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 Maker

Chapter iii: fighting monsters

업적.

신화의 첫 정립.

업적.

종족 인구 100명 달성.

별 문양은 이후에도 연달아 몇 개가 더 떠올랐다.

번개폭풍과 벼락소리가 주관한 이번 제례는 참으로 여러 가지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신화의 정립.

번개폭풍은 신들에게 상징을 부여하였다. 부족민들이 경외감을 느낄 만한 자연물에 신들을 이입하였다.

지혜의 신인 하얀 신에게는 태양을, 싸움의 신인 녹색 신에게는 달을, 사랑의 신인 황색 신에게는 강을, 기술의 신인 붉은 신에게는 대지를.

태양과 달, 강과 대지.

하늘에 존재하는 태양과 달은 본능적으로 경외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언제나 하늘에서 지상을 굽어보는 존재들이었다.

대지는 삶의 터전이었고, 강은 생존에 필수인 물의 공급처인 동시에 부족민들의 새로운 주식인 물고기들을 구할 수 있는 곳이었다.

물론 아직은 엉성한 비유였다. 신들에게 기껏 부여한 ‘색’과 번개폭풍이 새로이 정한 자연의 상징물들과는 괴리감이 있었다. 어쩌면 앞으로 부족이 발전하고, 신화가 정립되는 과정에서 상징물이나 신들의 명칭이 달라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직은 먼 나중의 일이었다.

신화의 정립.

막연히 하늘을 숭배하는 것과는 달랐다. 신탁을 통해 이미 몇 번이나 신들과 조우한 번개폭풍으로서는 지상의 사람처럼 희로애락을 표하는 ‘인격 신’을 신화의 중심으로 세우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보상.

신력 레벨 1 증가.

보상.

신력 100회복, 신력 최대치 20 증가.

업적에 대한 보상도 연달아 이어졌다. 제례를 통해 모인 부족민들의 신앙심이 신력으로 치환되어 신력 게이지를 단번에 가득 채웠다.

17조는 저마다 부족민들을 축복하며 잠에 빠져들었다. 영민은 참으로 오래간만에 꿈을 꾸었다. 내용은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분명 좋은 꿈이었다.

그리고 다음날, 17조는 아침 일찍부터 원탁 앞에 모였다.

“좋아, 이제 드디어 닭을 만들어 보자고.”

에드윙이 좋아 죽겠다는 얼굴로 실실 웃으며 손바닥을 비볐다. 처음 닭을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내고 벌써 한 달 이상이 흘렀으니 조바심을 낼 만도 했다.

영민은 그런 에드윙의 모습에 키득 웃었다.

“에드윙, 다 좋은데 너무 흑심이 강한 거 아냐? 부족민들보다는 제물 생각부터 하고 있는 거 같은데?”

지난 번 첫 제례 때 올라온 사슴고기와 과일들 덕분에 식생활이 눈에 띄게 개선된 17조였다. 하지만 아무리 맛난 음식도 매일 먹으면 질리는 법이거늘, 이렇다 할 양념도 없이 불에 굽기만 한 사슴고기도 한 달 이상 먹다보니 질리긴 매한가지였다.

영민도, 에드윙도 수많은 식재들로 만들어진 음식들에 익숙해진 현대인이었으니 그 정도가 더 하였다.

영민의 지적에 에드윙은 움찔하기는커녕 호탕하게 웃으며 가슴을 두드렸다.

“껄껄껄, 우리 종족도 좋고 나도 좋고 다 함께 좋으니 이 어찌 좋지 아니한가.”

에드윙의 솔직한 모습에 테프네트가 나른하게 웃었고, 영민 역시 기분 좋은 얼굴이 되었다.

지금같은 솔직함이 에드윙의 장점이자 매력이었다.

“아무튼 닭을 만드는 것도 일이지만 그걸 전해 주는 것도 문제야. 이건 신력 소모가 꽤 큰 걸?”

번개폭풍의 경우에는 자연스럽게 태어날 방도가 있었다. 벼락소리가 아이를 낳는다는 형태로 말이다.

하지만 닭은 달랐다. 인계에 없는 것을 직접 전달해 주어야 했으니 말이다.

닭을 전달하는 것만으로도 닭을 만들어내는 것과 거의 비슷한 양의 신력을 소모해야만 했다.

테프네트가 콘솔을 조작해 필요한 신력을 검토해본 뒤 말했다.

“거의 한 번에 신력이 바닥나겠구나. 하지만 닭…… 그러니까 우리가 내린 신수를 받은 부족민들은 다시 우리에게 신앙심을 보일 거라 생각한단다. 그리고 중요한 일이잖니. 망설일 사안은 아닌 것 같구나.”

가축은 부족민들의 식량수급에 큰 도움이 될 터였다.

사실 농경생활은 ‘삶의 질’만을 따지면 오히려 수렵생활보다 못한 경우가 많았다.

농경이 수렵생활보다 우월한 것은 다수의 인구 부양능력이었는데, 현재 부족민들의 농경생활은 아직 기초 중의 기초였던 터라 식량을 수급할 수단을 하나라도 더 늘려주는 것이 중요했다.

에드윙이 고개를 끄덕였다.

“테프 누나 말이 맞아. 아무튼 그럼 신탁은 누가 내릴까?”

“나! 내가 할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이제까지 얌전히 있던 당아영이 손을 번쩍 들며 소리쳤다. 마치 서로 발표하겠다고 다투는 어린아이처럼 연신 손을 흔드는 당아영의 모습에 영민은 얼른 입을 가렸다. 너무 귀여운 나머지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오려 했기 때문이다.

빠르게 표정을 가다듬은 영민은 차분한 어조로 당아영에게 말했다.

“음, 아영아 이번 일은 우리뿐만 아니라 부족민들에게도 매우 중요해. 어쩌면 번개폭풍은 닭을 널 상징하는 신수(神獸)로 삼을 수도 있어.”

“신수?”

“그래, 널 상징하는 동물 말이야.”

신이 내리신 첫 가축.

이는 번개폭풍을 비롯한 부족민들에게 굉장한 의미로 다가갈 것이 분명했다.

난데없이 없던 동물이 나타났으니 그야말로 ‘신의 존재 증명’이기도 했고 말이다.

닭이 신수가 된다. 당아영이라는 신의 상징이 된다.

“딱이네, 딱. 싸움 신의 신수인 싸움닭. 내가 예전에 인터넷에서 본 적이 있지, 암.”

에드윙이 손가락을 튕기며 그리 말했고, 순간 당아영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컥!”

대체 언제 빵 조각을 날린 건지 알 수도 없었지만 에드윙은 앓는 소리를 내며 원탁 위에 쓰러졌다. 하지만 에드윙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결연히 말했다.

“나 에드윙 솔로몬, 결코 폭력에 굴하지 않…… 억!”

당아영은 연달아 빵 조각을 날렸고, 에드윙은 그때마다 몸을 뒤틀었다. 보다 못한 테프네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에드윙을 감쌌다.

“아영! 그만 하렴! 이게 무슨 짓이니!”

평소의 테프네트답지 않게 꽤나 노한 얼굴이었다. 그 모습에 저도 모르게 움찔한 당아영은 빵 조각을 든 손을 얼른 등 뒤로 감추었다. 순식간에 창백해진 얼굴을 보니 많이 놀란 모양이었다.

사실 그럴 만도 하였다. 마치 17조의 어머니처럼 모두를 보듬어 주던 테프네트가 지금처럼 화를 낸 것은 처음이었으니 말이다.

“흑흑, 테프 누나.”

에드윙은 우는 시늉을 하며 자신의 곁에 선 테프네트의 낭창낭창한 허리를 끌어안았다. 은근한 손놀림이 음흉하기 짝이 없었다.

그 손길에 노함도 잊고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던 테프네트는 에드윙의 손등을 짝 소리 나게 치며 말했다.

“손 치우렴.”

“흑흑.”

처음에는 그저 마초맨인 줄만 알았는데 은근히 능글맞은 에드윙이었다. 그래도 테프네트 허리를 끌어안아 좋았다는 듯 실실 웃으며 물러섰다.

어찌되었든 한바탕 촌극이 끝이 났다. 처음부터 끝까지 관람자였던 영민은 헛기침을 한 번 터트려 좌중의 시선을 자신에게 모았다. 버릇대로 입술을 삐쭉이고 있는 당아영에게 물었다.

“어떻게 할래? 아영아.”

당아영은 끙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 거린 끝에 대답했다.

☆ ☆ ☆

그것은 ‘닭’이라는 동물이었다.

새는 새인데 하늘을 날 수 없는 특이한 새였다. 하지만 커다란 날개는 그저 멋이 아니었던 터라 무척이나 높이 뛰어오르는 것이 가능했다.

주둥이 대신 달린 부리라는 것은 무척이나 뾰족하고 단단했는데, 이것과 더불어 날카로운 발톱이 있어 제법 매서운 공격이 가능했다.

하지만 닭은 그렇게까지 큰 동물이 아니었다. 머리는 주먹보다 조금 작았고, 잘 자란 성체도 사람 품 안에 쏙 들어갈 크기에 불과했다. 때문에 어린아이라면 모를까, 다 자란 성인에게까지 위협이 되는 존재는 아니었다.

번개폭풍은 눈을 껌벅이며 닭을 쳐다보았다. 검푸른 깃털이 달린 그것은 도도하게 서서 그런 번개폭풍을 마주 노려보았다.

언제나와 같은 신탁의 꿈.

번개폭풍은 살아 있는 새를 가까이서 본 일이 없었다. 가끔 사냥 나갔다가 죽은 새를 보거나 저만치 멀리서 잠시 앉아 쉬는 모습을 본 것이 전부였다.

닭은 번개폭풍을 피해서 달아나지 않았다. 번개폭풍이 고개를 들어 자신 앞에 선 ‘하얀 신’을 우러렀다.

지혜로운 하얀 신 영민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번개폭풍, 잘 들어라. 사람과 다를 것이 없다. 사람에게 남자와 여자가 있듯이, 이 동물에도 남자와 여자가 있단다.”

하얀 신은 언제나와 같이 자상하게 설명해주었다. 번개폭풍은 제법 쉬워진 하얀 신의 설명에 만족했다.

사람에게 남자와 여자가 있듯이 짐승에도 남자와 여자가 있다. 이는 번개폭풍이 자연에서 터득한 이치이기도 했다.

영민은 자신 앞에 서 있는, 아까 전부터 번개폭풍과 눈싸움을 하고 있던 닭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것은 수탉이다. 남자 닭이지. 매일 새벽이 되면 해가 떠오르는 것을 알리기 위해 소리를 낼 것이다. 여기 빨간 볏이 보이지? 이게 수컷의 특징이다.”

남자라고 생각하고 보니 과연 남자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덩치도 왠지 모르게 우람했고, 머리 가운데 솟은 빨갛고 부드러워 보이는 ‘볏’이라는 것이 무척 멋져 보였으니 말이다.

“태양. 하얀 신.”

번개폭풍은 그리 말하며 납득했다. 태양신께서 내리신 신수가 태양의 떠오름을 알린다 생각하니 참으로 이치에 맞았다.

영민은 씩 웃으며 옆을 돌아보았다. 살짝 긴장한 얼굴의 아영이 품에 안고 있던 닭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건 암탉이야. 여자 닭이고, 알을 낳을 수 있어.”

검푸른 깃털을 가진 수컷과 달리 하얀 깃털을 가진 닭이었다. 수탉보다 크기가 조금 작았고, 머리에 볏이 없어 금방 둘을 구분할 수 있었다.

“여자. 녹색 신.”

번개폭풍은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남신인 태양신께서 수탉을 내리셨으니, 여신인 녹색 신께서 암탉을 내리시는 것이 이번에도 이치에 맞았다.

번개폭풍은 다시 고개를 들어 두 신을 바라보았다. 후광 때문에 얼굴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지만 태양과 달, 하얀 신과 녹색 신이 잘 어울리는 짝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런 번개폭풍의 속내를 알 리 없는 아영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노력했다.

다시 한 번 암탉을 가리키며 말했다.

“사람이 아이를 낳는 것과 같아. 닭들도 교…… 교…….”

“교……?”

번개폭풍이 고개를 갸웃 기울였지만 당아영은 끝내 말을 제대로 맺지 못했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홍시마냥 얼굴만 한참 붉히다가 입을 앙 다물더니 영민에게 다소 필사적인 눈짓을 보냈다.

영민은 웃음을 가리기 위해 얼른 손을 들어 입가를 가렸다.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억누르며 말했다.

“닭들도 교배를 해서, 사람처럼 사랑을 해서 아이를 낳을 수 있다. 하지만 사람처럼 다 자란 자식을 낳진 않는단다. 잘 보렴.”

영민은 번개폭풍의 눈앞에 검지를 세워보였다. 자연 번개폭풍의 시선은 검지에 집중되었고, 영민은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이더니 이내 자신의 등 뒤에 감췄다. 그리고 마치 마술사가 마술을 하듯 빠르게 손을 다시 번개폭풍의 앞으로 가져갔다.

영민의 손에는 누리끼리한 색의 달걀이 들려 있었다.

“번개폭풍, 이게 ‘알’이란 거다. 이걸 저 암탉이 품으면 알이 깨져서 병아리가 태어나지. 닭의 아기다.”

“오.”

알에서 새끼가 태어난다. 사람이나, 번개폭풍이 이제껏 사냥해온 짐승들과는 전혀 다른 번식법이었다.

영민은 다시 알을 천천히 움직여 번개폭풍의 주의를 집중시켰다. 옆에서 영민이 하는 모양새를 관찰하던 당아영은 영민의 능숙한 솜씨에 감탄한 듯 저도 모르게 영민의 옆모습에 집중했다.

영민이 암탉 앞에 달걀을 놓았고, 암탉은 마치 명령이라도 받은 것처럼 알을 소중히 품었다.

“이 과정은 꽤 오래 걸린단다. 하지만 이번에는 빠르게 보여주마. 예전 네가 곡식의 생장을 보았을 때처럼 말이다.”

번개폭풍은 미간을 찌푸렸다. 하얀 신이 또 어려운 말들을 늘어놓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번개폭풍은 하얀 신에게 다시 묻고 싶었지만 옆에 녹색 신이 있었기에 그냥 꾹 참았다.

암탉이 몸을 일으키자 달걀이 절로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러더니 이내 알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번개폭풍이 깜짝 놀라 알에 얼굴을 가까이 하니 이내 알을 깨고 노랗고 귀여운 병아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기 닭.

아비나 어미와 달리 모든 것이 덜 자라 귀엽기만 한 존재.

영민은 다시 번개폭풍의 눈앞에 손가락을 세워 자연스럽게 시선을 자신에게 유도했다.

“이 과정은 꽤 오래 걸린단다. 하지만 그 전에 너희가 암탉이 갓 낳은 알을 먹을 수도 있다. 이렇게 깨트리면 안에 액체가 들어 있지? 이걸 이렇게 달군 돌 위에 구워서 먹을 수도 있고, 그냥 먹을 수도 있다. 뜨거운 물속에 넣어서 삶아 먹어도 되고 말이다.”

영민은 주머니에서 꺼낸 달걀 여럿으로 자신이 말한 것들을 하나하나 선보였다. 번개폭풍은 놀란 눈으로 영민에 의해 요리가 되어가는 알들과 발치에서 삐약삐약 거리는 병아리를 번갈아 보았지만 이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영민이 다시 당아영을 돌아보았다. 당아영은 숨을 한 번 크게 고르더니 앞으로 나섰다.

“번개폭풍, 닭에게는 곡식이나 벌레를 먹여. 다른 것도 먹을 수 있지만 그 두 가지를 우선으로 해. 알았지?”

번개폭풍은 반사적으로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아영은 그런 번개폭풍의 반응에 만족한 듯, 뽐내는 얼굴로 영민을 돌아보았고, 영민은 번개폭풍을 위해 당아영에게 박수를 보내는 아량을 보였다.

이제 전할 말은 거의 다 전했다. 신탁에 영민과 아영 둘이 동시에 등장한 터라 신력도 평소보다 배로 소모했으니 슬슬 마무리를 지어야 했다.

“번개폭풍, 잘 키워서 번식시켜야 한다. 다 자란 닭의 고기를 먹어도 되고, 알을 먹어도 되니, 이는 너희에게 무척이나 유용한 단백질 공급…… 아무튼 무척이나 유용한 식량이 될 거다. 알겠더냐?”

번개폭풍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아영은 그런 번개폭풍에게 다시 한 번 말했다.

“잘 키워. 알았지?”

번개폭풍이 좀 전의 두 배 정도 되는 속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영민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지만 당아영은 여전히 만족한 얼굴이었다.

신탁이 끝났다.

‘하얀 신’과 ‘녹색 신’이 사라졌고, 번개폭풍은 꿈에서 깨어났다.

잠자리에서 일어난 번개폭풍은 자신의 품 안에 수탉과 암탉이 안겨 있는 것을 보고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당장에 두 마리를 옆구리에 각기 나눠 낀 뒤 어머니 벼락소리를 만나러 갔다.

태양의 신인 하얀 신과 달의 여신인 녹색 신께서 내리신 신수神獸.

그럼 성스러운 것이니 앞으로 모셔야 하냐고 벼락소리가 묻자 번개폭풍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잘 키워서 번식시킨 다음에 식량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 ☆ ☆

“오, 제대로 돌아가는데? 이번엔 설명 잘한 듯?”

벼락소리와 번개폭풍이 하는 모양새를 사 배속으로 관찰하던 에드윙이 그리 말했다. 그러자 당아영이 어깨를 으쓱이며 잘난 척을 했다.

“엣헴.”

헛기침까지 한 번 터트리는 모양새가 아주 능숙했다. 에드윙이 당장에 코웃음을 쳤다.

“넌 그냥 옆에서 구경만 하더만.”

“아니거든? 그런 거 아니거든? 나도 설명 많이 했거든?”

“그래, 많이 했지. 교, 교, 교오오…….”

에드윙이 수선을 떨다가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가리는 시늉을 하자 당아영이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영민이 사태 수습을 위해 얼른 끼어들었다.

“에드윙 그쯤 해. 아영이도 잘해주었어.”

영민이 편을 들어주자 당아영은 에드윙을 흉내 내듯 코웃음을 쳤다.

“거봐. 영민도 그렇다잖아.”

“진짜 애다. 애야.”

“뭐야?!”

당아영이 다시 발끈하자 에드윙은 얼른 두 팔을 들어 올려 얼굴 부분을 가드 했다. 당아영은 그런 에드윙을 노려보더니 입술을 삐쭉이며 자리에 앉았다.

의외의 반응에 에드윙은 눈을 껌벅였고, 영민도 꽤 놀란 듯 당아영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런 셋의 소란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던 테프네트가 영상을 가리켰다.

“흠흠, 그런데 말이다. 저건 어떻게 된 것이니?”

잠시 번개폭풍과 벼락소리를 잊고 있던 영민과 당아영, 에드윙은 화면을 돌아보았고, 저마다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닭을 부족민들에게 소개하는 벼락소리의 ‘신화’ 때문이었다.

‘부부 신’인 태양신과 달의 여신께서 ‘수탉’과 ‘암탉’을 내리셨다. 그러니 이 짐승들을 잘 키워 부족을 번성시키자.

부부 신.

영민과 당아영은 저도 모르게 서로를 돌아보았고, 두 사람을 번갈아 본 에드윙이 방정맞은 웃음을 터트렸다.

☆ ☆ ☆

영민은 17조의 신계 구석에 홀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약간은 허탈한 미소를 그렸다.

평소라면 당아영과 함께 수련을 하고 있었어야 했지만, 아무래도 어제의 일이 원인인지 오늘은 그러하지 못했다.

‘오늘은 자습이야. 자습 해!’

아침에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당아영이 한 말이었다. 아니, 거의 빽하고 소리를 지른 것 같았다.

부부 신.

사실 어떻게 보면 나올 수 없는 개념이었다. 현재 번개폭풍의 부족에는 제대로 된 혼례문화가 존재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남자와 여자.

남신과 여신.

자연스러운 한 쌍.

그리하여 선택된 표현.

‘뭐, 기분 나빠하는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당아영은 분명 부끄러워했고, 자신을 놀리는 에드윙에게 격하게 화를 내긴 했지만빵 조각을 그야말로 무수히 날렸는데, 이번에는 테프네트도 말릴 수가 없었다. 덕분에 에드윙은 전신에 피멍이 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기분 나빠하지는 않았다.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불쾌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부끄러워했다.

영민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볼을 긁적였다.

사실 반응만 생각한다면 ‘나쁘지 않은 반응’이었다. 애당초 영민을 남자나 연애 대상으로 생각도 않았다면 그런 반응이 나오지 않았을 터이니 말이다.

‘아영이라.’

성격이 좀 거칠어서 그렇지 나쁜 아이는 아니었다. 너무 속물적인 생각인지도 몰랐지만, 당아영은 얼굴도 예뻤고, 키가 좀 작은 편이긴 했지만 비율도 좋아 작다는 느낌보다는 인형처럼 예쁘다는 느낌이 들었으니 말이다. 더욱이 상황의 특수성 때문에라도 마음이 가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흔들다리 효과라는 것이 있었다. 흔들다리로 비유될 수 있는 불안하고 위험한 상황에 처하면 함께 있는 이들에게 심적으로 끌리게 된다는, 그런 이론이었다.

‘생각해보니 이런 상황에서도 썸 타려고 하는 내가 이상한 건가.’

키득 웃은 영민은 고개를 내저어 머릿속의 생각들을 털어냈다. 우선은 늘 하던 대로 내공 진척을 위해 노력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막 단전의 기를 느끼려는 찰나였다.

‘잠깐.’

영민은 눈을 떴다. 그리고 새삼 자신의 단전 위에 손을 올려보았다.

당아영은 말했었다.

‘넌 한 달 만에 남들의 일 년 이상에 해당하는 내공을 쌓았어.’

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영민 자신이 정말 무공의 천재라서?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지만, 뭔가 미심쩍었다. 영민은 ‘게임’을 시작한 초기에 떠올렸던 생각을 다시 한 번 검토해보았다.

‘인계’와 ‘신계’의 시간 차.

그리고 다른 ‘신계’들 간의 시간 차.

‘인계’의 시간을 절대적 기준으로 한다고 생각하면 여러 가지 변수가 생길 수 있었다.

인계의 시간으로 삼십 년.

이를 삼십 배속으로 관찰하면 신계의 시간으로 일 년이 필요했다.

그런데 만약 정 배속으로, 그러니까 아예 인계의 시간과 똑같이 관찰하면 어떨까? 그러면 신계 역시 삼십 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만약 ‘신계’들의 시간이 ‘인계’를 기준으로 돌아간다면 정 배속으로 인계를 관찰할 경우 타 ‘신계’의 ‘가짜 신’들보다 삼십 배에 달하는 시간을 유용할 수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가정이긴 하지만 그 시간 동안 계속 내공을 쌓으면 어떻게 될까? 다른 신계의 ‘가짜 신’들과 대적할 때쯤이면 절대무적의 초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 시간을 견디기는 꽤 힘들겠지만.’

생각을 이어나가다보니 걸리는 것들이 꽤 많았다. 정 배속으로 관찰할 경우 ‘신계’의 ‘가짜 신’들은 ‘인계’와 똑같은 시간흐름을 가졌다.

하나의 부족으로 세계를 정복해야 하는 게임이다 보니 인계의 시간 수십 년으로 마무리가 될 가능성은 낮았다. 그렇다면 ‘신계’의 ‘가짜 신’들이 늙어 죽지 않을까?

신계에선 불로영생이라도 하는 것일까?

그리고 생각한 것처럼 정 배속으로만 시간을 보내는 것도 가능할까?

17조는 관찰 배속으로 ‘삼십 배속’을 자주 사용했다. 어쩌면 영민 자신의 빠른 내공 습득은 그것과 연관이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시간을 빨리 보낸 만큼 다른 쪽으로 효율이 올라간 것일지도 몰랐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러면 아영이의 경우는 뭐지. 그리고 그럼 내공도 삼십 배로 빨리 쌓여야 하지 않나?’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이건 아무래도 다른 조원들과 상의해서 한동안 정 배속으로 시간을 보내보든지 하는 식으로 실험을 해봐야 할 것 같았다.

영민은 다시 눈을 감고 단전에 정신을 집중시켰다.

당장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영민의 육신 내부에서부터 기가 운용되기 시작했다.

☆ ☆ ☆

“수행은 제대로 했어?”

영민이 원탁이 있는 방에 들어가자마자 당아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연한 얼굴로 영민을 바라보는데, 목소리도 평소와 같았다.

영민은 똑같이 평범하게 마주 웃으며 답했다.

“평소 가르침이 좋았으니까.”

“흥.”

당아영은 고개를 살짝 돌리며 새침한 소리를 냈고, 영민은 웃음을 참으며 자신의 자리에 착석했다. 당아영의 귓불이 붉었지만 굳이 놀리고 싶진 않았다.

의외인 것은 에드윙이었다. 평소라면 얼른 끼어 들어서 당아영을 놀렸을 그였지만 어제 워낙 제대로 얻어맞아서 그런지 툴툴 거리며 눈동자만 굴렸다. 아무래도 놀리고 싶은 걸 참느라 그런 모양이었다.

영민이 콘솔을 움켜쥐며 물었다.

“닭들은 어때? 순조롭게 불어나고 있어?”

닭을 내려 주고 나서 시간이 꽤 지났다. 어제라고 표현했지만 스물네 시간이 넘었고, 내내 삼십 배속을 운용했으니 한 달이 넘게 지난 셈이었다.

병아리의 부화 기간은 약 이십 일 정도였으니 새끼 병아리들이 여럿 자랐어도 이상하지 않을 시간이었다.

에드윙이 콘솔을 조작해 번개폭풍이 만든 ‘축사’를 영상에 띄우며 말했다.

“어, 아무래도 번개폭풍이랑 벼락소리가 애지중지하고 있으니까. 잘 자라고 있어. 이젠 숫자도 제법 되고 말이야.”

번개폭풍은 나중을 생각했는지 사람 네다섯 명이 들어가도 될 정도로 큰 움막을 만들어서 닭들의 축사로 삼았다. 닭들은 평소에는 축사 밖에서 나돌아 다니다가 밤이 되면 축사에 들어가 잠들었다.

다 자란 ‘성체’는 아직 영민과 당아영이 각기 내린 두 마리뿐이었지만, 병아리 열 마리 가량이 삐약삐약거리며 어미 닭의 뒤꽁무니를 쫓아 다녔다.

꽤나 귀여운 모습이었던 터라 당아영은 절로 얼굴이 풀어졌고, 에드윙 역시 흐뭇한 표정이 되었다.

테프네트가 나른하게 말했다.

“어린아이들이 닭의 먹이로 쓸 벌레들을 잡으러 다닌단다.”

영상에는 거의 발가벗었다고 해도 좋을 어린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벌레를 잡는 모습이 비춰졌다. 갑충 말고도 애벌레나 지렁이 같은 것들을 솜씨 좋게 잡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좀 살펴볼까.”

영민은 콘솔을 조작해 마을 곳곳을 둘러보았다. 움막이 제법 늘어난 마을에서 부족민들이 생활하는 모습만 보아도 절로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정말 게임 같네.’

예전에 심시티 같은 도시 개발 게임을 했을 때 이런 비슷한 기분을 느꼈던 적이 있었다.

‘아니, 비교할 수 없지.’

저것은 단순히 게임속의 영상이 아니었으니까.

영민은 천천히 마을 곳곳을 둘러보았다.

부족에는 번개폭풍 말고도 다른 유능한 사냥꾼들이 있었다.

번개폭풍이 태어나기 전부터 두각을 드러냈던 사냥꾼인 돌개바람은 부족 내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뛰어난 전사였다.

신천지에 도착한 이래 부족민들은 사냥 말고도 여러 가지 식량수급 방안을 마련할 수 있었다.

강에 나가서 물고기를 잡는 사람도 있었고, 숲에 가서 열매를 따는 사람도 있었다. 일부는 작물을 보다 많이 거두기 위한 방안을 마련코자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사냥이 식량수급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컸다.

돌개바람은 여럿이서 함께 사냥에 나서는 것보다는 홀로 사냥하는 것을 좋아했다. 물론 그런 만큼 강한 맹수를 만나면 위험할 수도 있었고, 정말 큰 사냥감의 경우에는 그냥 포기해야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돌개바람에게는 돌개바람만의 방식이 있었다.

날카롭게 간 돌도끼 몇 자루를 허리에 차고 돌칼로 날을 단 투창을 거머쥔 돌개바람은 오늘은 좀 멀리까지 사냥을 나갔다.

17조가 사냥감을 모아다 주는 것도 한계가 있었던 터라 근방의 사냥감들이 많이 줄어든 탓이었다.

마을에서 거의 이틀 정도 거리를 나아간 돌개바람은 초원에서 사슴 한 마리를 잡을 수 있었다. 아직 덜 자란 놈인지 크기가 그리 크진 않았지만 이 정도면 이틀간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즐거운 마음으로 투창을 회수한 돌개바람은 돌도끼를 내려쳐 사슴의 숨통을 완전히 끊었다. 투창을 맞은 부위가 안 좋았는지 투창을 회수하자마자 피가 콸콸 솟은 터라 주변에 사슴 피 냄새가 잔뜩 번졌다.

돌개바람은 잠시 고민하다가 사슴의 피를 완전히 다 빼내기로 결심했다. 피 냄새를 분산시키지 않으면 피 냄새를 맡고 온 맹수를 상대해야 할지도 몰랐으니 말이다.

경험을 바탕으로 사슴의 동맥 위치를 가늠한 돌개바람은 돌도끼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것을 내려치기 직전이었다.

순간 벼락처럼 자리에서 일어선 돌개바람이 측방을 향해 돌도끼를 집어던졌다. 날카롭고 빠른, 실로 치명적인 공격이었다.

하지만 그 공격의 대상이 된 존재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돌개바람은 거친 숨을 토하며 투창을 고쳐 잡았다.

대략 잡아 스무 걸음 밖.

이 정도 거리까지 다가오도록 눈치 채지 못한 것이 기묘할 정도로 거대한 짐승이었다.

아니, 단순히 짐승이라 말하기 어려웠다. 돌개바람은 태어나서 한 번도 저런 ‘괴물’을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어찌 보면 사람과 닮았다. 하지만 두 팔이 비정상적으로 컸고, 반면에 다리는 짧고 왜소했다. 전신에 난 빳빳한 털은 잿빛이었고, 엉덩이 뒤 쪽에는 기다란 꼬리가 이어져 있었다.

놈의 얼굴에는 털이 나 있지 않았다. 피부는 붉었다. 커다란 입술을 비집고 나온 송곳니가 무척이나 흉측했다.

놈의 노란 눈.

부족에서 제일 큰 번개폭풍보다도 훨씬 더 큰 그것이 돌개바람을 내려다보았다.

이길 수 있을 것인가.

아니,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돌개바람은 절망 속에서 투창을 던졌다.

거의 직선에 가까운 궤적을 그리며 날아간 투창.

괴물은 투창에 맞지 않았다. 그 거대한 덩치에서 나온 속도라고는 믿기 어려운 순발력으로 몸을 날려 투창을 스쳐 보내더니 순식간에 돌개바람과의 거리를 좁혔다.

돌개바람과 괴물이 동시에 비명과 포효, 울부짖음을 토했다. 괴물의 억센 손이 돌개바람의 몸을 움켜쥐었고, 돌개바람은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할 수 없었다. 괴물이 힘을 준 순간 돌개바람의 육신이 허공에서 찢어발겨졌다.

괴물은 돌개바람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괴물의 노란 눈 너머에서 돌개바람을, 17조의 종족인 ‘엘더’의 일원을 바라보는 자가 있었다.

괴물이 고개를 들었다. 돌개바람이 출발했을 거라 여겨지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 ☆ ☆

번개폭풍이 태어나기 이전, 부족 제일의 전사이자 사냥꾼은 벼락소리였다.

번개폭풍의 나이는 이제 겨우 여섯 살 남짓. 번개폭풍에 이어 아이를 둘이나 더 낳은 벼락소리였지만 그 강건함은 조금도 쇠하지 않았다.

하지만 벼락소리는 신천지에 도달한 이후 단 한 번도 사냥에 나서지 않았다. 그녀는 부족의 신인 네 신들의 신화를 정리하고, 그 신화를 부족민들에게 전파하는 일에 주력했다.

부족의 실질적인 지도자는 번개폭풍이었지만, 사람들 사이의 분쟁을 조율하거나 사냥감을 비롯한 각종 식량을 분배하는 일은 모두 벼락소리가 도맡았다. 그녀야말로 ‘엘더’의 행정관이라 할 수 있었다.

신관이자 행정관.

노동에 대가로 식량을 취하는 자.

교환이 성립 가능한 원시적인 시장이 성립되었기에 존재할 수 있는 지위.

벼락소리는 아이들과 함께 닭들 또한 돌보았다. 사냥이나 전투 같은 과격한 일에 능한 그녀였지만 요 몇 년 열심히 노력한 결과 이제는 토기를 만들거나 가죽 옷을 만드는 것 같은 세밀한 일에서도 두각을 드러낼 수 있었다.

벼락소리.

부족의 신관, 종족의 지도자인 번개폭풍의 어머니.

언제나와 같이 평범한 아침이었다. 잠에서 깨어난 벼락소리는 번개폭풍의 동생들에게 각기 젖과 밥을 먹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번개폭풍과 달리 두 동생들은 다른 평범한 엘더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번개폭풍은 신의 전사. 이 세상에 유일무이한 존재.

부족민들 간의 사소한 다툼을 중재해준 그녀는 비슷비슷한 내용의 분쟁이 많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그때 자의적인 판단을 내리기보다는 일정한 규칙을 만들어놓고 그 규칙에 따라 분쟁을 분류하고 판단을 내리면 어떨까.

하지만 아직까지는 그저 발상에 불과했다. 깊이 생각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벼락소리는 밀밭으로 나갔다. 아무렇게나 자란 밀들이 바람에 출렁거렸다. 개중에는 밀알이 많이 열리는 것도 있었고 조금 열리는 것도 있었다. 저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 전부 다 많이 열리게 할 수는 없을까.

지혜로운 하얀 신께서 해결책을 알려주시면 좋을 텐데.

벼락소리는 축사에 가서 닭들을 보았다. 하얀 신께서는 수탉과 암탉이 교미를 해서 알이 태어난다 하셨는데, 가끔 보면 수탉과 암탉이 관계하지 않아도 암탉이 알을 낳는 경우가 있었다.

하얀 신께서 틀리신 것일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암탉 혼자 낳은 알은 결코 병아리가 될 수 없었다. 지혜로운 하얀 신께서는 이번에도 옳으셨다.

벼락소리는 이번에는 움막 하나를 찾아갔다. 마을 귀퉁이에 있는 움막은 깨나 유능한 사냥꾼인 돌개바람의 움막이었다.

움막 안에는 하얀사슴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앉아 훌쩍이고 있었다. 하얀사슴은 이름처럼 호리호리하게 생긴 여인이었다. 돌개바람은 다른 부족민들과 다르게 오직 하얀사슴과만 잠을 잤고, 하얀사슴도 오직 돌개바람과만 잠을 잤다. 마을 여인들이 모두 번개폭풍과 관계하고자 몸이 달았을 때도 그녀는 돌개바람만을 보았다.

벼락소리는 이 둘을 보았기에 하얀 신과 녹색 신의 관계를 ‘부부 신’이라는 개념으로 정의할 수 있었다.

하얀사슴은 벌써 며칠째 돌개바람이 돌아오지 않는다며 우는 소리를 했다. 평소 사냥을 나서면 아무리 멀리 나가도 달이 네 번 뜨기 전에 돌아오곤 했는데, 이번에는 달이 여섯 번이 뜨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순간 벼락소리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들이 스쳐 지났다. 그녀는 사냥을 나섰다가 여러 가지 사고로 목숨을 잃은 사냥꾼들을 제법 많이 알고 있었다.

더욱이 돌개바람은 늘 혼자 다녔다. 유능하긴 했지만 번개폭풍과 달리 평범한 엘더인 그가 상대할 수 있는 맹수에는 한계가 있었다.

혹여 사냥감에게 역습을 당해 목숨을 잃은 것은 아닐까? 아니면 뭔가 사고가 나서 광야에서 죽어가는 것은 아닐까?

벼락소리가 떠올린 것들을 하얀사슴도 떠올렸다. 벼락소리보다 경험이 부족하기에 그 상상은 훨씬 더 단순하고 간단했지만, 돌개바람을 걱정하는 마음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깊었기에 상상의 구체도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벼락소리는 하얀사슴에게 돌개바람의 유능함을 상기시키며 별 일 없을 거라 말했다. 아마 이번에는 좀 더 멀리까지 사냥을 나간 것 같으니 며칠만 더 기다려보자며 하얀사슴을 달랬다.

하얀사슴의 움막을 나서며 벼락소리는 돌개바람의 죽음을 생각했다.

죽음.

죽은 자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죽은 자는 움직이지 못했다. 말도 하지 못했고, 무언가를 먹지도 못했다.

영원한 잠과 같은 것일까? 잠들었다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는 그런 것일까?

그렇다면 죽은 자는 꿈을 꿀까? 영원한 꿈을…….

벼락소리는 저도 모르게 두려운 마음이 들어 양어깨를 끌어안았다. 생각지도 못한, 그야말로 턱 없이 거대한 공포가 마음을 억눌렀기 때문이다.

벼락소리는 두려움을 떨쳐내기 위해 다른 것들을 생각했다. 마을 안에서 뛰어다니며 노는 아이들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그렸고, 때를 맞추듯 물고기를 잡아 돌아오는 마을 남자들을 배웅하였다.

언제나와 같은 하루.

이제 좀 더 시간이 지나면 밤이 올 터였고, 녹색 신의 상징인 달이 떠올라 세상을 은은하게 비추어 줄 터였다.

하지만 그렇지 못했다.

오늘은, 평소와 다른 날이었다.

피 냄새는 강렬했다.

그것은 비릿했고, 다른 것들과는 확연히 비교되는 특별함을 갖추고 있었다.

특히나 강렬한 것은 이제 막 새로 생긴 상처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의 냄새였다.

붉은 피는 생명의 수액이었고, 그것은 곧 영혼의 통화와도 같았다.

생명을 가진 이들은 설사 그것이 타인의 육신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라 해도 피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먼저 피 냄새를 감지한 것은 벼락소리였다.

물고기를 잡다가 온 사내들은 물 냄새가 몸에 베인 데다가 마을 사람들의 환대에 마음이 누그러져 감각이 날카롭지 못했다.

사냥을 나가보지 못하고, 그저 죽은 생명에서 나오는 피만을 보고 맛보고, 맡아본 여인들과 아이들은 생생한 피 냄새에서 낯설음을 느낄지언정, 그것이 무엇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하지만 벼락소리는 아니었다.

지난 몇 년 사냥을 쉬었으나 그녀는 한 때 부족 제일의 전사이자 사냥꾼이었다. 수많은 생명의 피를 직접 취한 자였고, 스스로도 많은 피를 흘려본 자였다.

벼락소리는 그야말로 번개와 같이 돌아섰다. 강가의 정반대편. 그곳에서 피 냄새가 났다. 그리고 그것에 서 있었다.

그것은 참으로 거대했다. 두 손과 입은 온통 붉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마을외곽.

언제 여기까지 접근한 것일까.

저 거대한 짐승이 피 냄새를 풀풀 풍기며 여기까지 왔는데 왜 아무도 몰랐던 것일까.

그것의 손에는 사람의 ‘파편’으로 보이는 것들이 쥐어져 있었다. 저 생생한 피는 아마도 저 파편이 된 이의 것임에 분명했다.

마주침.

벼락소리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저것은 지금까지 그녀가 마주한 그 어떤 짐승보다 강했다. 저것을 이길 순 없다. 약속된 죽음만이 기다릴 뿐이다.

뒤늦게 괴물을 발견한 부족민들이 저마다 비명을 질렀다. 사내들은 물고기를 잡는 데 썼던 작살 등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 순간, 괴물이 지면을 박차 도약했다.

놀라운 속도였다. 더욱이 소리가 나지 않았다. 저렇게 거대한 괴물이 지면을 박찼음에도 땅울림 소리가 크게 나지 않았다.

여인들이 아이들을 감쌌다. 사내들이 두려움 속에서도 고함을 지르며 괴물을 향해 작살을 내던졌다.

하지만 괴물이 너무 빨랐다. 겁에 질려 던진 작살에 힘과 속도가 살아 있을 리 없었다.

순식간에 마을에 난입한 괴물은 손을 거칠게 휘둘러 자신을 향해 쇄도한 작살들을 튕겨냈다. 다른 한 손을 거칠게 휘둘러 가장 가까이에 있던 부족민을 움켜쥐었다.

거짓말 같은 광경이 펼쳐졌다.

부족민의 육신이 터졌다. 마치 과일을 손으로 꽉 움켜쥐었을 때처럼, 과즙이 찢어진 껍질로부터 새어나올 때처럼.

괴물이 한 손에 움켜쥔 부족민을 씹어 먹었다. 뼈를 씹는 소리가 모골을 송연케 했다. 새로운 피가 괴물의 입술 위에 덧씌워졌다.

공포가 마을을 지배했다. 괴물의 노란 눈동자가 다른 부족민들을 하나하나 포착했고, 먹다 만 부족민을 부족민들을 향해 집어던졌다. 공포를 더욱 배가시키며 공중으로 솟구쳐 올랐다.

학살.

막아야 했다. 아니,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무기를 들어야 했다. 하지만 벼락소리는 움직일 수 없었다. 지난 몇 년의 세월이 그녀를 겁쟁이로 만든 것인지, 아니면 낮에 떠올린 죽음에 대한 공포가 그녀의 발을 붙잡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움직일 수 없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뱀 앞의 개구리.

벼락소리를 비롯한 마을 사내들은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다. 괴물은 제멋대로 날뛰며 벌써 열에 가까운 부족민들을 해쳤다.

더는 안 되었다. 벼락소리는 움직이지 않는 발을 잡아끌며 땅에 떨어진 작살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괴물이 벼락소리를 돌아보았다. 마치 벼락소리가 무기를 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돌아섰다.

하얀 신이시여.

벼락소리는 네 신들 가운데 유일하게 대면할 수 있었던 하얀 신을 떠올렸다. 그것은 본능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바로 그 때.

“크허어어어어어어어엉!”

거대한 포효가 울려 퍼졌다. 그것은 괴물의 것이 아니었다. 마을 전체를 짓누른 괴물의 공포를 일시에 날려버리는 혼의 외침이었다.

부족민들은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 알았다. 몇몇은 공포와는 조금 다른 종류의 눈물을 쏟아냈다. 희망을 떠올리는 부족민들이 있었다.

숲으로 이어지는 마을의 입구.

그곳에 선 자.

부족민들을 함부로 해한 괴물에게 공포를 느끼는 대신 무시무시한 격노를 토하는 자.

그는 신의 전사.

번개폭풍이었다.

☆ ☆ ☆

17조 모두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영상을 바라보았다.

갑작스런 괴물의 습격.

말 그대로 괴물이었다. 거대한 고릴라를 닮은 그것은 사람을 가볍게 찢어 죽였다. 그 살과 피를 씹으며 공포를 뿌렸다.

신화 속에나 등장할 것 같은 괴물.

보통 엘더들로서는 저 괴물에 이길 수 없었다. 맞설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그리고 그 때 번개폭풍이 왔다. 부족민들을 구하기 위해, 괴물을 쓰러트리기 위해.

번개폭풍은 신의 전사였다. 17조가 처음에 주어진 신력을 거의 탕진해가며 탄생시킨 위대한 영웅이었다.

하지만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괴물의 힘은, 괴물이 보인 위용은 그만큼이나 절대적이었다.

“번개폭풍이…… 이길 수 있겠지?”

에드윙이 불안한 얼굴로 그리 말했다. 스스로 안심하지 못해 다른 이들의 동의를 구하는 모습이었다.

“지지 않아. 지지…… 않을 거야! 안 진다고!”

당아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렇게 소리쳤다. 하지만 그녀 또한 얼굴에서 불안감을 지우지 못했다. 에드윙과 별로 다를 것도 없었다. 그녀는 소리친 직후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로 영민과 테프네트를 돌아볼 따름이었다.

동의해줘. 그렇다고 말해줘. 번개폭풍이 괴물을 이길 거라 말해줘!

테프네트는 거친 숨을 토했다. 스스로를 진정시키기 위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영민은 마른 침을 삼켰다. 17조는 지금 번개폭풍과 부족민들을 도울 방법이 없었다. 닭을 만들고, 그것을 내리기 위한 신탁에서 영민과 당아영이 함께 등장하는 바람에 신력을 거의 다 소진해버렸다.

“번개폭풍.”

영민은 영상 속의 ‘영웅’을 바라보았다.

번개폭풍은 착하고 순박했다. 그는 부족민들 모두를 아꼈고, 자신이 이들을 위해 신께서 보내신 지도자임을 자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랬기에 분노했다. 태어나서 이토록 격렬한 분노를 느껴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러한 분노와는 반대로, 번개폭풍의 머릿속은 무척이나 냉철한 사고를 진행했다.

어떻게 싸울 것인가. 저 괴물을 어떻게 이길 것인가.

괴물은 거대했다. 완력은 번개폭풍 자신보다 몇 배나 될 것이 분명했다. 팔 또한 훨씬 더 기니, 공격 범위 또한 월등했다.

번개폭풍은 커다란 짐승을 잡아본 적이 있었다. 짐승은 덩치가 크고 무게가 많이 나갈수록 맷집이 좋았다. 투창을 몇 개나 박아 넣어도 미쳐 날뛰던 짐승이 있었는데, 저 괴물은 그 짐승과 크기가 비슷했다.

투창만으로는 승부를 볼 수 없다.

투창은 견제용으로 사용하고 진정한 결판은 근접전으로 봐야만 한다.

번개폭풍은 허리춤에 찬 크고 우람한 돌도끼를 새삼 확인하였다. 손에 쥔 투창을 고쳐 잡았다.

괴물도 번개폭풍이 범상치 않은 존재임을 알았다.

그렇기에 지금까지와 달리 기다렸다. 먼저 섣불리 달려드는 대신 번개폭풍의 움직임을 살폈다.

괴물은 단순한 짐승이 아니었다. 영악하고 교활한 존재였다.

마을 사람들도 덩달아 침묵하였다. 누구 하나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고 마른 침만을 삼켰다.

그리고 다시 어느 순간.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번개폭풍과 괴물이 동시에 지면을 박찼다.

번개폭풍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전력을 다한 던지기를 행했다. 투창은 빛살과 같이 날았고, 평소와 다름없이 투창을 스쳐 보내려 했던 괴물은 예상을 웃도는 투창의 속도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투창이 괴물의 왼쪽 어깨에 틀어박혔다. 어찌나 그 힘이 강했던지 거대한 괴물이 순간 달리던 기세를 잃고 비틀 거릴 정도였다.

그 사이 번개폭풍의 준족은 괴물과 번개폭풍 사이의 거리를 좁혔다. 마치 시간을 정지시킨 것 마냥 엄청난 속도였다.

어깨를 꿰뚫린 고통에 괴물이 고통에 찬 신음을 토하는 사이, 본능적으로 눈을 꽉 감고 아픔을 토로하는 사이 번개폭풍은 괴물의 근방에 다다랐다. 지면을 강하게 박차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모든 짐승에는 급소가 있었다.

아무리 크고 강력한 짐승도 머리가 부서지면 죽기 마련이었다.

번개폭풍은 도끼를 두 손으로 단단히 쥐었다. 허공에서 그의 몸이 활처럼 휘었다.

괴성.

괴물의 머리를 돌도끼로 쪼개놓는 번개폭풍.

그런 장면은 연출되지 않았다. 노리고 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우연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괴물이 마구잡이로 휘두른 오른손이 번개폭풍을 허공에서 강타했다. 무지막지한 힘에 떠밀린 번개폭풍은 마치 허공에서 얻어맞은 날벌레처럼 십여 미터 이상을 날아 바닥을 나뒹굴었다.

부족민들이 신음과 비명을 토했다. 인계를 지켜보던 에드윙은 비명을 삼켰고, 당아영은 번개폭풍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테프네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괴물이 괴성을 토하며 쓰러진 번개폭풍을 향해 질주했다. 제대로 올라가지 않는 왼팔을 버리고 오른팔만을 높이 들어올렸다. 움켜쥔 주먹으로 번개폭풍을 내려쳐 죽일 생각이었다.

번개폭풍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온몸의 뼈와 근육이 비명을 지를 정도로 엉망진창이 된 그였지만 끝끝내 도끼를 놓지는 않았다.

마치 하늘에서 쏟아지는 번개와 같이 괴물의 주먹이 땅을 내려쳤다. 번개폭풍은 그것은 간발의 차로 피했다. 한 팔로나마 도끼를 휘둘러 괴물의 오른팔을 후려쳤다.

도끼자루가 부러졌다. 괴물의 팔이 거의 반 가까이 끊어져 나갔고, 괴물은 다시 고통에 찬 신음을 토했다. 번개폭풍은 필사적으로 발을 놀려 뒤로 크게 물러섰다. 무기가 필요했다. 맨 주먹으론 저 괴물에게 타격을 줄 수 없었다.

무기를!

그것은 분명 호소였다. 하지만 부족민들은 그 호소에 제대로 응답할 수 없었다. 괴물의 곁에 다가가지 못했고, 그것은 번개폭풍의 어미인 벼락소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지체되었다. 번개폭풍은 무기를 쥐지 못했고, 어쩔 수 없다는 듯 주먹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너무 늦어 있었다.

잘 움직이지 않는 왼손으로 도끼날을 뽑아낸 괴물이 도끼날을 아무렇게나 집어던졌다. 부족민들에게 잠시 시선을 돌렸던 번개폭풍을 다시 한 번 후려쳤다.

힘이 다소 빠진 왼팔로 행한 공격이었지만, 애당초 한 손으로 사람을 쥐어짜 죽였던 괴물의 괴력이었다. 끔찍한 소리와 함께 번개폭풍이 다시 한 번 튕겨져 나갔다. 저 일격으로 죽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그런 공격이었다.

하지만 번개폭풍은 죽지 않았다. 아까와는 달리 비틀거리나마 재빨리 다시 일어선 그는 괴물을 노려보았다. 괴물은 오른팔을 포기라도 하듯, 반쯤 잘려나간 그것을 휘두르며 번개폭풍에게 돌진했다.

다시 한 번 지축이 울렸다. 스스로 내려친 오른팔에 전해진 충격 때문에 괴물이 괴성을 토했다. 이번에도 아슬아슬하게 주먹을 피한 번개폭풍이 괴물의 복부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다 큰 사내 여럿의 힘을 한 몸에 갖춘 번개폭풍이었다. 하지만 단순 타격으로 쓰러트리기에 괴물은 컸고, 그 가죽은 두터웠다.

번개폭풍이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격을 꽂아 넣었지만 소용없었다. 괴물은 왼손으로 번개폭풍을 움켜쥐었고, 하늘 높이 들어올렸다. 번개폭풍을 터트리기 위해 왼손에 힘을 주었다.

“끄아아아아아아악!”

번개폭풍이 끔찍한 비명을 토했다. 보통 사람보다 훨씬 더 단단한 번개폭풍의 육신이었고, 투창 때문에 힘이 빠진 괴물이었다. 그렇기에 번개폭풍은 죽지 않고 버틸 수 있었지만, 그렇다 하여 고통까지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뭐라도 해봐! 제발!”

“신력! 신력이 필요해!”

“번개폭풍!”

당아영이 에드윙과 영민을 재촉했다. 에드윙이 콘솔을 연신 조작하며 울분을 토했다. 테프네트가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으아아아!”

벼락소리가 괴성을 토했다. 번개폭풍의 어미인 그는 스스로를 주박한 공포를 이겨냈다. 움켜쥐고 있던 작살을 괴물을 향해 집어던졌다.

그리고 그것이 시작이 되었다. 사내들이 다시 괴물을 향해 작살을 집어던졌다.

하지만 괴물은 영악했다. 벼락소리가 던진 작살 외에는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음을 알았다. 그리고 아주 쉽게 벼락소리를 제압할 방법 또한 알고 있었다.

괴물이 움켜쥔 번개폭풍을 앞으로 내밀었다. 마치 방패로 삼듯 전면에 내세우고 벼락소리를 향해 도약했다.

벼락소리는 새 작살을 던지지 못했다. 괴물은 번개폭풍을 벼락소리에게 집어던졌고, 맞물려 쓰러진 둘 대신 다른 부족민들을 보았다. 마치 땅을 쓸듯 팔을 휘둘러 부족의 사내들을 학살했다.

평범한 엘더 사내들은 번개폭풍과 달랐다. 괴물의 일격을 빗맞기만 해도 뼈가 부러지고 몸의 일부가 떨어져 나갔다.

벼락소리는 기절했다. 마을 사람들은 죽어갔고, 여자와 아이들은 울며 비명을 질렀다.

아비규환.

부족민들이 줄어갔다.

하나하나 쌓아올린 움막들이 부서졌다. 닭들의 보금자리인 축사가 무너졌다.

괴물이 포효했다. 마을 사람들이 울부짖었다.

당아영은 제자리에 주저앉아 아무 말도 못했다. 에드윙은 콘솔을 집어던지고 일어나 괴성을 토했다.

영민은 콘솔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신력이 부족했다. 인계에 영향을 끼칠 방도가 없었다.

이대로 끝나는 것일까? 이대로 17조의 종족 엘더는 끝을 맞이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지킨다. 지켜낸다.

영민은 눈을 크게 떴다.

에드윙이나 당아영, 테프네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번개폭풍이었다. 번개폭풍이 다시 한 번 일어서고 있었다.

번개폭풍은 알았다.

이제는 이길 방법이 없었다. 저 괴물을 쓰러트린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래도 번개폭풍은 일어섰다. 포기하는 대신 발버둥치는 것을 택했다.

종족의 아버지시여.

하늘에 계신 분이여.

괴물이 번개폭풍을 돌아보았다. 번개폭풍은 그런 괴물로부터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제게 힘을 주소서.

당신의 아이들을 지킬 수 있게 하소서.

번개폭풍 하얀 신을 떠올렸다. 몇 번이나 설명을 반복하던 그 모습에서 알 수 있었다. 하얀 신이 얼마나 자신을 아끼는지, 자신들의 부족을 위하는지.

녹색 신은 사납고 난폭했다. 하지만 그녀도 하얀 신과 다르지 않았다. 번개폭풍은 저 밤하늘의 달처럼 환했던 그녀의 웃음을 잊지 못했다. 다정하고 아름다운 황색 신, 많은 것들을 알려준 붉은 신.

괴물이 포효했다. 번개폭풍을 향해 뛰어올랐다.

번개폭풍은 다시 한 번 소망했다. 마음속으로 간청했다. 종족 모두를 짓누른 절망과 공포 속에서 홀로 포기하지 않았다.

종족의 아버지시여.

하늘에 계신 분이여.

자신의 목숨은 상관없었다. 버릴 수 있었다.

힘을 주소서.

부디 당신의 아이들을 지킬 수 있게 하소서!

그것은 ‘기도’였다.

순수하기 짝이 없는 열망이요, 소망이었다.

하늘에 계신 분이여.

번개폭풍과 괴물의 시선이 교차했다.

그리고 그 순간, 소망이 닿았다.

순수한 믿음은, 의지는 힘이 되어 전달되었다.

신력은 어디서 오는가. 신의 힘의 근원은 무엇인가.

“크허어어어어엉!”

번개폭풍이 포효했다. 끝까지 콘솔을 놓지 않던 하얀 신 ‘영민’은 번개폭풍이 되었다. 번개폭풍은 자신의 육신에 지혜로운 하얀 신의 뜻과 의지가 깃듦을 인지했다.

그것은 ‘기적’이었다.

누가 뭐라 해도 우연일 수 없는 신과 영웅의 역사였다.

번개폭풍으로부터 하얀 빛이 일었다. 영민은 진각을 밟았다. 내공을 대신하듯 신력이 번개폭풍의 육신에 힘을 불어넣어주었다.

괴물의 시야에서 번개폭풍이 사라졌다. 에드윙은 탄성을 토했고, 당아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영민과 에드윙의 싸움과 똑같았다. 자세를 바짝 낮춘 번개폭풍이 실로 섬광과 같이 움직여 괴물의 측방을 점했다.

괴물이 급히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반응했을 때는 이미 번개폭풍이 오른 주먹을 당긴 뒤였다.

그것은 일권.

신과 영웅이 함께 내지르는 주먹.

부족민들은 모두 보았다. 원탁에 모인 ‘가짜 신’들은 순수한 신력의 폭발을 목격하였다.

콰가가가가가가가강!

굉음이 세상을 뒤덮었다. 회전이 더해진 주먹이 괴물의 육신을 침범하였고, 순백의 신력이 괴물의 육신에 파고들었다. 그 내부를 진탕으로 만들었다.

괴물은 제대로 된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거짓말처럼 허공에 떠올라 몇 미터를 밀려간 괴물은 새빨간 피를 토하며 제자리에 고꾸라졌다.

번개폭풍이 거친 숨을 토했다. 그의 몸에 깃들었던 하얀 신의 의지가 다시 인계를 떠났다. 번개폭풍은 감사하며 제자리에 무너지듯 쓰러졌다. 거친 숨을 토했다.

부족민들이 울음과 함성을 동시에 터트렸다.

“영민아! 야! 영민!”

에드윙이 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급히 영민에게 다가갔다. 당아영도 서둘러 의자 위에 축 늘어진 영민의 손을 붙잡았다.

“지켜냈어! 번개폭풍이 괴물을 쓰러트렸다고!”

“영민아! 네가 해냈구나!”

영민은 에드윙과 당아영, 테프네트에게 응답하지 못했다. 온몸에 힘이 없었다. 마치 번개폭풍의 피로를 똑같이 느끼듯 의식이 자꾸만 약해져 갔다.

영민은 눈을 감기 전에 마지막으로 영상을 보았다.

번개폭풍의 미소를 보았다.

영민 역시 미소 지었다. 당아영의 손길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17조의, 번개폭풍의 승리였다.

신력으로 창조된 괴물이 죽음을 맞이했다.

괴물을 만든 자는 그것을 감지했다. 괴물의 눈을 통해 영웅의, 그 영웅과 부족의 ‘가짜 신’의 힘을 기억했다.

언젠가는 정면에서 마주할 날이 오리라.

괴물을 만든 자는 무척이나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