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 Maker

Chapter 44 Spring Day

믿음, 체계, 건물.

얼핏 보면 이질적인 단어들이었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존재했다.

셋 모두 쌓기는 어려웠지만, 무너트리기는 쉬웠다.

☆ ☆ ☆

마왕군과 신화 연맹의 전투로부터 이틀 후.

먼발치에서나마 전후 처리를 관찰하던 유더와 원탁의 기사들은 임시 주둔지로 돌아갔다.

신화 연맹은 집결시켰던 군대의 절반만을 해산시켰다. 어딘가를 공격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전후처리와 치안유지를 위해 군대를 유지하는 느낌이었다.

신화 연맹은 분명 패했지만, 양적인 면에서 보자면 대패했다고 할 수 없었다. 애당초 목적이 마왕군의 ‘격퇴’였으니 다소 무리가 있긴 했지만 ‘이겼다’라고 주장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민심이 불안을 표했다. 전투에 나섰던 신화 연맹의 군대는 모두가 신화 연맹의 ‘국민’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신혈자들이 우수수 죽어나가는 것을 보았다. 신화 연맹 최강의 전사인 다리우스가 무참히 패하는 모습 또한 목격하였다.

격퇴한 것이 아니었다.

적이 물러가 준 것이었다.

그 차이는 컸다.

“언제까지 이곳에 머물 순 없으니 두 명 정도만 남기고 나머진 철수시키려고 한다.”

영민과 크누트는 각자 가루라와 유더를 통해 서로에게 뜻을 전했다. 강한 신력을 가진 신수와 신혈자를 일종의 전화기로 삼은 셈이었는데, 짧은 대화를 나누는데도 상당한 신력을 소모하는지라 효율이 썩 좋지는 못했다.

크누트가 먼저 돌아가겠다는 뜻을 밝혔다. 예상한 이야기였던 터라 영민 또한 즉답했다.

“이쪽도 표식 정도만 남기고 돌아갈 생각이야.”

“그거 참 편리하군.”

신력은 한정되어 있었다. 각 종족마다 신력의 생산량은 분명 다를 터였지만, 어찌되었든 그 양이 무한하지 않다는 것만은 동일했다.

선택과 집중.

어디에 신력을 사용할 것인가. 신력으로 어떤 일을 행할 것인가.

원탁의 기사 가운데선 베디비어와 피오라가 남았다.

서방신수 가루라는 그간 정이 꽤 든 원탁의 기사들과 헤어지는 것이 섭섭했는지 여기사 이졸데의 품안에서 뭉그적거렸지만 그렇다고 함께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유더와 원탁의 기사들이 브리타니안으로 떠났다. 가루라 역시 엘더의 땅을 향해 날아올랐다.

가루라에게 귀환 명령을 내린 영민은 귀에 대고 있던 콘솔을 내려놓았다. 이제부터는 17조 간의 회의 시간이었다.

영민의 통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 에드윙이 먼저 입을 열었다.

“와이즈맨의 속셈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이번 싸움이 신화 연맹에게 상당한 타격을 준 건 분명해. 일단 다른 거 다 제쳐두고 신혈자가 절반이나 죽었으니 말이야.”

신혈자는 군사 부문에서 굉장히 쓸모가 많은 만능 인력이었다.

신혈자 다섯의 죽음은 전사 다섯의 죽음과는 그 의미부터가 달랐다. 신화 연맹은 유능한 장수 다섯을 잃었고, 평범한 인간으로 그 빈자리를 채우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울 터였다.

“근데 걔들 신혈자라고 하기에는 뭔가 좀 약해 보이던데? 그냥 와이즈맨네 애가 센 건가?

아스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하자 에드윙이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와이즈맨네 애’라니까 뭔가 되게 없어 보인다.”

“아무튼.”

사실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고 말이다.

아스카는 당아영에게 살짝 눈짓을 줬다. 아무래도 의견을 구하는 신호인 것 같았다. 당아영은 잠시 망설이는 것 같더니 조곤조곤한 어조로 말했다.

“확실히 격이 다르긴 했어.”

“그치?”

“하지만 내가 말하는 건 신체능력의 차이가 아냐. 제대로 실력 발휘를 못해서 그렇지 신화 연맹의 신혈자들도 신체능력 자체는 탁월했어.”

캄비세스는 보통 사람은 당기지도 못할 것 같은 크고 강한 활을 썼다. 키루스의 몸놀림은 빨랐고, 가우타마 역시 괴력의 소유자였다.

“그럼 대체 무슨 차이인데?”

“음… 그러니까 경험과 전투감각의 차이야. 와이즈맨의 신혈자는 신화 연맹의 신혈자들보다 훨씬 더 싸움에 익숙해.”

“비행능력의 유무가 아니라?”

아스카가 바로 다시 물었다. 싸움의 문외한인 아스카가 보기에 가장 눈에 띄는 마왕의 강점은 비행능력이었으니 말이다.

당아영은 팔짱을 끼고 미간을 살짝 좁히더니 몸을 살짝 영민 쪽으로 기울이며 답했다.

“비행능력이 굉장하긴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야. 녀석은 굉장히 효율적으로 싸웠어. 그런 건 타고나는 것도 있지만 아무래도 경험이 중요해. 이런저런 규칙이 많은 대련 같은 게 아니라 어떻게든 적을 죽이기만 하면 되는 진짜 싸움 경험 말이야.”

마왕의 전투법은 굉장히 유기적이면서 변칙적이었다. 캄비세스를 이용해 키루스를 죽일 때 당아영은 저도 모르게 감탄하고 말았다. 얼핏 보면 별거 아닌 일이었지만, 목숨이 오가는 실전에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웠다.

“흠, 싸움의 여신께서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에드윙이 정리했고, 당아영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약간이지만 으르렁거렸다.

테프네트가 영민에게 물었다.

“영민이 네 생각은 어떠니?”

“신혈자라고 해도 차이가 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 신혈자들이 강한 건 탁월한 육체능력에 막강한 신성력이 더해져서잖아? 그런데 저들의 아버지, 어머니는 이제 주신이 아냐. 신이 엄청나게 많은 신화 연맹의 신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지. 그래서 이래저래 좀 약화된 게 아닌가 싶어. 음, 뭐 어디까지나 가설이지만 말이야. 아영이가 말한 경험과 전투감각의 차이도 물론 있을 테고.”

묻기 전부터 대답할 말을 생각해 두기라도 했는지 꽤나 긴 말을 쉼 없이 쏟아내는 영민이었다. 에드윙과 아스카는 저도 모르게 웃었고, 테프네트는 나른한 미소로 화답했다.

“영민이 네 가설이 맞으면 좋겠구나.”

어쩐지 모르게 부끄러운 마음이 든 영민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모두를 보며 말했다.

“신화 연맹은 이번 피해를 수습하느라 한동안 정신이 없을 거야. 와이즈맨의 신수들에게 파괴당한 오른쪽 꼭짓점 마을테베은 신화 연맹의 식량창고 역할이었던 것 같으니까.”

“신혈자가 반 이상 죽었고, 어찌되었든 전투는 패했다. 도시 하나는 파괴되었고 식량도 부족하다. 잘나고 높으신 분들은 스트레스가 팍팍 쌓일 테고, 짓밟히던 이들은 반발하겠지. 당분간은 내부 수습하느라 정신없겠네. 가능성은 좀 낮지만 제대로 반란 같은 게 일어날 가능성도 있고.”

아스카가 덧붙인 말대로였다. 신화 연맹의 계급체계는 기껏해야 십 년 남짓 운영된 것에 불과했다. 지금 같은 위기상황이라면 얼마든지 흔들릴 여지가 있었다.

“신화 연맹과 우리 사이에는 ‘거리’라는 방벽이 있긴 하지만 안심할 순 없어. 앞으로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나름대로 내실을 다져야만 해.”

엘더와 신화 연맹 사이의 거리는 향후 몇 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멀었다. 하지만 신화 연맹은 엘더의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서부의 와이즈맨에게 패한 지금 나레수안이 어떤 판단을 내릴지는 아무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럼 전에 말한 일을 일단 추진하자꾸나. 내실도 다질 겸해서 말이다.”

테프네트가 언제나 그렇듯이 부드럽게 말했다. 당아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전에 말한 일?”

“하얀유성의 결혼식.”

꼬마신랑과 꼬마신부.

당아영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 ☆ ☆

“동시다발적인 공습을 개시할 준비는 모두 끝난 것 같군.”

다음날 아침, 17조 모두가 원탁에 모이자 에드윙이 자리에서 일어나 장군처럼 선언했다. 저혈압인 터라 아침에 약한 아스카는 퀭한 눈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개소리는 작작하자, 우리.”

17조는 헬멧 형태로 변형시킨 각자의 콘솔을 머리에 쓰고 있었다. 에드윙의 말마따나 여러 명에게 같은 신탁을 내리기 위함이었다.

“다 같이 같은 꿈을 꾸면 설득력이 높아지지 않겠어?”

아스카의 야유에도 불구하고 에드윙은 콧바람을 슝슝 내뿜으며 기운차게 말했다. 아스카는 이번에도 부정적으로 대꾸했다.

“그냥 번개폭풍이나 작은나무 중에서 한 명한테만 해도 되는 거 아냐? 살짝 신력낭비 느낌인데.”

하얀유성과 검은빛을 결혼시켜라.

이 신탁을 전하기 위해 17조는 관계자 여섯 명을 선택했다.

결혼 당사자인 하얀유성과 검은빛, 두 사람의 부모 네 사람.

사실 아스카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그냥 당사자의 부모 네 사람 가운데 한 명을 골라서 신탁만 내려도 같은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을 터였으니 말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신들의 명령인 데다가 애당초 서로 좋아하는, 사실상 미래를 약속한 하얀유성과 검은빛이지 않은가.

에드윙은 끌끌끌 혀를 차며 영민에게 턱짓을 했다. 아무래도 설명을 떠넘기려는 모양이었다.

“그간 신탁이 너무 번개폭풍 한 사람에게 편중되기도 했으니까. 이번 기회에 번개폭풍 말고 다른 이들에게도 신탁을 내리는 것도 좋을 것 같아. 더욱이 우리가 노리는 건 단순히 하얀유성 한 명의 결혼이 아니라…….”

“사회 전반적인 조혼의 권장 말이니?”

테프네트가 말했고, 영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 음. 그렇지. 인구증가를 위해서.”

하지만 그래도 너무 어리긴 했다. 몸은 이미 다 자랐지만 말이다.

“너무 일찍 결혼하는 것도 문제가 있을 것 같은데…….”

당아영이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소심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이번 신탁이 탐탁지 않은 듯했다.

“그래서 권장이잖니, 강제가 아니라.”

“으응.”

평소답지 않은 것은 테프네트도 마찬가지였다. 언제나 한 발 물러서서 17조를 지켜봐 주던 그녀가 이번에는 적극적으로 일을 추진하고 나섰으니 말이다.

아스카가 다시 말했다.

“식량생산량 고려해가며 인구를 늘려야 해. 초원에서 온 유목민들 이후에 합류한 부족과의 혼혈은 기존의 엘더보다는 자식도 더 많이 낳잖아? 대신 수명도 더 짧긴 하지만 말이야. 인구 증가율이 우리의 예상을 벗어날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어.”

타당한 말이긴 했지만 약간은 핀트가 어긋난 이야기이기도 했다.

아스카의 의중을 짐작한 테프네트가 작은 어깨를 약간이지만 늘어트렸다.

“어쩐지 다들 이번 결정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 같구나.”

“아니, 그런 건 아냐. 그렇지?”

당아영이 얼른 부정하며 아스카 쪽을 보았지만 아무래도 아스카는 당아영과 생각이 다른 모양이었다. 그녀도 테프네트를 무척이나 좋아했고, 그녀가 모처럼만에 의욕을 보인 일을 지원해 주고 싶었지만 그래도 따질 것은 따져야만 했다.

“테프 언니는 엘더들이 빨리 결혼했으면 하는 이유라도 있어? 인구증가 목적 말고 말이야.”

영민도 당아영도 테프네트에게는 너무 약했다. 에드윙은 테프네트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게 분명했고 말이다. 바트가 남긴 했지만 여자에게 싫은 소리를 못하는 성격이다 보니 이번에도 그저 침묵할 뿐이었다.

17조 내에서 테프네트에게 이런 식으로 정면공박을 펼칠 수 있는 건 아스카뿐이었다.

테프네트는 잠시 주저하는가 싶더니 이내 자세를 바로 하며 조곤조곤 답했다.

“남녀가 만나 가정을 이루는 건 좋은 일이잖니. 행복한 엘더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것뿐이란다. 예쁜 아기들도 보고 말이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테프네트는 묘하게 ‘아기’와 ‘가정’에 집착하는 면이 있었다. 단순히 성격인 것일까, 아니면 신들의 게임에 참가하기 이전에 어떤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아스카는 이번에도 묻지 못했다. 그저 한숨만 길게 내쉰 뒤 고개를 끄덕였다.

“뭐, 조혼을 권장하는 만큼 안정적인 이혼 제도도 만들어야 한다고 보는 입장이지만… 영민이 말마따나 인구 증가가 급하기도 하니까.”

애당초 반대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조혼이 가지는 위험성을 다들 너무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 불만일 뿐이었다.

“자자, 서론들 끝났으면 신탁 개시?”

에드윙이 짐짓 웃으며 물었고, 17조 모두는 눈을 감고 의자에 몸을 깊이 묻는 것으로 응답했다.

신탁이 시작되었다.

☆ ☆ ☆

녹색유성은 몸을 비비 꼬았고, 이내 바닥에 축 늘어지는가 싶더니 뒹굴뒹굴 옆으로 굴렀다.

덩치는 산만 하지만 아직도 귀엽게만 보이는 동생의 결혼 소식을 전해들은 소감을 밝혔다.

“왠지 모르게 나도 결혼하고 싶다.”

“정말?”

회색곰이 화색이 되어 눈을 반짝였다. 녹색유성은 그쪽은 쳐다도 안 보고 답했다.

“너랑은 말고.”

“히잉.”

회색곰이 시무룩하든가 말든가 녹색유성은 그대로 계속 구르는가 싶더니 어느새 일어나 방을 나섰다.

사대신께서 하얀유성 빨리 장가보내라고 신탁을 내리셨다. 상대는 당연히 검은빛.

엄마에게 전해 듣긴 했지만 아직도 좀 실감이 안 가는 이야기였다.

하얀유성이 결혼한다? 그 덩치만 큰 꼬맹이가?

하얀유성과 검은빛이 잘 되기를 늘 기원하던 녹색유성이었지만 어쩐지 모르게 기분이 나빴다. 니 꺼 내 꺼 까부는 검은빛한테 하얀유성을 빼앗기는 기분이랄까?

녹색유성은 더 참는 대신 발걸음을 내딛었다. 일단 하얀유성을 붙잡고 이야기를 나눠 봐야 할 것 같았다.

여전히 겨울이었고, 밖은 쌀쌀했다. 그나마 마을을 북적북적하게 만들었던 새집 만들기도 거의 끝난 터라 여기저기 조용하기만 했다.

녹색유성은 집 앞에 삐딱하게 서서 생각했다.

요 덩치만 큰 꼬맹이가 어디에 가 있으려나.

신탁이 내린 것은 간밤의 일이었다.

‘총출동 하셨네.’

하얀 신님, 녹색 신님, 황색 신님.

아빠 번개폭풍과 엄마 녹색번개, 결혼의 당사자인 하얀유성 제각각 신탁을 받았다. 아무래도 정황상 작은나무 아저씨와 예쁜코 아줌마, 검은 빛 고 계집애도 신탁을 받은 것 같았다.

‘붉은 신님이랑 사냥 신님이랑 농경 신님이신가.’

신들께서 얼마나 하얀유성과 검은빛의 결혼을 바라셨으면 그러셨을까.

어쩐지 모르게 섭섭하면서도 질투가 났다.

땅을 탁탁 소리 나게 찬 녹색유성은 일단 대신전에 가보기로 했다. 신탁도 받았으니 검은빛이랑 찰싹 달라붙어서 사대신께 기도드리고 있지 않을까?

‘결혼이라.’

사실 예전부터 생각해온 일이었다. 둘은 서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고, 녹색유성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마을 사람들 모두가 두 사람 사이를 응원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언젠가 결혼하겠지’가 ‘이제 곧 결혼한다’가 되니 느낌이 달랐다.

둘이 결혼하면 살림은 어디서 차릴까? 검은빛 따라서 대지 마을에 가는 건 아닐까?

큰 마을에 남아도 문제였다. 지금 사는 집 나가서 새 살림 차리면 어떡하지?

‘그냥 검은빛만 쏙하고 우리 집에 들어와도 어째 이상하네.’

태어나서 이날 이때까지 녹색유성 자신은 언제나 하얀유성과 함께였다. 아마조네스들 말로는 바늘 가는데 실 따라 간다고 하던데, 아무튼 늘 붙어 다니는 한 쌍이었으니 말이다.

칼과 칼집.

둘이 하나.

그런데 이제는 아니었다. 검은빛과 하얀유성이 새로운 칼과 칼집이었고, 둘 사이에 자신이 끼면 그건 민폐였다.

엘더들의 결혼 시기는 대중없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다양한 종족이 근 십여 년 사이에 갑자기 서로 하나로 뭉쳤기 때문이다.

하얀사슴 아줌마나 엄마는 둘 모두 십대 후반에 결혼을 했다. 다른 곳에서 와 엘더가 된 이들도 보통은 십대 중후반, 늦으면 이십대 초중반에 결혼을 했다.

‘너무 빨라.’

하얀유성은 성인식을 마쳤지만 검은빛은 아직이었다. 건방진 계집애가 벌써 키는 녹색유성 자신과 거의 엇비슷할 정도로 컸지만, 그래도 아직 성인식도 안 치른 십대 초반 꼬맹이 아닌가.

‘이상하네.’

둘이 붙어 있는 것만 봐도 미소가 지어질 정도로 잘 되기를 바랐는데.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며 걷다보니 어느새 대신전 앞이었다.

녹색유성은 바로 들어가지 않고 정문 쪽에서 신전 안쪽을 슬쩍 넘겨보았다. 낮잠 시간인지 어린 엘더들이 저마다 담요를 덮고 쿨쿨 자고 있었다.

“동생 보러 왔니?”

녹색유성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대신전의 신관인 하얀발 언니였다.

“하얀유성이라면 안쪽에 있단다. 검은곰 님이랑 이야기 중일 거야.”

“어… 알려 주셔서 감사해요.”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한 녹색유성은 얼른 대신전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뭐 하나 잘못한 것도 없건만 왠지 모르게 못된 장난치다 걸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 녹색유성 왔구나.”

“누나.”

지난 십여 년 세월 동안 증개축을 거듭한 대신전 내부에는 방이 여러 개 있었다. 그중 제일 앞쪽에 있는 방 안에 마주 앉아 있던 검은곰과 하얀유성이 각자 녹색유성을 보고 아는 체를 했다.

녹색유성은 검은곰에게만 꾸벅 목례한 뒤 슬금슬금 방안으로 들어섰다. 평소와 달리 꽤 어색한 태도에 검은곰이 껄껄 웃었다.

“하얀유성 결혼 축하해 주러 온 거냐?”

녹색유성은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고, 하얀유성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검은곰은 이러니저러니 해도 자신 앞, 그러니까 하얀유성 옆에 앉은 녹색유성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마침 큰 마을에 와 있어서 다행이었지 뭐냐. 이런 기쁜 소식도 접하고 말이다.”

소금 마을의 실질적인 수장은 하얀사슴이었지만, 검은곰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엘더의 장군인 동시에 존경받는 무인인 그는 여간한 일이 없으면 소금 마을을 떠날 수 없었다.

녹색유성은 이번에도 무어라 말하지 않고 그저 입술만 삐쭉였다. 처음 보는 녹색유성의 행동에 하얀유성은 여전히 모르겠다는 듯 고개만 갸웃거렸는데, 검은곰은 조금 달랐다. 하얀사슴도 곧잘 이랬으니 말이다.

“너, 삐친 거냐?”

“뭘 삐쳤다고 그래요. 하나도 안 삐쳤어요.”

톡하고 건들 듯 물으니 바로 반응이 돌아왔다. 검은곰은 애써 웃음을 참으며 하얀유성에게 말했다.

“하얀유성아, 아무래도 네 누나가 너 장가간다고 섭섭한 모양이다.”

“섭섭해?”

하얀유성이 얼굴을 가까이하며 물었다. 어쩐지 모르게 신나 보이는 그 얼굴에 녹색유성이 인상을 찡그렸다.

“하나도 안 섭섭해, 이 바보야.”

하지만 목소리가 엉망이었다. 하얀유성이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누나, 울어?”

녹색유성은 눈을 깜박였다. 뺨을 따라 뭔가가 흐르는 게 느껴졌다. 당황한 녹색유성은 얼른 눈가를 문지르며 고개를 휙 돌렸다.

“안 울어! 눈에 뭐가 들어간 거야.”

되도 않는 거짓말이었다. 검은곰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하얀유성을 살짝 밀어낸 뒤 다시 한 번 녹색유성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얀유성은 큰 마을에 신방을 차릴 거란다. 그러니 너무 섭섭해 하지 마렴.”

녹색유성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자기가 왜 우는지 고민하던 것도 잊어버리고 하얀유성에게 물었다.

“대지 마을로 안 가고?”

“검은빛이 우리 집에 들어와서 살겠대.”

“우리 집?”

“응, 내 방 크잖아.”

하얀유성이 활짝 웃으며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눈을 깜박이는 것으로 당황을 표하던 녹색유성이 약간은 얼빠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어, 그럼 그냥 셋이 살자고?”

“그럼 누나 버려두고 나가 살아?”

당연한 걸 왜 묻냐는 태도였다. 녹색유성은 더는 참지 못했고, 하얀유성을 와락 끌어안았다. 하얀유성도 품에 쏙 들어오는 녹색유성을 마주 안았다.

“으이그, 이 귀여운 것.”

검은곰이 살짝 아프게 뺨을 꼬집자 녹색유성은 바로 몸부림을 쳤다. 풀 죽어 있던 게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기운이 넘쳐흘렀다.

‘누나나 여동생이 있었다면 나도 이랬을까?’

다시 한 번 싫다고 으르렁거리는 녹색유성의 뺨을 꼬집은 검은곰은 탁탁 소리 나게 바닥을 두드리며 말했다.

“좋아, 성인식도 마쳤겠다. 이제 곧 결혼도 한다니 내가 중요한 가르침을 내려 주마.”

“중요한 가르침이요?”

하얀유성과 녹색유성이 호기심에 눈을 빛냈다. 가끔 엉뚱해서 그렇지 엘더의 유력자인 검은곰이 아닌가. 그의 가르침은 거의 언제나 유용했다.

흠흠 헛기침을 터트린 검은곰은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녹색유성과 하얀유성 두 사람 외에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소리 죽여 말했다.

“그래, 이제 너희도 어엿한 어른이니 슬슬 성교유…… 억!”

어디선가 날아온 바구니가 검은곰의 머리를 강타했다. 녹색유성과 하얀유성은 반사적으로 문 쪽을 돌아보았고, 예상대로 벼락소리가 문가에 서 있었다.

“잘 나간다 했더니 또, 또.”

“아, 왜 그러십니까!”

검은곰의 반발을 들고 있던 다른 바구니를 집어던지는 것으로 묵살한 벼락소리는 자신에게 쪼르르 달려오는 녹색유성과 하얀유성을 한 번씩 안아주었다. 불만 가득한 얼굴로 입술을 삐쭉이는 검은곰에게 당부했다.

“그런 건 애들 엄마 아빠한테 맡겨. 괜히 신성마법 엉뚱한 데 쓰는 법이나 가르치지 말고.”

“신성마법요?”

녹색유성이 다시 눈을 반짝였지만 검은곰도 벼락소리도 더는 말해 주지 않았다. 어쩐지 모르게 검은곰이 얼굴을 붉혔다.

“사대신께서 신탁을 내리셨으니 서두르긴 해야겠지만, 그래도 일단 작은나무와 예쁜코가 큰 마을에 와야 본격적인 이야기가 진행될 거란다. 그러니 그 때까지는 너무 설치지도 말고, 걱정하지도 말고 있으렴.”

“네.”

“그래, 내 새끼들.”

녹색유성과 하얀유성의 엉덩이를 두드려준 벼락소리는 두 사람을 신전 밖으로 인도했다.

녹색유성과 하얀유성은 자연스럽게 손을 잡고 나란히 걸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늘 보여 왔던 자연스런 모습이었다.

그런 두 사람을 나무 위에서 훔쳐보던 회색곰이 물었다.

“두 사람 만난다고 했잖아. 안 불러?”

“안 불러.”

“왜?”

검은빛은 한심하다는 눈으로 회색곰을 한 번 쳐다봐 준 뒤 손가락으로 은빛 머리칼을 가볍게 꼬았다.

“하얀유성은 어차피 내 꺼 될 거니까. 요 며칠은 한발 물러서 줘야지. 괜히 이럴 때 끼어들면 언니 섭섭한 마음만 커진다고. 역효과야, 역효과.”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

“넌 몰라도 돼. 바보잖아.”

“바보 아닌데…….”

회색곰이 시무룩한 얼굴로 중얼거렸지만 검은빛은 신경 쓰지 않았다. 벌써 저만치 멀어진 녹색유성과 하얀유성의 뒷모습을 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푸근한 미소를 머금었다.

☆ ☆ ☆

“검은빛 저거 완전 여우네, 여우. 엄말 닮은 건가?”

대나무 숲에 드러누워 인계를 관찰하던 당아영이 혀를 내둘렀다. 바로 옆에 누워있던 영민은 영상속의 검은빛을 칭찬하듯 허공을 쓰다듬으며 단평했다.

“똘똘하네.”

“저런 건 똘똘한 게 아니라 영악한 거야.”

“하얀유성이 좀 많이 순진하니까 저 정도가 딱 좋지 않아?”

당아영은 그게 지금 무슨 소리냐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영민의 옆구리를 찌르며 말했다.

“하얀유성은 바보 회색곰이랑 다르게 똑똑해.”

영민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바보 아닌데, 하며 처량하게 어깨를 늘어트리던 회색곰의 모습이 떠올라서였다.

“회색곰도 바보는 아냐. 순진하고 착한 거지.”

“아무튼.”

당아영은 귀찮다는 듯 손을 놀려 허공에서 화면을 지워버렸다. 자연스럽게 영민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일이 잘 풀릴 것 같아. 결혼식 끝나면 축제도 열릴 테고. 한동안은 시끄럽겠네.”

엘더들은 커다란 규모의 축제를 준비 중이었다. 아마조네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했음을 축하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다시 한 번 하나가 된 엘더들 사이의 단결을 다지기 위한 통합의 축제였다.

사대신의 신탁을 받고 준비 중인 것이 아니었다. 엘더들 스스로가 통합을 위한 길을 모색하던 중에 생각해낸 일이었다.

영민은 손가락을 놀려 허공에 다시 화면을 만들어냈다. 높은 하늘, 신계에서 바라보는 엘더의 영토가 보였다.

다섯 개의 마을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수천 명의 엘더들.

“정말 많이 자랐네.”

“그러게.”

수십 명밖에 안 되는 엘더들을 이끌고 신천지를 찾아 나섰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사슴 노릇을 하며 번개폭풍에게 길을 인도하던 기억이 떠오른 당아영은 킥킥 웃었고, 영민 역시 새삼 떠오른 기억들에 미소 지었다.

“아영아.”

당아영은 영민의 품에서 고개를 들었다. 올려다보는 눈빛에 영민이 물었다.

“겁나진 않아?”

신화 연맹과 와이즈맨의 대결.

엘더 모두를 합친 것보다 많은 군사들이 맞부딪힌 전투.

당아영은 영민의 품을 빠져나와 그 옆에 누웠다. 예전 같으면 자존심 때문에라도 감추었을 속내를 자연스럽게 드러냈다.

“당연히 겁나지.”

17조는 마왕이나 마왕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신화 연맹에 어떻게 맞서 싸울지에 대해서도 아직은 논의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신화 연맹이랑도 싸워야 하고… 저 재수 없는 와이즈맨도 결국엔 적이니까. 엘더가 걱정 돼. 걱정 안 된다고 하면 거짓말이지. 겁도 나고.”

지금도 눈을 감으면 헥토르에게 죽기 직전까지 몰렸던 녹색유성과 하얀유성이 떠올랐다. 전쟁으로 인해 목숨을 잃은 엘더들의 울부짖음이 들리는 것 같았다.

“직접 싸우는 건 언제나 엘더야. 난 여기서 지켜볼 수밖에 없어.”

당아영은 허공을 움켜쥐었다. 언젠가는 펼쳐질 것이 분명한 싸움들을 머릿속에 떠올려 보았다.

북의 마왕과 대적하는 번개폭풍.

신화 연맹의 신혈자들과 싸우는 녹색유성과 하얀유성.

죽고 죽는 싸움터에 선 검은곰.

당아영은 다시 손을 내렸다. 온기를 따라 영민의 품에 안겼고, 애틋한 눈으로 영민을 바라보았다.

영민은 그런 당아영의 뺨을 어루만졌다. 이마에 입 맞추었고, 천천히 당아영의 얼굴선을 따라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울리는 요란한 알람 소리.

영민과 당아영은 거의 동시에 눈동자를 굴렸다. 허공에 펼쳐진 화면 가득 커다란 느낌표 문양이 떠올라 있었다.

영민은 당아영을 보았고, 당아영은 지금 열어보면 화낼 거란 눈빛을 보냈다.

“미안.”

영민은 손가락을 튕겨 에드윙이 보낸 메일을 활성화시켰다. 당아영의 앙증맞은 주먹을 맞으며 화면을 보았다.

‘가짜 신들의 연회.’

언제나와 같이, 예기치 못한 순간에 날아든 초대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