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ire

00204 Non-ash free

가부좌를 틀고 앉은 아진은 데벨로의 검을 떠올렸다. 예선전은 시간이 겹치는 경우가 몇 번 있어 눈으로 보지는 못했지만, 그럴 때는 영상으로도 몇 번이고 다시 보았다. 실제로 보았을 때에도 그랬다. 녹화된 영상을 계속해서, 느리게 돌려서 몇 번을 보았다. 본선에 진출한 후로는 그녀의 시합을 모조리 볼 수 있었지만, 그런 경우에도 영상으로 보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얻은 것은 별로 없었다. 데벨로는 상대를 언제나, 압도적인 실력차로 끝냈다. 대부분이 일검, 준결승에 이르러서야 몇 번 더 검을 휘두르는 것이 고작. 그것으로는 도움이 그다지 되지 않았다. 알게 된 것은 데벨로의 검이 무식할 정도로 빠르다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건 익히 알고 있던 것이고.’

오늘은 비무회의 마지막 날이다. 오늘이 지나면 일주일 간 이어졌던 흑백일원제도, 현우탄신제도 끝이 난다. 마지막 고비로군. 아진은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켰다. 오늘, 아진은 데벨로와 싸운다. 그리고 흑설향은 무진섭과 싸운다. 거의 일년 만인가. 아진은 가시의 숲에서 벌였던 데벨로와의 일전을 떠올렸다. 그때, 방심만 하지 않았더라면

“이제 와서 무슨.”

과거의 패배를 곱씹는 것은 나름대로 좋은 원동력이 될 테지만, 괜히 그것에 집착하여 심리를 압박하고 싶지 않았다. 아진은 피식 웃으면서 몸을 풀었다. 내공은 충만하게 차 있었고 컨디션도 좋았다.

‘아바타에 컨디션이 나쁜 날은 없겠지만.’

정신의 컨디션은 좋았다. 기분 좋을 정도의 긴장이 감돌고 있었고, 적당한 두근거림이 몸을 뜨겁게 만들었다. 그래, 몇 번이고 바라왔던 일이니까. 아진은 웃으면서 시간을 확인했다. 이제, 곧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무공을 점검했다.

천마신공, 에너지 드레인, 무영천류비결. 암기술은 아직은 드러내고 싶지 않지만.. 승리에 필요하다면 보여야겠지. 아진은 옷 안에 감춘 암기를 점검했다. 바스로델의 비늘로 만든 비수가 백 개. 이것으로 데벨로의 호신강기와 검을 뚫을 수 있을까? 뭐 어디까지나 만약의 경우니까. 일단 중점을 둬야 할 것은 체술이다. 데벨로의 재능이 있다고는 해도, 아진이 가장 자신있고 데벨로보다 뛰어나다고 할 것이 체술이니까.

시간이 되었다. 아진은 손을 들어 양 뺨을 가볍게 쳤다. 문제없다. 데벨로가 그때보다 강해졌던 것처럼, 아진 역시 그때보다 강해져 있었다. 질 수는 없지. 사부에게 소원을 빌 수 있는 기회인데. 아진은 가느다란 미소를 지으며 대기실을 나섰다.

“시작이군.”

염마는 붉은 수염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그의 뒤편에는 살천문의 무인들이 있었다. 흑백일원제 간에 누군가를 죽일 수 없다고는 하지만, 염마가 문주로 있는 살천문은 마교의 몰락 이후로 사파의 대들보라 할 수 있는 거대한 문파고, 염마는 사파 제일 고수라 칭해지는 인물이다. 무림맹. 정파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이곳에서 사파의 거두인 염마를 배제하려는 움직임이 있을 지도 모르는 일. 대비를 해 두어서 나쁠 것은 없다.

“검황은?”

“무진섭과 함께 있습니다.”

옆에 있던 사내가 대답했다. 그 말에 염마는 미간을 찡그리며 수염을 어루만졌다. 자칭 별호 검신, 무진섭. 그는 여러 가지로 염마의 신경을 쓰이게 하는 인물이었다. 갑자기 튀어나온 신비고수에, 끝을 알 수 없는 고강한 무공. 그런 그가 검황의 곁에 있다는 것은 염마를 상당히 난감하게 하고 있었다.

‘혈천마녀를 이쪽으로 끌어들여야 하는데.’

이번 천룡비무회에는 여러 가지 변수의 출연이 많았다. 비무회를 통해 출도하는 신비인이나 은거 고수는 예전에도 많았지만, 설마 정점 급의 절대고수가 둘이나 나타날 줄이야. 염마는 혈천마녀가 보였던 천상제를 떠올리며 몸을 떨었다. 그것은 그 어떤 속임수나 연출이 아니었다.

“혈천마녀가 혈유신룡의 스승이라 했었나?”

“예.”

남자는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끙.” 염마는 수염을 쓸면서 신음을 흘렸다. 혈유신룡은 혈문의 사람이다. 소문주인 백은표와 약혼까지 하여 혈문을 물려받을 입장인 그가, 살천문에 들어올 리가 없다.

‘일단 접촉을 해 두어서 나쁠 것은 없어.’

염마는 미간을 찡그리며 생각했다. 살천문이 경쟁하는 상대는 검황이 있는 천하제일가다. 그런 검황의 곁에 정체불명의 무진섭이 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이번 맹호비무회에서 보인 벽안검화의 실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염마조차도 저 나이에 저런 실력을 갖추지 못했고, 그것은 검황 역시 마찬가지이리라. 그러니 견제가 필요하다. 살천문에도 기라성같은 고수들이 있지만, 염마의 뒤를 이을만한 고수는 없다.

견제에 있어서 최적의 조건을 갖춘 것은 혈유신룡이었다. 거기에 무진섭에 비할만한 고수인 혈천마녀까지 곁에 있으니, 그를 살천문으로 영입한다면 능히 천하제일가를 견제할 수 있을 터.

‘일단 흑백일원제가 끝나고.’

혈문에 보낼 사절단을 준비해야겠군. 염마의 눈이 가늘어졌다.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 속에서 대기실에 있던 혈유신룡이 비무대 위로 오르고 있었다.

“만나게 돼서 다행이야.”

데벨로는 세 개의 검을 무장하고 있었다. 평범한 장검 두개가 양 허리, 그리고 긴 클레이모어가 등 뒤. 다섯 개의 검을 무장했던 베타 때와는 분위기도, 무장도 다르다. 성장했다는 의미일까? 아진은 데벨로를 향해 포권을 취했다.

“준우승 때 걱정했었어. 떨어지는 것이 아닐까, 하고.”

“떨어지는 편이 당신에게 나았을 겁니다.”

아진은 어딘가 나사가 하나 풀린 것 같은 데벨로의 눈을 마주보면서 말했다. 그 말에 데벨로는 입 꼬리만 올려 미소를 지었다. “아니야. 이곳에서 당신 외에 다른 사람을 마주쳤다면, 나는 그를 죽였을 거야.” 이거 완전 미친년이로군. 아진은 혀를 내두르면서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나도 죽일 겁니까?”

“죽이지 않아. 죽이면 무진섭과 검황이 화를 낼거야. 흑백일원제 기간에는 누구도 죽일 수 없으니까.”

“방금 전에는 다른 사람을 죽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응, 죽였을 거야.”

죽이지 않게 되어서 다행이야. 데벨로는 진지한 얼굴을 하고 머리를 끄덕거렸다. 그 모습을 보면서 아진은 머리를 흔들었다. 뭐라고 지껄이는 건지 모르겠군. 아진은 주먹을 쥐고서 자세를 잡았다.

“..다행이군요.”

“응, 다행이야.”

데벨로는 다시 입꼬리만 올려서 미소지었다. 섬뜩한 미소였다. 그녀의 탁한 푸른 눈동자는 아진을 예리하게 살피고 있었다. 먹이를 낚아채기 직전의 맹금류처럼 빛나는 그 눈을 보면서 아진은 직감했다. 저년은 만만치않은 또라이라고.

“지난번에 제가 패배했었죠.”

“응, 안타까운 결과였어.”

씨발년이, 약올리는 것도 아니고. 순간 미소가 경직되었지만 아진은 표정을 관리했다. “패자에 대한 예우로서, 제가 먼저 가도 됩니까?” 징이 막 울리려 하고 있었다. 팔을 교차 시켜서 허리에 올리고 있던 데벨로가 머리를 끄덕거렸다. “상관없어.” 그 말이 끝날 때, 징이 울렸다.

거리를 파고드는 것, 그녀의 거리를 자신의 거리에 침식시키는 것. 데벨로는 무기를 가지고 있다. 그녀가 커버할 수 있는 거리는 아진의 것보다 넓다. 검수와의 승부에서 기본은 속공이고 맹공이다. 검을 뽑아 휘두를 틈을 주지 않는 것. 아진이 주로 삼는 무기는 권각이다. 접근전으로 간다. 아진은 징이 울림과 동시에 데벨로에게 달려들었다. 일단은, 얼마나 빠른지 한 번 봐볼까. 아진은 달리면서 천마환영보를 펼쳤다. 극성으로 펼친 천마환영보였다. 열 개로 분영된 아진의 몸이 데벨로를 덮쳤다.

데벨로의 양 손이 허리의 검자루를 잡았다. 쐐액! 검풍이 몰아쳤다. 뽑힌 양 검을 손에 쥐고 데벨로의 몸이 풍차처럼 돌았다. 파파팍! 검이 닿을 거리가 아닌데, 검풍에 섞인 검기가 넓게 휘둘러지며 환영을 베었다. 이 정도로군. 가속된 사고 속에서 아진은 데벨로의 움직임을 보았다. 이것이 최속인가? 만약에 그렇다면

조금 실망이었다. 파앙! 아진의 몸이 더욱 빠르게 가속했다. 데벨로가 한 바퀴 돌았을 즈음 그는 이미 데벨로의 몸으로 주먹을 날리고 있었다. 붉은 강기가 넘실거리는 주먹이 데벨로의 허리를 으깨려 들었다. 데벨로의 자세가 바뀌었다. 그녀는 회전하던 무릎에 제동을 걸고 몸을 역방향으로 회전했다. 가지런히 세운 두 개의 칼날이 일제히 아진을 덮쳤다. 아진은 옆구리로 날아오는 검날을 바라보면서 혀를 쳤다. 호신강기로 버틸까? 모험은 하지 않는다, 아직은 탐색전이다. 쌔액! 데벨로의 검이 허공을 양단했다. 상체를 뒤로 젖힌 아진은 손을 뻗어 데벨로의 옷깃을 잡으려 들었다. 데벨로의 양 손에 있던 검이 빙글 돌았다. 두 개의 검이 먹이를 노리는 송곳니처럼 아진의 어깨 위로 떨어졌다. 아진은 물러서는 대신에 역으로 손을 뻗었다. 붉은 강기에 쌓인 아진의 손이 새빨간 뱀이 되어 데벨로의 검을 타고 올랐다. 아진의 손이 데벨로의 손목을 치려는 직전, 데벨로의 손 안에서 검이 다시 회전했다. 손목을 틀어 위로 쳐올리는 검이 아진의 겨드랑이를 노렸다.

‘여전히 대단한 반응속도야.’

사고의 가속까지 쓰고, 살신무로 완벽해진 육체를 따라잡다니. 하지만 재능은 재능일 뿐. 가졌던 재능에서 차이가 났다고는 하나, 그를 완벽하게 제련받은 아진의 반응속도는 이미 데벨로를 초월해 있었다. 쌔액! 데벨로의 검이 아진의 몸을 베었다. 절단난 환영이 흐릿하게 무너졌고, 아진은 품 안으로 손을 끌어 당기며 주먹을 쥐었다. 꽈앙! 내지른 주먹의 권강이 데벨로를 덮쳤다.

데벨로는 눈을 찡그리며 양 검을 고쳐잡았다. 그녀의 양 검이 태극을 그렸다. 콰앙! 두 개의 검이 그린 태극이 아진의 권강을 받아냈다. 하나의 공격, 아진은 멈추지 않았다. 다시 분영한 환영이 데벨로를 덮쳤다. 데벨로는 숨을 삼키며 검법을 바꾸었다. 그녀가 익힌 중천무한검결은 무진섭이 아는 모든 검법의 정수가 담겨져 있다. 데벨로의 검이 매화검법과 유운검법의 정수를 담았다. 흐릿하게 움직이는 검날에 매화의 꽃이 담겼고 검격이 구름을 만들었다. 콰콰쾅! 검화과 검기가 흩날렸다.

그런 데벨로의 화려한 검에 비하자면, 아진의 움직임은 단순하고 무식했다. 그는 먹이를 집요하게 쫒는 육식짐승처럼 몸을 낮추고 비무장의 바닥을 미끄러졌다. 휘두른 검에 틈이 생긴다. 튕겨 올라간 아진의 손이 데벨로의 목을 노렸다. 데벨로의 눈이 작은 경악을 담았다. 휘두르는 검이 늦어, 아니. 움직임이 읽히고 있었다. 데벨로의 검이 무겁게 변했다. 꽈앙! 떨어진 검이 비무대를 크게 흔들었다. 동시에 그녀는 다른 검을 방어를 위해 휘둘렀다.

“읏!”

늦었다. 데벨로는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왼 어깨가 욱신거리고 있었다. 튀어 오른 아진의 손이 데벨로의 어깨를 움켜 잡았던 것이다. 순간 펼쳤던 방어 초식이 절묘하였던 탓에 살점이 뜯기거나 뼈가 바스라지는 것은 피했지만, 짧게나마 잡혔던 어깨가 아릿한 통증을 전하고 있었다. 통통 튀는 걸음으로 뒤로 물러선 아진은, 데벨로의 어깨를 잡았던 손을 쥐었다 피면서 비릿하게 웃었다.

“뽑아버릴까 했는데.”

그는 그렇게 말하며 데벨로에게 손을 뻗었다. 데벨로는 입술을 잘근 씹으면서 팔을 털었다. 뼈도, 신경도, 근육도. 손상된 곳은 없었다. 그저 고통만 남았을 뿐. 괜찮아, 문제없어. 데벨로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숨을 들이켰다.

“내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데벨로를 보는 아진의 미소가 짙어졌다. 뻗어진 아진의 손이 주먹을 쥐었다. 그는 유쾌한 기분이었다. 데벨로의 반응속도는 아진을 따르지 못하고 있었다.

“준결승에서 내가 이기지 않는 편이 당신에게 나았을 거라고.”

쥐어진 주먹에서, 가운데 손가락이 우뚝 섰다. 만국공통의 욕이 데벨로에게 향했다.

============================ 작품 후기 ============================

신작으로 현대물인 테이커를 쓰고있습니당

카레라이스

@와 근데 생각해보면 묵언철왕도 빡치겠네요. 모든스텟 방어에 몰빵해서 물리공격면역수준으로 올려놨더만 망할 운영자(글라디올러스)가 hp무한패치를 해버림ㅋㅋㅋ

히든피스끼리는 몰라도 플레이어끼리의 싸움에서는 큰 도움이 되겠죠

택시드라이버

@아직 아진은 갈길이 먼듯하군요 초월자수준인 묵언철왕이라면 모를까 고작 1성의 신공을 강기로 부수지 못한다면..그건 강기가 아니죠..권기만 압축시킨 가짜일뿐..이정도 수준이면 혈문으로 복귀할때 설탕찡이 안막아주면 일검혈에게 털릴듯함..

아진은 굳이 따지자면 하이브리드고, 묵언철왕의 무공은 철저하게 방어형이니까요

rainmetal2

@그나저나 에너지 드레인은 생각보다 쎄군요?

연타로 짤짤이치면 뭘 맞아도 아플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