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alhalla Saga

Chapter 13 - Traces of Great War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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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파편]

[지옥견 가름]

마치 피처럼 붉은 글씨가 선명했다. 특별한 약점은 보이지 않았지만 놈의 특성이라 생각되는 키워드들이 연달아 보였다.

[반영체]

[수비적]

시리가 날갯짓을 했다. 조금 더 고도를 높였고, 그 순간 휘청거렸다.

“시리 대장?!”

시리는 대답하는 대신 필사적으로 몸을 가눴다. 일정 고도 이상을 올라간 순간 거센 마력의 흐름이 전신을 난도질하듯 훑고 지났기 때문이다.

가름은 수비적이라는 특성을 드러내듯 제자리에 서서 추락하는 태호와 시리를 노려만 보았다. 태호는 용을 부리는 자를 사용해 시리를 최대한 보조하려 했지만 사가의 힘이 제대로 통하지 않았다.

시리가 결국 지면에 착지했다. 하지만 완벽한 안착은 아니었다. 겨우 추락만 면한 수준이었다.

그리고 태호는 어째서 용을 부리는 자가 제대로 통하지 않았는지 깨달았다. 지면에 착지한 것은 한 쌍의 날개를 가진 큰 늑대가 아니라 시리 본연의 모습이었다.

얼결에 시리를 깔고 앉은 꼴이 된 태호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시리를 부축했다. 시리는 앓는 소리를 내며 숨을 골랐다.

“비행은 무리 같다.”

헬리콥터처럼 호버링을 할 수 있다면 모를까, 아무리 사가의 보조가 있다 해도 계속해서 저공비행만 하는 것은 무리였다. 더욱이 하늘을 뒤덮은 거센 마력의 흐름이 심상치 않았다. 닿자마자 용의 날개옷에 걸린 마법의 힘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어설프게 비행을 시도했다가는 더 아픈 꼴을 당할 수 있었다.

태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 뒤 가름과의 거리를 재었다. 시리 역시 차라리 잘 되었다는 얼굴로 석궁을 들어올렸다.

가름은 파수견답게 경계 태세를 취한 채 이쪽을 노려만 보았다. 덩치가 크긴 했지만 일단 생긴 것 자체는 개였기 때문에 이빨과 발톱만 조심하면 될 것 같았다.

“간다.”

시작을 알린 것은 시리였다. 앞으로 쏘아지듯 나아가며 거의 뿌리듯 화살을 발사했다.

[사가 : 마녀의 화살은 표적을 놓치지 않으니]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는 것 같던 화살의 궤적이 크게 휘어지더니 마치 새매처럼 가름의 눈을 노렸다.

명중했다. 하지만 노련한 사냥꾼인 시리는 그 순간 알 수 있었다. 맞추긴 했지만 그것뿐이었다. 시리의 화살은 그대로 가름의 몸을 꿰뚫고 지나 지면에 박혔다.

반영체.

가름이 돌진했다. 크게 벌린 입에서 불길이 쏟아져 나왔다.

츠화악!

지면을 휩쓰는 불꽃은 누가 봐도 강렬했다. 시리는 바닥을 굴러 몸을 피한 직후 연달아 화살을 몇 발 더 쏘아봤지만 결과는 같았다. 가름의 공격은 이쪽에 통했지만, 이쪽의 공격은 가름에게 통하지 않았다.

“태호!”

시리가 소리쳤고, 태호는 이해했다. 전사의 질주를 사용해 돌진 속도를 높여 단숨에 가름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움켜쥔 처형인의 검을 휘둘렀다!

츠팍!

신의 힘이 실린 검이 가름의 다리를 베었다. 흠칫 놀란 가름은 뒤로 크게 물러났고, 놈의 오른쪽 다리에 석고를 잘라낸 것처럼 파인 상처가 생겼다.

예상대로 신의 힘은 통했다. 하지만 가름은 컸다. 더욱이 놈이 경계하기 시작했으니 이런 자잘한 상처로는 끝이 없었다.

“태호!”

시리가 다시 태호를 불렀다. 늑대의 마녀를 사용해 늑대로 화한 그녀는 순식간에 태호의 곁에 서더니 얼른 타라는 듯 눈짓을 했다.

랜스 차징을 하자.

의도가 명확한 눈빛이었지만 태호는 순간 멈칫하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대로 가름을 노려보며 시리에게 말했다.

“시리 대장, 조금만 시간을 끌어줘요.”

시리는 당황했지만 되물을 틈이 없었다. 상처 때문에 성이 난 가름이 다시 달리며 불꽃을 내뿜었다. 태호와 시리는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져 불꽃을 피했다.

이를 악문 시리는 태호를 돌아보는 대신 가름을 노려보았다. 자신이 아는 태호는 전투 중에 허튼 소리를 하는 자가 아님을 기억하며 발톱을 날카로이 했다. 저주의 힘을 지닌 늑대의 마녀라면 반영체인 놈에게도 타격을 가할 수 있을 터였다.

“크헝!”

크게 짖은 시리가 지면을 박찼다. 덩치가 가름의 4분의 1도 채 못 되었지만 속도는 더 빨랐다. 달려드는 가름의 이빨을 교묘하게 피하더니 그대로 도약해 가름의 목을 물었다.

예상대로 공격이 통했다. 하지만 놈의 가죽이 너무 두꺼웠다. 가름은 시리를 떨쳐내고자 크게 몸을 흔들었고, 시리는 죽을힘을 다해 버텼다.

‘아직인가!’

시리는 마음속으로 소리쳤다. 하지만 태호는 응답하거나 지원 공격을 하는 대신 엉뚱한 방향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가름이 처음 나타났던 장소였다.

[가름의 영혼 파편]

백금색 글씨가 떠 있는 발톱같이 생긴 무언가.

땅에 박혀 있는 그것에 태호가 손을 댄 순간 가름이 발작하듯 고개를 쳐들었다.

“크허엉!”

가름이 노성을 토하며 태호 쪽으로 몸을 틀었다. 오금이 지리는 지옥견의 포효였지만 태호는 그 순간 씩 미소를 지었다. 예상이 맞았음을 기뻐하며 커다란 말뚝 크기인 가름의 영혼 파편을 두 손으로 쥐었다. 지독한 사기가 밀려왔지만 신의 힘으로 견뎌냈다.

가름이 마침내 시리를 떨쳐냈다. 하지만 시리는 맥없이 바닥을 구르지 않았다. 두어 바퀴 험하게 땅을 구르는가 싶더니 바로 일어나 가름의 옆구리를 몸으로 박았다. 가름이 다시 휘청거렸고, 태호는 괴력을 발해 가름의 영혼 파편을 지면에서 뽑아냈다.

쾅!

굉음이 터졌다. 하지만 폭발은 아니었다. 막혀 있던 봉인이 깨지는 순간 일어난 해방의 소리였다.

휘청거리는 와중에도 태호를 물기 위해 몸을 날렸던 가름이 입을 벌린 그대로 지면에 추락했다. 처음 나타날 때와 완전히 반대로 놈의 몸이 연기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물리기 직전이었던 태호는 안도의 숨을 토하며 고개를 들었다. 하늘에서 소용돌이치던 마력의 흐름이 영혼 파편이 뽑혀져 나간 구멍을 향해 물밀 듯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쾅!

두 번째 굉음이었다. 급히 몸을 굴려 흐름을 피한 태호는 가름의 영혼 파편을 끌어안은 채 고개를 들었다. 거의 다 흩어진 가름의 영혼이 영혼 파편 안으로 흘러들어왔고, 땅에 난 구멍 위로 커다란 공간의 문이 열렸다.

밖으로 이어지는 통로.

이름 모를 검의 조각이 세차게 진동했다. 거친 숨을 쉬며 다가온 시리가 늑대의 얼굴로 말했다.

“타라, 태호.”

단숨에 빠져나갈 테니.

태호는 이번에야말로 시리의 말을 들었다. 재빨리 시리의 등 위에 올라타 상체를 숙였고, 시리는 한차례 숨을 고른 뒤 등 뒤를 돌아보았다. 가름처럼 극단적인 변화는 아니었지만 발할라 전사들과 괴물들에게서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시리는 미련을 끊고 다시 정면을 보았다. 등 뒤를 누르는 태호의 무게를 느끼며 지면을 박찼다. 새카만 공간의 문 너머로 몸을 던져 넣었다.

파악!

강렬한 빛과 함께 세상이 일변했다.

공간의 문을 빠져나오는 순간 변신이 풀린 시리는 이번에도 태호에게 깔린 꼴이 되었지만 그런 것을 불평할 때가 아니었다.

얼른 자리에서 일어난 태호는 시리를 보호하듯 무기를 뽑아들었다. 낯익은 광경과 예상치 못한 상황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표면의 흔적이라 할 수 있을 분지.

라스그리드와 불의 거인이 혈전을 벌이고 있었다. 주변에서는 발할라 전사들과 괴물들이 싸우고 있었고, 하늘에서는 불타는 바위가 쏟아졌다.

안에서 보낸 시간은 결코 짧지 않았다. 적어도 한 시간 이상은 흘렀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밖은 아니었다. 기껏해야 몇 분 남짓. 아직도 발할라의 지원군이 도착하지 않은 것이 그 증거였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전장에 있던 모두가 태호와 시리 쪽을 돌아보았다. 공간의 문이 열리며 일어난 여파 때문이었다.

대부분은 단순함 놀람이었다. 하지만 불의 거인은 달랐다. 놈은 태호가 팔에 끼고 있는 가름의 영혼 파편을 보더니 돌연 성난 포효를 지르며 태호에게 달려들고자 했다.

라스그리드가 그런 거인을 향해 재빨리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크게 일어난 바람의 벽이 거인의 앞을 가로막았고, 라스그리드는 무언가 이유를 찾으려는 듯 곁눈질로나마 태호와 시리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태호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표면이 아닌 세상의 틈바구니에 자리한, 진정한 위대한 전쟁의 흔적에 박혀 있던 가름의 영혼 파편.

몰로 가문과 거인들이 찾고 있던 건 가름의 영혼 파편이 분명했다.

라스그리드에게 길이 막힌 거인은 성난 목소리로 명령했다. 전장 곳곳에 흩어져서 싸우던 괴물들은 눈앞의 상대들을 무시하고 일제히 태호와 시리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전사 태호를 지켜라!”

라스그리드도 소리쳤다. 오딘 군단과 울르 군단의 전사들은 어떻게든 괴물들을 막으려 했지만 괴물들의 숫자가 더 많았다. 늑대의 마녀로 변신했던 탓에 맨손이 된 시리는 잇소리를 내더니 용의 날개옷을 여미며 태호에게 손을 내밀었다. 뭐라도 좋으니 무기를 빌려달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태호는 운니르에서 무기를 꺼내주는 대신 이번에도 시리의 팔을 잡아당겨 품에 안았다. 그대로 시리의 머리를 누르며 몸을 웅크렸다. 마치 밀려오는 파도를 버티려는 자세 같았다.

그리고 시리는 깨달았다. 위대한 전장의 흔적에 유리되었던 괴물들의 영혼과 달리 ‘그들’에게는 돌아갈 곳이 있었다.

발할라.

위대한 전사들의 낙원!

폭풍이 일었다. 태호와 시리가 빠져나왔던 공간의 문에서부터 발할라 전사들의 영혼이 쏟아져 나왔다. 단숨에 태호와 시리를 지나친 그들은 사방에서 밀려드는 괴물들을 향해 노도처럼 돌진했다.

괴물들은 당황했다. 오딘 군단과 울르 군단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차이가 있었다. 발할라 전사들은 태호와 시리가 그랬던 것처럼 과거의 영웅들을 금방 알아보았다. 가슴에서부터 일어난 포효로 그들을 환영했다.

“발할라!”

시리는 가슴을 짓누르며 벅찬 숨을 토했다. 하지만 태호는 입술을 깨물었다. 안과 밖의 차이를 용의 눈으로 간파했기 때문이다.

목숨을 잃은 발할라 전사들은 발할라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곳에서 강철 전사와 하나 되는 것이 그들의 순리였다.

발할라가 전사들의 영혼을 불렀다. 위대한 전쟁의 전사들은 공간의 문 안쪽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괴물들과 싸울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흐릿하고 뭉개져 있던 전사들의 영체가 더더욱 흐릿해졌다. 마치 연기가 피어오르듯 그들의 영혼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태호는 이를 악물며 싸울 태세를 갖췄다. 시리 역시 태호의 품을 벗어나 다시 한 번 손을 내밀어 무기를 청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었다.

“발할라여! 하늘의 아버지 오딘이시여!”

위대한 전쟁의 전사들 가운데 하나가 소리쳤다. 하늘을 향해 포효하듯 외친 그는 가슴을 호탕하게 두드렸다.

“한 번의 싸움을 허락해주시옵소서! 아스가르드와 아홉 세계를 지킬 영광을 우리에게 주시옵소서!”

공간의 문 안쪽과 바깥쪽의 시간의 흐름은 달랐다. 어쩌면 그들은 백년이 아니라 수백 년에 가까운 시간을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상태로 보냈을지 몰랐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했다.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타락 따위 가당치도 않았다.

발할라의 전사들.

아스가르드와 아홉 세계를 지키는 위대한 전사들!

“발키리 라스그리드가 허락한다!”

라스그리드가 소리쳤다. 그녀는 불타는 거인을 노려보며 검을 높이 들었다. 오딘과 프레이야에게 부여받은 권능을 행사하며 선언했다.

“전사들의 영혼을 내가 직접 인도할지어니! 발할라의 전사들이여! 싸워라! 아스가르드와 아홉 세계를 위하여!”

전사들이 요구했고, 발키리가 수락했다. 발할라가 그들의 바람을 이루어주었다.

위대한 전쟁의 전사들로부터 빛이 일었다. 발할라의 허락을 얻은 그들이 잠시나마 생전의 모습을 되찾았다. 흐릿해지던 영체는 뚜렷해졌고, 오랜 시간 정체되어 있던 그들의 이야기가 다시 이어지기 시작했다.

“아스가르드와 아홉 세계를 위하여.”

허락을 구했던 전사가 낮게 읊조리듯 말했다. 그에 이어 발할라의 모든 전사들이 함께 소리쳤다.

“아스가르드와 아홉 세계를 위하여!”

전투가 재개되었다. 하늘에서는 여전히 불타는 바위가 쏟아졌고, 괴물들의 추가 병력이 속속 도착했지만 아무 의미 없는 일이었다. 용기백배한 발할라 전사들은 노도처럼 일어나 괴물들을 문자 그대로 휩쓸기 시작했다.

시리는 탄성을 흘렸다. 실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가슴이 절로 벅차 얼굴이 붉어졌고, 숨결 또한 거칠어졌다.

함께 싸워야 했다. 이번에야말로 두발로 직접 뛰며 선배들과 함께 발할라의 영광을 드높여야만 했다.

하지만 태호가 다시 시리를 붙잡았다. 흠칫한 시리는 태호를 돌아보았고, 태호는 웃으며 말했다.

“보스전, 또 해야죠.”

태호가 눈짓으로 라스그리드와 불타는 거인을 가리켰다. 시리는 이번에야말로 울상을 짓더니 이내 포기했다. 약간의 원망을 담아 주문을 외쳤다.

“드라코!”

[사가 : 용을 부리는 자]

기묘한 데자뷰를 느끼며, 태호와 시리가 다시 하나가 되었다. 그 어느 때보다 더 성난 기세로 힘차게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