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alhalla Saga

Chapter 59 - God of Conquest

태호의 휴식은 짧았다. 눈을 감고 몸을 편안히 한 뒤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이제 다 끝났습니까?”

헤르메스의 목소리였다. 눈을 뜨고 고개를 드니 구멍 너머에서 이쪽을 향해 빼꼼 머리를 내밀고 있는 헤르메스가 보였다.

“예, 그런 것 같네요.”

“후아, 다행이군요. 이제 딱 돌아갈 정도의 힘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역광 때문에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안도감이 묻어난 목소리만으로도 어떤 심정인지를 알 수 있었다.

실제로 헤르메스는 이제 거의 한계에 다다른 상황이었다.

아무리 날개 달린 신발 탈라리아라고 해도 아무런 제한 없이 올림푸스 곳곳을 누빌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단 한 명만 동행자가 붙어도 힘이 배 이상으로 들기 마련이었는데, 그렇지 않아도 신성 세력도까지 잃어서 약해진 마당에 태호를 데리고 아르테미스의 힘이 가득한 신성 세력도 안을 누비고 다녔으니 힘의 소모가 실로 극심했다.

아마 돌아갈 힘밖에 남지 않았다는 말 역시 액면 그대로의 사실일 터였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쿠 훌린이 조금은 다른 이야기를 꺼내들었다.

‘새삼 쫄았군.’

‘헤르메스요?’

태호가 엉덩이를 털고 일어서며 물었다. 정말 몰라서 묻기보다는 역시 그렇지 않느냐며 동의하는 투였다.

태호 역시 헤르메스의 눈빛과 목소리에 묻어난 숨겨진 불안을 눈치 챘기 때문이다.

‘그래, 쫄 수밖에 없지. 이런 식으로 신성 세력도가 공격당할 수 있다는 상상 자체를 해보지 못 했을 테니 말이다. 단순히 우리 편 이겼다고 좋아하기에는 이래저래 두려운 부분이 많겠지.’

신성 세력도를 공격한다는 사실 자체가 낯선 것이 아니었다. 당장 아레스와 포세이돈도 신성 세력도를 마음껏 공격했으니 말이다.

헤르메스가 두려워한 것은 태호가 단시간만에 여러 개의 신성 세력도를 망가트려 아르테미스의 힘을 급감시킨 일이었다.

사실 통상적인 일은 아니었다.

소환의 돌을 통해 강력한 드래곤들을 불러낼 수 있으며, 신성 세력도의 중추를 찾아낼 수 있는 용의 눈과 신성 세력도의 중추를 강제로 파괴할 수 있는 주신의 힘을 가진 태호가 올림푸스 곳곳을 자유로이 누빌 수 있는 헤르메스와 힘을 합쳤기 때문에 가능한 역사였다.

하지만 그래도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태호만 있으면 헤르메스 자신의 역할은 얼마든지 대체될 수 있었으니 말이다.

헤르메스는 아폴론이 아테나에게 경고했던 것처럼 아스가르드가 올림푸스를 침공하는 상황까지는 상상하지 않았다. 신성 세력도에 의존하던 자로서 신성 세력도가 파괴되는 광경에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낀 것에 가까웠다.

‘뭐, 통상적인 방법은 아니니까요. 그나저나 힘들긴 진짜 힘드네요.’

사실 태호도 그리 쉽게 중추들을 파괴한 것이 아니었다. 올림푸스의 신이 아닌 이계의 신이기 때문인지 중추를 파괴하는데 힘이 상상 이상으로 많이 들었다. 더욱이 강력한 사가들을 연달아 사용한 탓에 정신적인 피로 또한 상당했다.

‘용의 노포를 연달아 네 번 쓴 건 처음인가.’

거기다 무식하게 지면을 때려부순 탓인지 오른팔이 아직도 지릿지릿 저리는 기분이었다.

‘그나저나 웬일이냐.’

‘뭐가요?’

‘태양신의 자리 자체를 넘겨받는 게 아니라 아테나와 공유한 거. 거기다 그 목걸이를 받은 걸 보면··· 똑같이 넘겨받았지만 근본은 아테나에게 간 게 맞지?’

거의 항상 태호와 함께하는 쿠 훌린이었지만 어젯밤은 그러지 못 했다. 아폴론이 태호와의 일 대 일 대면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쿠 훌린의 물음에 태호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도 이 목걸이가 있으니 권능을 사용할 수 있지만 아테나는 목걸이가 없어도 태양신의 권능을 사용할 수 있겠죠. 그녀는 이제 군신인 동시에 태양신이니까요.’

사용권 자체는 둘이 나눠가졌지만 소유권 자체는 아테나에게 있는 셈이었다.

‘그게 이상하단 말이지. 네 녀석이 왜 그랬을까. 이걸 빌미로 아테나를 꼬시려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동생 사랑이 갸륵하잖아요.’

‘개풀 뜯어 먹는 소리하고 앉았네. 네가 그런다고 넘어갈 놈이냐? 태양신 자리 안 내놓으면 아르테미스 확 죽여버린다고 협박을 했으면 모를까.’

‘허허, 사람이 음험하군요.’

태호가 있지도 않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허허 웃었다.

척 봐도 뭔가 숨기는 게 있는 모양새였다.

‘무슨 꿍꿍이냐. 속시원하게 말 좀 해봐라.’

‘나중에 이야기해드릴게요.’

‘나중에 언제?’

‘오늘 밤쯤?’

“주신이시여?”

때마침 머리 위에서 헤르메스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태호가 나오질 않으니 초조해진 모양이었다.

“지금 나갈게요.”

적당히 답한 태호는 바닥을 가볍게 박차 지면 위로 빠져나왔다. 아르테미스의 예속에서 해방된 덕분인지 아덴마하 일행과 폴리스 사람들의 전투도 일단은 멈춘 상태였다.

“아스가르드의 주신이시여,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헤르메스가 태호에게 손을 내밀었다. 태호는 그 손을 마주잡으며 아덴마하에게 신비를 전했다.

[아덴마하, 니드호그랑 일행을 잘 부탁해]

[염려마요. 이따 봬요]

[그래, 늘 고마워]

[흥흥]

아덴마하의 기분 좋은 흥흥거림을 들으며 태호는 가볍게 눈을 감았다. 헤르메스가 탈라리아를 발동시켜 순식간에 하늘 높은 곳으로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잠시 눈을 감고 바람을 즐겼더니 어느새 아폴론의 마지막 폴리스 앞에 당도했다.

“태호.”

“주신이시여.”

“주인님 왔어?”

헤르메스와 함께 허공을 천천히 밟으며 내려오자 여기저기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호는 목소리 하나하나에 답하기 앞서 용의 눈으로 주변을 크게 둘러보았다.

이곳 역시 일단의 전투는 끝난 상황이었지만 생각 이상으로 피해가 큰 것 같았다.

어림셈이었지만 에키드나의 용 군단 중 거의 5분의 1가까이가 목숨을 잃었고, 절반 가까이가 크고 작은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아르테미스와 디오니소스가 끌고 온 군단은 거의 반수 이상이 죽어나자빠졌으니, 짧은 시간 동안 얼마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지 알 수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브라키와 시리, 발키리 삼인방과 아테나가 이렇다 할 부상 없이 무사하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다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에키드나, 괜찮아?”

“어머나, 눈치 채셨나?”

에키드나가 아무렇지 않은 듯 요염하게 웃었지만 태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냥 웃어넘길 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용의 신이라고는 하나 태생이 괴물인 에키드나에게 올림푸스 12주신의 신력은 독이나 다름없었다. 본체에서 여신의 모습으로 화한 덕분에 상처 자체는 지워졌지만 화살과 함께 주입된 신력까지는 어찌하지 못 해 꽤나 큰 내상을 입은 에키드나였다.

안타까움에 입술을 달싹인 태호는 자신의 판단이 다소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괴물들의 도시에서 대적했던 에키드나는 실로 막강했다. 그녀 정도의 힘을 가진 존재가 방어에만 집중하면 능히 아르테미스를 상대로도 이렇다 할 부상 없이 시간을 끌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오산이었다.

에키드나는 태호 자신과 대적했을 때보다 훨씬 약해진 상태였다.

이는 태호가 신성 세력도에 대한 이해도가 낮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올림푸스 12주신은 멀리 있어도 신성 세력도의 지원을 받을 수 있지만, 아예 자신의 신성 세력도 안에서 싸우면 훨씬 더 큰 힘을 얻을 수 있었다.

태생이 괴물인 에키드나는 이러한 정도가 훨씬 더 심해 신성 세력도 안과 밖의 전력 차이가 상당했다.

더욱이 그녀는 자신의 신성 세력도를 태호에게 바쳤다. 오롯이 신성 세력도의 주인이던 시절과 신성 세력도를 가진 자의 하위신이 되어 힘을 나눠받는 상태가 같을 리 만무하였다.

또 한 가지 오산은 아르테미스의 강함이었다. 태호를 죽이기 위해 작정하고 나선 그녀는 강력한 신기들을 갖춤으로써 전력을 잔뜩 끌어올린 상태였다.

“미안해, 그리고 잘해줘서 고마워.”

태호가 에키드나의 손을 잡으며 말하자 에키드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은근한 목소리로 유혹하듯 말했다.

“어머나, 그럼 오늘밤은 어때? 응? 피를 봐서 흥분되지 않아?”

“미안.”

“닳는 것도 아닌데 치사하기는.”

에키드나가 툴툴 거리는 가운데 얼른 몸을 뺀 태호는 시리와 브라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두 사람 사이에 낯선 여인이 서 있었다.

[아르테미스의 대영웅]

[아탈란테]

붉은 글씨가 아닌 회색 글씨였다. 아르테미스의 예속에서 벗어난 그녀는 더 이상 멸망을 바라는 자가 아니었다.

“아르테미스의 대영웅인 아탈란테다. 그녀 덕분에 전투의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직접 아탈란테를 소개한 시리는 아르테미스가 봉인된 직후의 이야기들을 짧게 간추려 설명했다.

“아르테미스가 봉인된 직후 그녀가 혼란에 빠진 군단을 통솔해 전투를 중단시켰다. 디오니소스의 군단까지는 통제가 불가능했지만, 그치들은 디오니소스가 사라진 직후 금방 힘이 빠져 나자빠진 터라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예속에서 해방되었다고는 하나 평생 적으로 싸워온 괴물들과 싸우던 마당인데 단번에 전투를 중단시켰다니 놀라운 판단력이었다.

태호가 감탄하는 가운데 시리가 아탈란테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탈란테, 아스가르드의 주신이신 이태호님이시다. 인사해라.”

“아르테미스의 대영웅 아탈란테가 아스가르드의 주신께 인사드립니다.”

아탈란테가 왼주먹을 오른쪽 가슴 위에 올리는 올림푸스식 인사를 하며 예를 표했다.

태호는 발할라의 인사로 응답한 뒤 아탈란테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말했다.

“덕분에 무익한 피를 흘리지 않을 수 있었다. 감사하는 바이다.”

“아르테미스님께서······.”

돌연 울 것 같은 얼굴이 된 아탈란테는 눈을 꽉 감았다 뜨는 것으로 마음을 추스린 뒤 마저 말을 이었다.

“아르테미스님께서 마지막 순간에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미안하다고··· 그리고 가능하면 오라버니를 도와달라고······.”

‘봉인되기 직전에 정신을 차린 건가?’

아르테미스가 말한 오라버니는 아폴론이 분명했다. 쿠 훌린이 놀라서 묻자 태호는 어젯밤 보았던 아폴론의 눈빛을 떠올렸다.

‘아폴론의 정성이 통한 걸지도 모르죠.’

그야말로 지극한 사랑이었으니까.

태호는 새삼 아르테미스를 끌어안은 채 바위가 된 아폴론을 돌아보았다. 아폴론뿐만 아니라 아르테미스의 얼굴에서도 서로를 지극히 사랑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마찬가지로 아폴론과 아르테미스를 잠시 바라본 아탈란테는 다시 예를 표하며 말했다.

“저를 비롯한 아르테미스님의 군단은 오늘부터 아테나님의 군단에 들어가 올림푸스 탈환을 돕도록 하겠습니다.”

“도움에 감사한다. 그대와 전우들을 환영하는 바이다.”

아탈란테와 인사를 마친 태호는 마지막으로 아테나와 이야기를 나눈 뒤 병력을 수습해 아폴론의 폴리스로 향했다. 이것저것 정리할 일들이 많았지만 일단은 휴식이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약속한 밤이 되었다.

‘약속한 밤이라니. 뭔가 이상하잖아요.’

‘네가 밤에 알려준다며.’

한숨자고 일어난 태호는 침대 위에 걸터앉아 배를 벅벅 긁었다. 창밖을 보니 아직 자정까지는 안 된 것 같지만 늦은 밤은 확실해 보였다.

침대 옆에 놓여 있던 주전자에 신비를 가해 냉수를 만든 태호는 꿀꺽꿀꺽 잘도 마신 뒤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뭐, 대단한 건 아니고. 태양신의 자리를 아테나에게 넘기는 대신 다른 걸 넘겨받기로 했어요.’

‘다른 거?’

‘네, 아폴론이 보기에는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데 하나라도 더 받고 싶어서 그저 끼워 넣은 것 같은··· 하지만 사실 제게는 태양신의 자리보다 더 중요한 걸요.’

일단 거래의 중심은 태양신의 자리였다.

아폴론이 아르테미스를 살려주는 대가로 제시한 것이 태양신의 자리였으니 말이다.

태호는 아테나와 태양신 자리를 나눠 갖는 것에 대해 불쾌감을 드러내며 이런저런 요구 조건들을 늘어놓았고, 그 결과 가장 원하던 것은 마치 마지못해 받는 덤처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만약 태호가 처음부터 자신이 원하던 것을 대가로 요구했다면 결코 태양신 자리를 아테나와 나눠갖지 못 했을 터였다.

‘한 마디로 늘 그랬던 것처럼 사기 쳤다는 거네?’

‘사기라뇨. 거래와 협상의 기술이죠.’

‘그게 그거잖아. 아무튼 그래서 뭘 받았는데?’

쿠 훌린이 무척이나 흥미를 보였다. 덕분에 다소 부담스러워진 태호는 흠흠 헛기침을 토한 뒤 짤막하게 답했다.

‘음악의 신 자리요.’

‘음악의 신?’

‘네, 음악의 신. 아폴론은 음악의 신이기도 하니까요. 제가 이계의 신이라 완벽히 물려받지는 못 했지만 원하는 수준까지는 금방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걸로 뭘··· 아!’

쿠 훌린이 탄성을 토했고, 태호는 씩 웃었다. 의식적으로 브라기의 룬이 새겨진 혀를 길게 내밀어 보았다.

시와 노래의 신이었던 브라기의 룬.

여기에 음악의 신이 더해지면 어떠할까.

룬의 강화.

보다 강한 힘을 발휘하게 되는 브라기의 룬.

‘실험해보자.’

룬이 얼마나 잘 통하는지. 얼마나 강화되었는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 태호는 침대에서 일어나 방을 나서려 했다. 여신이 면회 온 전사를 쓸 줄 알았던 쿠 훌린은 눈을 껌벅이며 물었다.

‘야, 어디가?’

‘아덴마하한테 실험해보려고요.’

룬을 이용한 말이 얼마나 잘 통할지.

태호는 태연히 답했고, 쿠 훌린은 한숨과 함께 말했다.

‘실험의 의미가 있긴 있는 거냐.’

하지만 태호는 흘려들었고, 아덴마하의 방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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