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alhalla Saga

Chapter 7 - Valkyrie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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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가 끝났다.

발할라 전사들은 자신들의 두 배가 넘는 숫자의 놀들을 완전히 격파했다.

설원 위에는 놀들의 시신과 붉은 피가 가득했다. 거인이 무너지는 광경을 목격한 놀들은 전의를 상실했다. 용맹하게 싸우는 대신 눈치를 보며 도망치기 바빴고, 결국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너나 할 것 없이 무질서한 도주를 시작했다.

전투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는 순간은 양 군대가 정면에서 충돌할 때가 아니었다. 도망치는 한 쪽을 다른 한 쪽이 추격하며 일방적인 학살극을 벌일 때였다.

발키리 라스그리드는 설원 위에 자세를 낮추고 앉아 지평을 바라보았다. 새하얀 비늘로 만들어진 용의 날개옷은 설원과도 잘 어울렸다.

“승리했다. 그야말로 대승이다.”

발키리 레긴레이프가 흡족한 얼굴로 말했다. 발키리들 가운데서도 무척이나 고귀한 혈통을 타고난 그녀는 언제 어디서나 당당하고 아름다웠다.

“놀들의 시체를 치우는 데만 한 세월이 걸리겠군.”

농담처럼 말한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누군가 소식을 퍼트리기라도 했는지 까마귀 떼가 모여들고 있었다.

라스그리드도 고개를 들어 까마귀 떼를 보았다. 그 사이에는 후긴이 보이지 않았다. 벌써 다른 전장으로 떠나 버린 것 같았다.

“전사들은 블랙 포트리스 안으로 이동했다. 각 부대의 지휘관들이 사상자 수습을 시작했다.”

발키리 잉그리드가 조용히 다가와 라스그리드와 레긴레이프에게 말했다. 전령 역할에 특화된 그녀의 발걸음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라스그리드는 숨을 길게 토했다. 천천히 일어서며 레긴레이프와 잉그리드를 돌아보았다. 두 발키리들의 너머에는 머리 없는 거인의 시신과 성벽 일부가 크게 손상된 블랙 포트리스가 보였다.

“거인이 나타났다.”

최하급이지만 거인은 거인이었다.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블랙 포트리스는 함락되고 수많은 발할라 전사들이 육신을 잃었으리라.

라스그리드의 눈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는 어제와 오늘 일어난 일들을 천천히 돌이켜 보았다.

드워프 광산에 스트라고스가 나타난 일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사악한 존재들은 운트 냄새를 찾아 온 세상을 방황하는 거인의 사냥개들이었다. 언제 어디서 나타난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거인은 달랐다.

어째서 거인이 나타났을까. 놈들은 왜 블랙 포트리스 같은 변방 지역에 거인을 내보낸 것일까.

노림수, 수면 아래의 계획, 대국적인 전략.

‘어쩌면 단순한 이유일지도.’

변방에조차 거인이 나타날 정도로 놈들의 공세가 강해졌다. 라그나로크의 단계가 그만큼 더 진행되었다.

라스그리드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레긴레이프는 이복자매가 머릿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척이나 잘 알았다.

“이미 보고를 올렸다. 그것으로 모든 책임이 끝나지는 않지만, 최소한의 책임은 다한 셈이지. 그러니 오늘 하루만이라도 거인에 대한 것은 잊자. 그보다 더 중요한 일들이 있지 않나?”

레긴레이프가 씩 웃자 라스그리드는 무슨 말이 돌아올지 뻔히 알면서도 입을 열어 물었다.

“어떤 일들이지?”

“전사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것이지. 오늘의 승리를 기뻐하며 그들과 함께 술잔을 나누자. 나의 자매여.”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전사들은 오늘 기대 이상의 활약을 펼쳤다. 나는 내가 그들을 돕고 인도하는 발키리라는 사실에 자긍심을 느낀다.”

잉그리드가 말을 보탰다. 목소리와 눈빛에 열기가 어려 있었다.

“자, 돌아가서 술잔을 들자. 오늘은 빼지 않기다, 라스그리드.”

레긴레이프가 라스그리드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호쾌하게 웃었다. 잉그리드도 작게 웃었고, 결국엔 라스그리드 역시 작게나마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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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지고 밤이 찾아왔다. 크게 피운 제단의 불길이 어둔 밤을 살라먹을 기세로 활활 타올랐다.

제단 앞에 세운 높은 단상 위에 발키리 레긴레이프가 섰다. 이천 명이 넘는 발할라 전사들이 저마다 편한 자세로 서서 그녀를 바라보았고, 레긴레이프는 꽉 움켜쥔 주먹을 크게 휘둘렀다.

“용맹한 전사들이여! 발할라의 용사들이여!”

레긴레이프의 목소리는 천둥을 연상시킬 정도로 컸지만 귀를 아프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호탕하면서도 아름다운 목소리는 전사들의 귀를 즐겁게 했다.

“그대들의 용기에 경의를 표한다, 그대들의 기량에 찬사를 보낸다! 나 발키리 레긴레이프는 오늘 그대들과 함께하고 있음을 영광으로 생각한다!”

“으아아아!”

“발키리!”

“레긴레이프!”

전사들이 열정적인 연호로 응답했다. 제단의 불길에도 지지 않을 열기였다.

레긴레이프도 웃었다. 그녀는 연극을 하듯 과장스런 몸짓을 보이며 애석한 표정을 지었다.

“전사들이여! 그대들 모두의 술잔을 채워주지 못 하는 우리의 부덕을 용서하길 바란다. 그대들은 너무 많고, 우리는 고작 셋이니 어쩔 수가 없구나! 첫 잔을 드는데 몇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지 않은가!”

별 것 아닌 농담이었지만 전사들은 모두 왁자하게 웃었다. 레긴레이프는 망토 자락을 크게 휘둘렀다.

“하지만 우리도 풍류를 안다. 오늘 가장 큰 활약을 한 두 사람의 술잔을 내 자매 라스그리드가 채워준다고 한다! 다른 누구도 아닌 얼음공주 라스그리드가 말이다!”

“오오오!”

“라스그리드!”

전사들이 열광했고, 얼음공주라는 호칭에 라스그리드가 미간을 찌푸렸다. 단상 가장 앞에 미리 나와 있던 태호는 웃음을 참기 위해 이를 악물어야만 했다.

“토르의 군단 소속, 전사 브라키!”

“일인군단!”

“무적의 전사!”

레긴레이프가 호명하자 전사들이 브라키의 별명을 외쳐댔다. 브라키는 껄껄껄 시원하게 웃으며 단상 위에 올랐다. 발할라 전사들 가운데서도 거대한 그가 눈앞에 서자 레긴레이프는 해맑은 감탄을 표했다.

“정말 크구나!”

“정말 크다오!”

레긴레이프는 문득 까치발을 해보았다. 하지만 그래봐야 브라키의 가슴에도 머리가 닿지 않았다.

“레긴레이프.”

그쯤 하라는 듯 라스그리드가 작고 차갑게 말했다. 레긴레이프는 그런 라스그리드를 놀리듯 브라키와 장난스런 눈인사를 나눈 뒤 옆으로 크게 할 걸음 이동하며 소리쳤다.

“이둔의 군단 소속, 전사 태호!”

“발키리가 면회 온 전사!”

“발키리를 탄 전사!”

“이둔!”

다시 전사들이 열광했다. 묘한 호칭에 라스그리드는 재차 미간을 찌푸렸고, 태호는 헛기침을 토하며 레긴레이프 앞에 섰다.

브라키가 씩 웃으며 태호에게 말했다.

“멋진 날이다.”

“그러게요.”

오늘 처음으로 나눈 대화였지만 두 사람은 그 이상의 친근함을 느꼈다. 생사의 기로를 함께한 전우끼리 느낄 수 있는 감정이었다.

레긴레이프는 미리 준비한 뿔로 된 술잔을 브라키와 태호에게 하나씩 넘겨주었다. 그 같은 과정이 끝나자 라스그리드는 숨을 크게 한 번 내쉬더니 술병을 들고 두 사람 앞에 섰다.

“전사 브라키, 내 술을 받아주겠나?”

“여부가 있겠소?”

브라키는 의외로 예의바르게 말하더니 라스그리드가 술잔을 채우기 쉽게 자세까지 낮춰주었다. 맑고 붉은 술이 술잔을 금방 채웠다.

“전사 태호.”

다음은 태호의 차례였다. 브라키와 태호 사이에 전우의 교감이 있었듯이 라스그리드와 태호 사이에도 교감이 있었다. 라스그리드는 술잔을 채우며 엷은 미소를 그렸다.

“감사합니다.”

라스그리드는 브라키와 태호에게 눈인사를 건넨 뒤 한 걸음 물러섰다.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던 레긴레이프는 호탕하게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자, 전사들이여! 술잔을 들어라! 다 같이 오늘의 승리를 기뻐하자!”

브라키와 태호는 뒤돌아서서 전사들을 보았다. 이천 명이 넘는 인원이 동시에 술잔을 드는 모습은 가슴을 벅차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아스가르드와 아홉 세계를 위하여!”

“위하여!”

다 같이 술을 마셨다. 무척이나 독한 술임에도 웃음이 절로 나왔다.

“역시 잘 마시는군!”

“그쪽도요.”

브라키가 태호의 등을 손바닥으로 팡 소리가 나게 쳤다. 여간한 전사라면 이 가벼운 인사만으로도 바닥에 나자빠졌겠지만 태호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역시!”

브라키가 다시 웃었고, 태호는 새삼 체력에 룬을 투자한 보람을 느꼈다. 그런 두 사람에게 레긴레이프가 술병을 내밀었다.

“내 술도 한 잔씩 받게.”

“하루에 발키리의 술을 두 번이나 받다니, 살 맛 나는구려.”

브라키가 으흐흐 웃자 씩 웃은 레긴레이프는 돌연 장난스런 표정을 지었다.

“전사 태호에게는 익숙 하려나?”

“아뇨, 저도 기쁩니다.”

실제로 헤다에게는 아직 술을 받아본 적이 없었으니까.

태호와 브라키, 레긴레이프는 다시 건배한 뒤 술잔을 비웠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었다.

우르르하는 땅울림과 함께 성문이 열렸다. 그 커다란 소리에 전사들은 일제히 돌아섰고, 이틀 전에 그러했듯이 커다란 성문 아래 선 발키리를 마주하였다.

발키리 잉그리드. 그녀는 이번에도 당당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전사 이태호!”

“예!”

태호가 대답했다. 전사들은 숨을 죽였고, 고조되는 분위기에 덩달아 긴장한 잉그리드가 약간의 시간을 두고 입을 열었다.

“면······”

“면회다!”

잉그리드보다 빠르게 전사들이 소리쳤다.

“으하하하하하!”

“이둔!”

“이둔의 전사!”

“이둔의 발키리!”

질투나 시샘 따위가 아니었다. 아예 이 상황 자체를 즐기는 듯한 전사들이었다.

이천여 명이 동시에 지른 외침에 자신의 말을 빼앗긴 잉그리드는 멍한 표정을 지었고, 등 뒤에서 빼꼼 고개를 내민 헤다는 더욱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뭐, 뭐야?”

이틀 전의 일 덕분에 이미 각오는 한 상태였다. 하지만 각오한 것 이상의 일이 벌어졌다.

“면! 회! 다!”

전사들이 소리쳤다. 처음에는 맞지 않던 목소리가 이내 하나가 되어 요새를 뒤흔들었다.

“이둔!”

“나도 이둔의 군단에 가고 싶어!”

“으하하! 그랬다간 토르께서 용서 안 하실 거다!”

“이둔을 위하여!”

“아름다운 생명의 여신을 위하여!”

“발키리 예쁘다!”

발할라의 전사들과 아스가르드의 신들 사이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그들은 모두 용맹하고 위대한 전사들을 사랑했다.

오늘 전투에서 발할라 전사들은 태호의 활약을 보았다. 때문에 시샘하고 질투하기 보다는 동경하고 찬양했다.

발키리가 면회 온 전사.

발키리의 면회 신청을 받을 자격이 있는 전사!

전사들이 헤다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마치 모세가 홍해를 가르듯이 전사들 사이에 일렬로 된 길이 열리는 모습은 실로 장관이었다.

발키리 잉그리드는 허탈하게 웃더니 옆으로 비켜섰고, 더 이상 잉그리드의 등 뒤에 숨을 수 없게 된 헤다는 얼굴을 붉힌 채 전사들 사이를 가로질렀다. 태호가 서 있는 단상에 오르자마자 빠르게 말했다.

“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활약을 했다는 이야기는 대충 들었다. 하지만 정말 대충일 뿐이었다. 잉그리드는 직접 들으라고만 했으니 말이다.

태호는 당황한 헤다의 모습에 같이 당황하는 대신 오히려 즐겁게 말했다.

“좋지 않아요? 다들 이둔님의 이름을 외치는데.”

들어보라는 듯 태호가 전사들을 가리켰다. 실제로 전사들은 이둔의 이름을 연호하고 있었다.

“좋죠?”

“조, 좋아.”

헤다는 이둔의 발키리였으니까. 전사들이 이둔의 이름을 연호하는 광경에 가슴이 벅차기라도 했는지 헤다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그러지말고 손이라도 좀 흔들어줘요.”

“이, 이렇게?”

헤다가 손을 작게 흔들자 전사들이 더욱 열광했다.

“이둔!”

“이둔의 발키리!”

자꾸 하다보면 뭐든 느는 법이었다. 처음에는 소극적이던 헤다도 어느새 활짝 웃으며 손을 크게 흔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발키리가 면회 온 전사!”

“발키리를 탄 전사!”

“응?”

헤다가 눈을 깜박였다. 발키리가 면회 온 전사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후자는 아니었으니까.

“저게 무슨 소리야?”

헤다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태호는 이번에야말로 당황했고, 브라키는 호탕하게 웃어댔다. 브라키와 함께 웃던 레긴레이프는 헤다에게 다가서더니 시원하게 말했다.

“말 그대로다. 전사 태호가 라스그리드 위에 탔다. 그래서 발키리를 탄 전사라 불리는 거다.”

지원사격이 아닌 아군사격. 그것도 오인이 아닌 고의.

라스그리드가 길고 긴 한숨을 내쉬는 가운데 헤다의 표정이 더욱 기묘하게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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