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alhalla Saga

Chapter 15 - Alpha Mail # 2

&

여정은 순조로웠다. 라그나는 예상대로 시리를 흔쾌히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아예 태호와 함께 수업까지 시켜주었다. 시커먼 사내놈보다는 역시 어여쁜 여제자가 좋다는 것이 라그나의 주장이었다.

발할라 중앙 홀에 설치된 공간의 문을 지나 도착한 곳은 아스가르드의 외곽, 올림푸스와의 접경지로 이어지는 변방의 요새였다.

헤다는 이둔의 군단 이름으로 마차를 한 대 빌린 뒤 손수 몰기 시작했고, 마차 뒤에 앉은 세 사람은 계속 신의 힘 수업에 집중했다.

그렇게 이틀.

마차 모는 일을 헤다와 교대한 라그나는 다시 마차 구석에 구겨지듯 앉아 태호와 시리를 보았다.

두 사람 모두 눈을 감고 신의 힘을 운용하고 있었다. 폭발하듯 강하게가 아니라 마치 얇게 펴 바르듯이 은은하게.

양쪽 모두 소질이 있었다. 시리는 참을성이 강하고 침착한 성미 덕분인지 익숙치 않은 힘을 다루면서도 실수가 적었고, 태호는 아직 하급 전사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신의 힘을 잘 다뤘다.

‘여러모로 사기가 맞구만.’

라그나는 태호의 사가는 물론이고 출신까지 알고 있었다. 사상초유의 사가를 지녔지만 발할라에 오기 전까지는 칼 한 자루 쥐어본 적이 없는, 책상 앞에서 다크 에이지인지 뭔지만 했다는 녀석.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쉬이 믿지 못 했다. 너무 황당한 이야기라서가 아니었다. 태호의 존재가 그것을 믿기 어렵게 했다.

‘재능이 넘쳐.’

태호는 잘 싸웠다. 동기화율이니 뭐니 해서 엄청난 사가를 지닌 전사의 힘과 기술을 일부나마 이어받았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뛰어난 전투 감각과 빠른 판단, 활로를 찾아내는 능력 등등 말 그대로 타고난 전사였다.

헤다는 태호의 세계가 미드가르드와 달리 싸움이 거의 없는 평화로운 세계라 했다. 어쩌면 그래서 자신의 재능을 모르고 살았을지 모른다.

싸움에 대한 재능뿐만 아니라 사가나 신의 힘 같은, 일반적인 전사들이라면 버거워할 힘을 다루는 솜씨 역시 뛰어났다. 특히 세밀한 조정 쪽으로는 정말 타고났다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가끔씩 태호 같은 경우가 있었다. 미드가르드가 아닌 다른 세계 출신인데도 발할라에 오는 자들.

그들을 모두 만나 본 것은 아니었지만, 만나 본 이들은 하나같이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우연이 아닌, 이야기의 필연일지도 모른다.’

다른 세계의 빛나는 존재들이 발할라에 이끌리는 것은.

언젠가 시구르드에게 들었던 말을 다시 마음속에 새기며 라그나는 태호를 바라보았다. 프로게이머라는 직업이 있는 미지의 세계가 아닌, 미드가르드에서 태어난 태호를 상상해 보았다.

‘강한 전사가 되었겠지.’

지금과 형태는 달랐을지라도 자신만의 사가를 들고 발할라에 입성했으리라.

“그만. 잠시 휴식이다.”

라그나가 나직이 말하자 태호와 시리가 동시에 한숨을 토하며 몸을 늘어트렸다. 양쪽 모두 땀투성이였다.

“둘 다 잘하네. 습득이 빨라.”

“감사합니다.”

시리가 뺨을 발갛게 물들이며 생긋 웃었다. 평소의 시리를 아는 롤프나 다른 울르 군단의 전사들이 보았다면 깜짝 놀랐을 광경이었지만, 태호에게는 이제 익숙한 광경이었다.

평소 태호에게 무시 아닌 무시를 당하던 라그나는 기분 좋은 미소를 씩 짓더니 시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시리, 이둔의 군단으로 옮길 생각은 없나? 그럼 내가 계속 가르쳐줄 수 있을 텐데.”

“네?”

“오, 좋은 생각인데요?”

“흠흠. 간두르가 싫어할 거야.”

화색을 하며 반긴 것은 태호였고, 헛기침을 터트린 건 헤다였다.

라그나의 직접적인 권유에 순간 혹했던 시리는 헤다의 말에 정신이라도 차렸는지 몸을 살짝 떤 뒤 표정을 바로하고 말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죄송합니다. 울르 군단의 전우들을 떠날 수는 없습니다.”

“더 마음에 드네. 좋은 전사야.”

라그나는 여전히 욕심이 난다는 듯 느긋이 말했고, 시리는 애써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평정을 유지하기 위해 무진 애를 쓰는 눈치였다.

‘동경하던 영웅이 자기를 인정해줄 뿐만 아니라 같이 일하자고 말하는 상황···인 건가?’

나름 해석을 해본 태호는 시리의 갈등을 이해했다.

‘롤프한테는 미안하지만 진짜 옮겨주면 좋긴 하겠다.’

시리는 라그나의 말마따나 좋은 전사였으니까. 전장에서 등 뒤를 믿고 맡길 수 있는 자가 있고 없고 차이는 컸다.

한편 이 와중에도 마차는 부지런히 달려 목표로 한 숲에 도착했다. 산맥과 자연스럽게 이어져 있는 무척 큰 숲이었다.

“헤다, 이쯤에서 마차를 세워줘.”

라그나는 이두 마차에서 말들을 모두 풀어낸 뒤 고삐를 쥐고 말했다.

“그리폰들은 말고기를 좋아한다. 이 녀석을 미끼로 놈들을 꾀어낼 거다. 내가 이야기했던 것들은 다들 숙지하고 있지?”

“예.”

“물론입니다.”

태호와 시리가 즉답했다. 라그나는 허리춤에서 나이프를 꺼내더니 말들에게 조금씩 상처를 내 피를 흘리게 했다. 헤다가 주문을 외우자 바람을 탄 피냄새가 높게 멀리 퍼져나갔다.

그리고 몇 분이나 지났을까. 라그나가 돌연 눈을 가늘게 떴다. 노련한 사냥꾼인 시리 역시 어느 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왔다.”

바람을 흔드는 큰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수풀을 헤치고 날아오른 야생 그리폰이 세 마리. 독수리의 울음소리를 내며 높이 날아오른 놈들이 새매처럼 날아들기 시작했다.

라그나는 검을 뽑아드는 대신 구경만 하겠다는 뜻을 드러내듯 뒤로 크게 물러섰다. 헤다 또한 한 걸음 물러섰고, 태호와 시리는 저마다의 무기를 꺼내들었다.

시작은 시리였다. 마비약을 잔뜩 바른 화살을 연달아 발사하니 그리폰 세 마리 가운데 한 마리가 균형을 잃고 바닥에 추락했다. 쿵하고 땅이 울리는 가운데 태호는 처형인의 검을 크게 휘둘렀다. 단단한 두 발로 말을 낚아채려던 그리폰 한 마리는 태호의 검을 피해 다시 고도를 높였고, 다른 한 마리는 땅만 짚고 재차 날아올랐다.

“다시 올 거다! 지상과 공중에서 동시에 가라!”

라그나가 소리치자 시리는 이미 추락한 그리폰에게 화살을 한 대 더 발사한 뒤 대공 사격 자세를 취했고, 태호는 운니르에서 매의 날개옷을 꺼내 활짝 펼쳤다.

매의 날개옷.

시리와 헤다가 동시에 움찔했다.

시리는 미리 나누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다시 하늘의 그리폰들을 노려보았고, 사전에 들은 것이 없는 헤다는 어쩐지 모를 딴청을 하며 슬쩍 태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태호는 시리도 헤다도 보지 않았다. 그대로 매의 날개옷을 걸치자마자 하늘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챤트!”

큰 매로 화한 태호가 지면을 박차 날아올랐다.

시리는 무의식중에 안도의 숨을 토했고, 헤다는 다시 움찔하고 말았다.

“어··· 타고 싸우라고 할 걸 그랬나?”

작전을 지시했던 라그나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하자 헤다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쏘듯이 말했다.

“그런 거 아니거든?”

하지만 얼굴이 빨갰다. 속셈을 들킨 사람 특유의 부끄러움이 헤다의 전신을 뒤덮고 있었다.

‘어린애 같은 면은 변하지 않았구나.’

라그나는 유쾌하게 웃었다. 이런 헤다의 모습은 반가웠으니까. ‘그날’ 이후 이둔의 군단은 너무 많은 것들이 변하고 말았다.

“아무튼, 지켜보자고.”

민망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헤다를 위해 라그나는 시선을 하늘로 돌렸다.

&

태호는 라그나에게 배운 매의 호흡을 실행했다. 강한 날갯짓으로 더 높이, 더 빠르게 날아올랐다.

태호가 노리는 것은 두 마리 중 태호 자신의 검격을 피하느라 균형이 무너졌던 놈이었다.

작전은 단순했다. 어떻게든 놈의 등 위에 올라탄다.

[당황한]

[야생 그리폰 (♀)]

라그나가 말했던 대로 두 마리 모두 암컷이었다. 놈은 믿지 못 할 빠르기로 접근하는 태호를 보고 깜짝 놀란 듯 더욱 고도를 높였지만 어림없는 일이었다. 사자의 몸을 가진 그리폰보다 순수한 매의 형상을 한 태호가 더 빠른 것은 자연의 이치라 해도 좋았다.

단숨에 야생 그리폰을 따라잡은 태호는 매의 발톱으로 녀석의 등을 꽉 붙잡았다. 날카로운 발톱이 파고드는 순간 놈이 고통에 찬 괴성을 지르며 몸을 비틀었다.

“챤트!”

다시 주문을 외친 태호는 다급히 두 다리에 힘을 주었다. 놈의 허리를 꽉 조인 뒤 목을 붙잡으며 용을 부리는 자를 발동시켰다.

붉은 색이던 그리폰의 글씨가 하얀 색으로 변했다. 아직 녹색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제어가 가능해졌다.

태호는 바로 사냥꾼의 올가미를 꺼내 그리폰의 목에 걸었다. 그러자 그리폰이 눈에 띄게 얌전해졌다.

태호의 얼굴에 절로 미소가 어렸다. 그리폰의 글씨가 연하게나마 녹색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이 정도로 만족할 수 없었다. 야생 그리폰이 한 마리 남아서가 아니었다.

애당초 태호와 라그나가 노린 진짜 표적. 방금 잡은 암컷 그리폰은 그저 놈을 꾀어낼 미끼에 불과했다.

남은 한 마리 야생 그리폰이 처음 등장했던 방향을 보며 애타게 울어댔다. 태호는 라그나에게 들은 대로 붙잡은 그리폰 역시 소리를 내게 했다. 앞의 녀석과 달리 제법 명랑한 울부짖음이었다.

“온다.”

지상에서 라그나가 말했다. 시리 역시 놈의 등장을 감지할 수 있었다. 평범한 그리폰과는 기색 자체가 달랐다.

파파파파파팍!

숲에서 작은 새들이 일시에 날아오르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놈이 발한 분노에 놀라 도망치는 것이었다.

알파 메일.

무리를 이끄는 강한 수컷.

그리폰들은 괜히 사자의 몸을 가진 게 아닌지 사자들과 비슷한 생태를 보였다. 강력한 수컷 한 마리가 여러 마리의 암컷들을 거느리며 프라이드라 불리는 무리를 형성했다.

알파 메일은 평소에는 움직이지 않았다. 수사자가 그러한 것처럼 사냥에도 거의 참가하지 않았다. 암컷 그리폰들이 구해온 먹이를 먹으며 힘을 비축하는 것이 알파 메일의 역할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태호가 놈의 암컷을 빼앗았다. 다른 암컷이 구조를 청했다.

이러한 상황에도 움직이지 않으면 프라이드가 유지될 수 없었다. 과연 라그나의 예상대로 알파 메일이 모습을 드러냈다.

[격노한 알파 메일]

[야생 그리폰 (♂)]

평범한 암컷 그리폰보다 거의 두 배쯤 되는 덩치였다. 힘차게 날아오르는 모습이 돌진하는 전차를 연상시켰다.

태호는 마른침을 삼키며 놈을 노려보았다. 놈을 죽이지 않고 제압하는 것은 척 보기에도 쉽지 않아 보였다. 자칫 잘못하면 이쪽이 크게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묘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마치 새로운 타이틀에 도전하는 기분이었다.

“그 전에.”

한 가지 확인할 것이 있었다.

[사가 : 불멸의 전사 (동기화율 20%)]

동기화율이 19%에서 20%로 상승했다. 라스그리드를 도와 불의 거인을 쓰러트리면서 20% 바로 직전까지 차올랐던 동기화율에 암컷 그리폰 생포가 더해진 결과였다.

노린 그대로였다. 이제 대강이나마 동기화율의 상승 메커니즘이 보이는 것 같았다.

더욱이 20%. 10% 때 그러했던 것처럼 변화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사가 : 전사의 무구]

전사의 검이 전사의 무구로 변하였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전사의 무구에 새로운 작은 이야기가 더해졌다.

[사가 : 대장장이의 망치는 미끄러지지 않고]

칼스테드가 사용한 무기들의 기록인 전사의 무구에 더해진 사가.

새로운 사가의 제목을 본 순간 태호는 암컷 그리폰 위에서 떨어질 뻔 했지만 용케 균형을 잡았다. 본능적으로 사가의 효과를 이해했다.

‘이런 미친.’

웃으며 욕지거리를 토했다. 아직도 상승 중인 알파 메일을 노려보며 사가를 발동시켰다.

[사가 : 대장장이의 망치는 미끄러지지 않고]

태호의 등 뒤에서 망치를 든 거대한 남자의 형상이 나타났다. 검은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는 씩 웃더니 다짜고짜 태호가 손에 쥔 사냥꾼의 올가미를 망치로 내려쳤다.

깡!

기분 좋은 소리와 함께 사냥꾼의 올가미에 빛이 어렸다.

아이템의 강화.

다크 에이지에서도 존재했던 악마의 컨텐츠!

칼스테드는 다크 에이지 최고의 전사였고, 수많은 무기가 그의 손을 거쳐 갔다.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게도, 그러한 무기들 가운데 대다수는 강화 대장장이들의 손 역시 거쳐갔다.

수많은 무기들이 강화 실패라는 명목 하에 파괴되었다.

박살이 나 재료조차 건질 수 없었던 무기들도 많았다.

성공하는 것은 한줌. 하지만 대장장이들의 손에서 살아남은 무기들은 보다 강해질 수 있었다.

그렇게 쌓이고 쌓인 무기들의 이야기.

전사의 무구에 필연적으로 함께할 수밖에 없는 부서진 것들의 사가.

남자의 형상이 상쾌한 미소를 지으며 사라졌다. 태호는 용의 눈으로 사냥꾼의 올가미를 바라보았다.

파란색이던 글씨가 한 단계 위인 황금색 글씨가 되었다. 일시적인 효과였지만 충분했다.

‘어서 와, 강화된 무기는 처음이지?’

암컷 그리폰에게서 올가미를 벗겨낸 태호는 크게 선회하기 시작한 알파 메일을 보며 환히 웃었다. 시리가 악랄하다 평했던 바로 그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