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 Maker

Chapter 28 Return

세상의 모든 이야기, 전설, 신화에는 ‘끝’이 존재하는 법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영웅의 이야기 또한 다르지 않았다.

헤라클레스, 지크프리드, 아킬레스 같은 비극적 결말을 맞이한 영웅들.

오디세우스나 페르세우스처럼 행복한 여생을 보낸 영웅들.

‘역사’가 아닌 ‘이야기’는 구전되는 과정에서 시대의 바람을 따라 변모하기 마련이었다.

이야기의 끝. 그 결말의 처리.

그것은 이야기를 향유한 이들의 바람과 소망, 사상과 밀접하게 닿아 있었다.

☆ ☆ ☆

“간밤에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아침 무공 수련을 마친 직후, 유독 평소보다 밝은 영민의 얼굴을 보고 검은곰이 물었다. 영민은 기쁜 걸 감추지 않고 껄껄거리며 답했다.

“흐흠, 아미, 뭐 그냥 좋은 꿈을 꿨지. 좋은 꿈을.”

“좋은 꿈?”

검은곰이 고개를 갸웃하는데 번개폭풍이 다가왔다. 영민과 검은곰의 대화를 들었는지 말을 보탰다.

“아침부터 냇가에 달려가서 몸을 씻더라. 상쾌한 하루를 위함이 분명하다. 목욕재계는 좋은 것이지.”

다소 엉뚱한 이야기였지만 영민은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몇 번 더 웃은 뒤 엘더들의 ‘수뇌부’와 나눠야 할 이야기를 꺼냈다.

“잡담은 이 정도로 하고. 간밤에 신탁을 받았다.”

“신탁?”

“그래, 녹색 신님의 신탁이었다. 우리 앞길에 다른 종족이 있…… 둘 다 표정이 왜 그렇지?”

검은곰과 번개폭풍, 특히 번개폭풍의 표정이 괴이했다. 무언가 이상한 것을 목격한 사람의 얼굴이랄까?

번개폭풍은 몸을 뒤로 살짝 빼더니 일단 하늘을 쳐다보았다. 밝은 대낮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번개폭풍은 누가 들을까 두려워하는 것처럼 소리 죽여 말했다.

“아니, 어떻게 녹색 신님의 신탁을 받았는데 그렇게 행복한 표정을 짓는 거지?”

“어……?”

“세 번 끊어 말씀하시지 않았나? 가르침을 주신다거나?”

“아니, 그게…… 가르침을 주시긴 했지. 우리 앞길에 다른 종족이 있는 것 같으니 조심…… 하라고.”

영민을 쳐다보는 번개폭풍의 눈빛이 더더욱 이상해졌다. 그때 가만히 듣고 있던 검은곰이 퍼뜩 놀라 말했다.

“헉! 그러고 보니 전에 작은나무에게 들은 것 같다. 쿨러들 가운데 맞는 걸 즐기는 이상한 녀석이 있다고…….”

검은곰과 번개폭풍은 마치 병이 옮을까 두려워하는 사람마냥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영민이 황당한 마음에 그냥 쳐다만 보자 번개폭풍이 다시 헛기침을 터트렸다.

“흠흠, 괜찮다. 라무. 우린 다 이해할 수 있다.”

대체 뭘 이해한다는 걸까.

해명하자니 그게 더 꼴이 우스웠던 터라 영민은 일 이야기에나 집중하기로 했다.

‘나중에 돌아가면 아영이랑 이야기 좀 해 봐야겠네.’

인계의 반응이 이럴 줄이야. 역시 위에서 쳐다만 봐서는 알 수 없는 것들이 많은 것 같았다.

번개폭풍과 검은곰 두 사람과 이야기를 마친 영민은 가주들에게도 대략적인 뜻을 전했다.

전투태세를 갖춘 채 기동. 이후 특정 지점에서부터는 영민과 번개폭풍이 앞서 나가 정찰을 한다.

다른 종족과 조우할 수도 있다는 말에 가주들 모두가 긴장했지만 이미 초원에서 괴물들과의 싸움을 겪어본 유목민들이었다. 상대가 같은 인간이라면 오히려 더 나았다.

영민은 후방의 일반인들을 호위할 최소한의 병력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를 전방으로 이끌어냈다. 여차하면 바로 총력전을 펼칠 계획이었다.

완만한 능선이 시작되어 바위산까지 이어진 곳. 일행 모두를 멈춰 세운 영민은 로움을 앞으로 몰아나가며 말했다.

“검은곰, 가주들과 함께 이곳에서 대기해. 나와 번개폭풍이 보고 올게.”

당아영이 알려준 지점이었다. 바트의 추론상 바위 산 인근에 이종족의 마을이 있을 터였다.

정찰에 나서는 것은 기동력과 개인전투력 모두 압도적인 영민과 번개폭풍. 두 사람이라면 설사 백 명이 넘는 적들에게 둘러싸여도 무사히 탈출할 수 있을 터였다.

“알았다. 조심해라.”

검은곰은 자신도 따라 나서겠다 욕심을 내는 대신 유목민들과 남은 엘더들의 지휘라는 의무를 받아들였다.

스스로가 전사인 동시에 ‘장군’이란 사실을 명확히 인지했기 때문이다.

가주들에게도 시선으로나마 가볍게 인사를 건넨 영민은 로움에서 뛰어내렸다. 번개폭풍과 동시에 황색 신의 신성마법을 사용한 뒤 지면을 박찼다.

정비된 도로라면 모를까, 단순한 ‘길’은 말 그대로 세월의 산물이었다. 사람이 많이 오가면 그곳에 자연스럽게 길이 생겨난다.

그런 길이 존재했다. 바위산까지 쭉 이어져 있었고, 완만한 능선 몇 개를 넘으니 마을 비슷한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군데군데 보이는 목책. 몇 개 안 되긴 하지만 멀리서 봐도 건축물임을 알 수 있는 덩어리들.

영민은 말없이 번개폭풍을 돌아보았고, 번개폭풍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소리 없이 지면을 박찼다.

바위산에 숭숭 뚫린 작은 동굴들을 기반으로 한 마을이었다. 목책 바로 앞까지 도달해 자세를 낮춘 번개폭풍은 미간을 찌푸렸다.

“인기척이 없다.”

한창 일할 때의 젊은 남녀들 만으로 마을이 이루어질 수는 없었다.

어린아이, 아직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아기, 부상이나 여러 가지 이유로 거동이 불편한 자. 집에서 이런저런 일을 하는 사람들.

그런 자들만 몇 남아도 마을이 이렇게 조용할 수는 없었다.

“그래, 이상할 정도야. 이렇게나 흔적이 많은데 말이야.”

소리 죽여 답한 영민은 천천히 상체를 세웠다. 한 번 숨을 크게 삼킨 뒤 용기를 내 목책을 뛰어넘었다.

그리고 잠시 후, 번개폭풍과 마을을 돌아본 영민은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텅 비었어. 아무도 살지 않는 마을이야.”

대략 이백 명 정도가 살고도 남을 규모의 마을이었다. ‘동굴집’은 마흔 개가 넘었고, 마을 내에 세워진 움막도 열 채 가까이 되었다.

그런데 아무도 없었다. 마을 내부는 고요하기만 했다.

‘이미 예전에 멸망한 부족인걸까?’

과거 넥타르들이 살았던 마을을 찾아가면 이곳과 비슷한 느낌을 풍길 터였다. 백 명도 넘는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규모지만 아무도 살지 않는 마을.

그렇다면 과연 언제쯤 없어진 마을인 걸까. 이 마을에 살던 이들은 넥타르들처럼 다른 종족의 마을로 모두 이주한 것일까?

‘얼마 전까진 사람이 살았던 게 분명해. 일사불란한 이주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아.’

곳곳에 불을 피웠던 흔적이 잔뜩 이었다. 특히나 동물을 해체하다가 만 집이 있다는 것이 결정적이었다.

‘강제이주? 그래서 정리를 못하고 떠난 건가?’

답답했다. 여기저기 단서가 널려 있었지만 영민 자신에겐 바트 같은 분석능력이 없었다.

‘신계에서 지켜보고 있겠지?’

반사적으로 하늘을 한 번 돌아본 영민은 그래도 뭔가 더 단서가 될 것이 없나 싶어 움막 안을 다시 살펴보았다. 그런데 관찰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라무!”

번개폭풍의 부름이었다. 꽤나 다급한 그 목소리에 영민은 하던 일을 제쳐두고 몸을 날렸다. 걸어온 방향의 반대편, 그러니까 바위산 아래쪽이었다.

“무슨 일…… 헉!”

영민은 말을 제대로 끝맺지 못했다. 분지 아래 펼쳐진 ‘처참한 광경’이 영민을 압도했기 때문이다.

반경 100미터는 됨직한 분지 바닥에 검붉은 선이 잔뜩 그려져 있었다. 만화책에서나 볼 수 있었던 주술진 비슷했는데, 비단 주변에 떨어진 ‘살점’들과 뼛조각들이 아니어도 저 선을 이루고 있는 검붉은 액체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코끝을 자극하는 혈향.

벌써 며칠, 어쩌면 한 달 이상이 지났을 터인데도 강렬한 그 향기.

더욱이 그것만이 아니었다.

분지로부터 일어난 사악한 기운이 영민을 압박했다. 영민의 숨이 거칠어졌다. 온몸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경험해 본 적이 있었다. 아주 같은 것은 아니었지만, ‘비슷한 것’을 느껴본 경험이 있었다.

“라무! 괜찮나?! 라무!”

번개폭풍이 놀라 영민에게 달려왔다. 영민은 그런 번개폭풍 대신 분지 중앙을 바라보았다. 저도 모르게 뇌까렸다.

“번개 신…….”

종족을 잃고 ‘악마’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던 가짜 신.

이제는 엘더들에게 데코르라 기억되는 자.

이 흔적은 무엇일까. 다른 곳에서 영민 자신과 번개 신 사이에 있었던 일과 비슷한 일이 발생한 것일까?

“라무!”

부름에 영민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자신의 코앞에 걱정 가득한 얼굴로 선 번개폭풍을 보았고, 이내 자신의 양 뺨을 세게 때려 정신을 회복했다.

“돌아가자. 최대한 빨리 이 마을을 이탈하는 게 좋겠어.”

“좋다, 나도 이런 곳엔 더 있고 싶지 않다.”

영민과 번개폭풍은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고 분지를 빠져나왔다. 저만치 먼 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검은곰과 가주들을 향해 달렸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텅 빈 마을을 떠난 이후에도 영민과 유목민들은 많은 위협과 조우했다.

과거 번개폭풍이 물리친 적이 있는 괴물 사자 라카차이도 두 번이나 마주쳤고, 무리지어 다니는 늑대 떼와도 조우했다. 개중 가장 큰 위협은 백 명쯤 되는 이종족과의 전투였다. 철저하게 원거리 전으로 끝났기에 결국 제대로 된 정보를 얻어낼 순 없었지만 무기나 차림새를 보아 제대로 된 문명을 꾸린 종족임이 분명했다.

초원을 나선 지 일 년.

영민 혼자가 아니었기에 자연 시간이 더 많이 걸릴 수밖에 없었고, 그 긴 여정 사이에 생이 다해 죽음을 맞이한 이도, 새로이 태어나 세상에 선 이도 있었다.

그 일 년.

엘더들에게는 귀환을 위한 여행, 유목민들에겐 새로운 땅을 위한 여정.

그리고 마침내 도착할 수 있었다.

“저곳이야.”

로움을 타고 선두에 선 영민이 손을 들어 먼 곳을 가리켰다.

엘더들의 땅.

황금빛 물결이 바람을 따라 출렁였다. 번개폭풍과 검은곰이 마을을 떠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드넓은 밀밭이었다.

낮과 밤의 경계.

하늘을 불사르던 태양은 그 마지막 흔적을 지평 너머에 흩뿌렸다. 황금빛 밀밭에 더욱 새로운 빛을 더하였다.

바람이 불었다. 따스한 냄새를 전해주었다.

음식을 만들며 나는 냄새, 장작을 태우는 냄새.

목소리도 들렸다.

유목민들이 엘더들을 발견했듯이, 엘더들 역시 유목민들을 발견했다. 밑밭에서 일하던 이들은 하나 같이 일어나 손을 흔들었고, 신탁을 받아 대기하고 있던 이들은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유목민들을 향해 내달렸다.

“번개폭풍!”

“검은곰!”

녹색번개와 하얀사슴이었다. 그들 뒤에는 하얀유성과 녹색유성을 안고 선 벼락소리가 있었다.

번개폭풍과 검은곰이 로움에서 뛰어내렸다. 각자 사랑하는 연인을 향해 질주했다. 반가운 이들이 있는 것은 번개폭풍과 검은곰만이 아니었다. 다른 엘더들 역시 자신을 마중 나온 가족들을 향해 달렸다.

그 모든 광경.

일 년 사이 변한 엘더들의 마을.

신으로서, 신탁을 통해 마주할 때와는 달랐다.

직접 그 속에 들어와 바라보았기에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하하하! 라무! 이쪽이…….”

녹색번개를 끌어안고 기뻐하던 번개폭풍이 말끝을 흐렸다. 하얀사슴과 열정적인 키스를 나누던 검은곰 또한 깜짝 놀라 돌아섰다.

가주들 사이.

영민이 빛나고 있었다. 그 몸에서 새하얀 빛의 입자가 바람을 따라 퍼져나갔다.

하얀 신의 아바타.

저 먼 곳에서 악마와 괴물의 군세를 무찌르고 새로운 엘더들을 구원한 이.

일 년이 넘는 긴 여정 동안 온갖 어려움 속에서 모두를 이끈 자.

그 모든 이야기.

그와 함께 여정에 나섰던 이들 모두가 기억하는 아바타의 ‘신화’.

“하늘로 돌아간다. 화신이, 라무가.”

번개폭풍이 말했고, 검은곰은 눈시울을 붉혔다. 가지 말라 외치는 대신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새하얀 빛에 휩싸인 영민이 조금씩, 조금씩 공중으로 떠올랐다. 새삼 초원에서의 결전이 떠오른 하라갈 가주는 라무의 이름을 크게 외쳤다. 다른 유목민들 또한 그러했다.

“무공 수련 열심히 할게요!”

“잘 가시오!”

“그 이름! 영원히 기억하겠다!”

“이 나쁜 놈아! 잘 가!”

마지막은 하얀발이었다. 그녀는 엉엉 울며 영민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하얀사슴과 녹색번개도 영민을 보았다. 저 멀리서 벼락소리가 환희에 찬 미소를 그렸다.

완성된 저수지, 정비된 농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엘더들.

영민은 마지막으로 번개폭풍을 보았다.

사대신 모두의 아이.

엘더의 지도자.

용맹무비한 전사이지만 동시에 아이처럼 순박한 마음을 가진 자.

“라무.”

번개폭풍이 움켜쥔 주먹을 하늘을 향해 내뻗었다. 내공이 실린 그 일수에 영민은 마주 주먹을 내지르는 것으로 응답해 주었다.

바람이 불었다. 빛의 입자가 흩날렸다.

저 멀리 하늘, 구름 사이로 보이는 17조의 신계.

귀환의 날.

하얀 신의 아바타 ‘라무의 신화’가 그 끝을 맞이하였다.

☆ ☆ ☆

신들의 귀환, 신화의 끝.

우연일까, 아니면 필연일까.

거의 같은 시기에 자신들의 신계로 귀환한 신들이 있었다.

“제우스!”

아름다운 삼중창에 제우스는 기꺼운 미소를 그렸다. 오랜만에 맞이한 자신의 ‘연인들’에게 인사했다.

“오오, 이렇게 다시 보니 다들 정말 아름다…….”

“대체 밑에서 애를 몇이나 낳은 거야!”

헤라가 윽박질렀고, 제우스는 다시 한 번 껄껄껄 웃었다.

“신혈을 이은 아이들! 미래의 영웅이 될 그 아이들에게 내가 이름을 하나하나 붙여주었지. 헤라클레스, 아테나클레스, 아르테미스클레…….”

“이 바람둥이가!”

헤라가 제우스의 뺨을 때렸고, 아테나가 정강이를 걷어찼고, 아르테미스가 그 복부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세 여신들은 미리 짜기라도 했는지 흥하고 돌아서서 방을 나섰다. 누구 하나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오오, 이것이 본체의 아픔인가. 새삼 새롭군.”

“하여간 말은 잘해요.”

까르르 웃으며 나타난 것은 아름다움의 여신인 아프로디테였다.

백금발을 길게 기른 그녀는 우아하게 걸어 제우스 앞에 섰고, 제우스는 당연하다는 듯이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 목과 가슴에 입 맞추며 말했다.

“물론 하계에는 아프로디테클레스도 있지.”

그리스로마 신화의 제우스는 헤라를 달래줄 요량으로 인계에서 낳은 아이에게 헤라의 영광, 헤라클레스란 이름을 붙여주었었다.

그와 별로 다르지 않은, 그리고 신화와 마찬가지로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할 제우스를 보며 아프로디테는 끌끌끌 혀를 찼다. 무어라 길게 말하는 대신 다른 여인들의 싸움 덕에 자기 혼자 독차지할 수 있게 된 제우스의 입술을 깨물었다.

☆ ☆ ☆

“왕자님.”

“오라버니!”

환대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신성 브리타니아 왕국의 적법한 계승자.

인계에 ‘요정신검의 영웅’을 널리 알린 크누트 팬드래건은 가신들과 여동생을 한 번씩 끌어안았다. 참고 인내하는 대신 끓어오르는 열정을 모두 드러냈다.

인계에서 보고 들은 것.

그리하여 새로이 생각해낸 것, 앞으로 브리타니안들이 해야 하는 일들.

“기꺼이 따르겠나이다, 나의 주군이시여.”

왕의 마법사 멀린이 허리를 숙였고, 다른 원탁의 기사들도 따랐다. 크누트는 싱그러운 미소와 함께 요정신검 엑스칼리버를 움켜쥐었다.

☆ ☆ ☆

“너는 지상에 남아라. 이곳에서 너와 나의 아이를 낳아라. 그리고 그 아이로 하여금 종족을 지배하게 해라.”

자색 빛의 입자로 화하며 와이즈맨이 명하였다. 바닥에 납작 엎드려 와이즈맨의 발등에 입술을 맞춘 러스트는 부풀어 오른 배를 어루만졌다. 몇 번이나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나의 주인님.”

과거의 가짜 신이었던 러스트는 이제는 일종의 신수와도 같았다. 그녀는 얼마든지 지상에 머물 수 있었고, 와이즈맨과 그녀 사이의 아이를 낳는 것도 가능했다.

아바타와 신수의 아이.

신혈을 이은 강력한 영웅의 탄생.

오크의 지배자가 오크여야만 하는가? 그렇지 않다.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다.

“그만 신계에 오르시지요, 주인님.”

와이즈맨의 천사와 악마.

러스트와 마찬가지로 와이즈맨에게 복속된 가짜 신, 천사 위즈는 화려한 금발을 흩날리며 속삭였고, 와이즈맨은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인계를 바라보는 대신 저 하늘 너머에 있는 자신의 신계를 바라보았다.

☆ ☆ ☆

“영민아!”

에드윙이 영민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것만으론 부족한지 아예 높이 들어 올렸고, 테프네트는 영민의 손을 붙잡았다. 바트와 아스카는 환한 미소로 영민을 반겨주었다.

그리고 한 사람.

영민이 누구보다 그리워했고, 마찬가지로 영민을 가장 그리워했던 여인은 가만히 서서 두 팔을 벌렸다.

에드윙이 영민을 내려주었다. 영민은 단번에 뛰어가 당아영을 와락 끌어안았다.

“어서와.”

“다녀왔어.”

당아영의 냄새, 당아영의 체온.

영민은 비로소 자신이 돌아왔다는 것을 실감했다. 아바타 라무가 아닌, 하얀 신 영민으로서 신계에 선 자신을 느꼈다.

“그런데 말이야.”

당아영이 영민을 살짝 밀어냈다. 경직된 웃음 속에 물었다.

“아까 그년은 누구야?”

영민에게 나쁜 놈이라 외치던 하얀발.

영민은 눈동자를 굴렸고, 당아영은 눈썹을 곤두세웠다.

“아무 일도 없었어.”

“아무 일도?”

영민은 대답하는 대신 당아영을 와락 끌어안았고, 버둥거리는 그녀에게 키스했다. 잠시 저항하던 당아영이었지만 결국엔 그런 영민을 받아들였다.

황금빛 밀이 들판을 물들이는 계절.

하얀 신의 귀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