모른 체 끝나는 이야기니까요.”

그는 손가락 사이의 담배를 슬쩍 흔들며 양해를 구했다.

“얼마든지.”

머리를 끄덕이자 그는 담배 연기를 한껏 빨아들였다.

“천억 원대의 해외 비자금도 문제지만,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외국 기업을 사들인다는 명목으로 돈을 빼돌렸으니…. 죄질이 악랄합니다.”

곧 옷 벗을 검사지만, 순순한 정의감에 불을 지를 만큼 깊은 분노를 느꼈나 보다.

“횡령, 배임, 재산 국외 도피…. 50억 이상이면 최하 10년인데….”

“최고 무기까지 가능하죠. 게다가 공소시효가 10년이니 아직 3년 남았습니다.”

“법대에서 마냥 놀지는 않았군요. 잘 아시네요.”

“그 자료 정리하면서 확인하느라 오랜만에 법전을 좀 뒤졌습니다. 다 까먹은 지 오래됐어요. 하하.”

검사는 함께 웃을 여유는 없어 보였다. 자신의 일이 이 범죄를 끝까지 파헤치는 게 아니라 군불만 피우고 끝낸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마치 고기는 굽지 않고 열기가 식어버린 이 식탁 위의 숯불처럼.

“후배님. 내가 이거 터트리면 수습하기 어려울 텐데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돈의 주인은 순양그룹 사람이 확실한 거 같은데…? 내부 자료가 아니면 이런 디테일은 못 구하거든.”

그의 눈에 비친 호기심을 읽었다. 많이 알면 다친다는 진리를 모를 리 없건만 호기심은 위험을 잊어버릴 정도의 강력한 감정이다.

“마무리는 제가 알아서 합니다. 선배님은 도화선에 불만 붙이세요. 그리고 쓸데없는 넘겨짚기는 서로를 불편하게 합니다. 아실 만한 분이 왜 이럽니까?”

“그, 그런 게 아니라 타다가 꺼지면 불붙인 난 완전히 끝장이라서….”

후배님이라며 편한 모습을 보였던 그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말을 더듬었다.

“각오하고 나오신 것 아닙니까? 뒤는 책임진다는 말 듣지 못했어요?”

“아, 물론 들었지만….”

“그럼 지금 결정하세요. 바쁜 사람 붙잡고 눈알 굴리지 말고!”

언성을 높이자 자세를 낮추는 모습이 확연히 드러났다.

힘을 쥐고 흔들어 본 자는 자신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진 자의 태도에 민감하다. 대번에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공무원 퇴직금이 얼만지 모르겠지만, 평생 돈 걱정 안 해도 될 만큼 책임지는 데 앞일을 걱정하는 겁니까?”

“좋습니다. 후배님만 믿고 검사 신분증 제대로 한번 써보죠, 뭐.”

그는 큰소리치며 서류를 챙겨 들었다.

“기자회견에서 꼭 강조해야 할 부분은….”

“후배님. 주연 배우에게 믿고 맡겨봐요. 이런 일 한두 번도 아니고, 중요 포인트는 내가 더 잘 짚을 겁니다.”

자신감을 확 드러내는 그를 보며 웃으며 소주병을 들었다.

“잘 좀 부탁합니다. 선배님.”

그도 웃으며 잔을 내밀었고 난 보통의 후배처럼 공손히 두 손으로 잔을 채웠다.

* * *

“저녁 뉴스에 나올 수 있도록 차질 없이 준비하세요.”

“기자들은 이미 대기 중이고 보도국도 적극 협조하기로 했습니다. 최소 2분 이상 나올 것이며 가능하면 첫 꼭지로 배치하겠다는 말까지 들었습니다.”

다시 서울로 돌아가는 차 속에서 장도형 부사장은 오늘 준비한 것을 차분히 보고했다.

“검찰총장 미팅도 문제없겠죠?”

“네. 처음엔 영문을 몰라 주저했지만, 돌아가신 회장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니 선뜻 응하더군요.”

“수고했습니다.”

장도형은 내 눈치를 슬쩍 살피더니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뭡니까? 이건?”

“실장님께서 이사회를 무산시키시려는 것 같아 미리 입수한 명단입니다.”

어떤 명단인지 알 것 같다.

“이사회 때 부회장님의 수족으로 임명될 사람들이군요.”

순양금융그룹의 새로운 대표이사와 임원들의 조직도가 한눈에 들어왔다.

“네. 좀 괘씸한 마음이 드는 놈들도 있더군요.”

“이번 일이 잘된 면도 있네요. 흑백을 명확히 가릴 수 있으니 차제에 싹 정리합시다.”

“네. 전부 해임….”

“아뇨.”

난 머리를 짧게 흔들었다.

“해임으로 끝내면 안 됩니다. 누가 보더라도 눈살을 찌푸릴 정도의 불명예를 안겨줘야 합니다. 모두 지방 지점이나 고객센터로 발령 내고 감사팀도 돌려서 좁쌀만 한 잘못이라도 무조건 찾아내도록 하세요. 사표를 내더라도 곱게 보내주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이를 악문 내 모습에 장도형은 세차게 머리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