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ire

00463 Returning

소악희小惡姬. 문경희의 별호다. 본래 혈천맹의 군사를 맡고 있던 문경우가 은퇴하면서, 문경희는 새로이 혈천맹의 군사를 맡았다. 사파 무인들은 소악희라는 별호를 입에 담을 때에는 경외를 담았고, 정파인들은 소악희라는 별호의 앞이나 끝에 꼭 욕을 붙이면서 경멸과 두려움을 담았다.

구파일방의 멸문과 봉문. 진선 황가와 교류하면서 그들의 간섭을 막고, 그럴 듯한 명분을 갖다 붙이면서 정파를 억압. 그 과정에서 무림 명가라 불리는 수많은 가문들이 멸문지화를 당했고, 중소 방파 마저도 조금이라도 세가 크거나 주변의 지지를 받는다치면 강제로 문을 닫게 한다.

그 모든 것을 벌인 것이 문경희였다. 천마를 쓰러트리고, 천하쌍괴의 모든 것을 전수받은 혈천맹의 혈마가 폐관수련에 들어가고서 4년. 사실상 은거에 들어간 혈마를 대신해서 문경희는 혈천맹의 모든 살림을 도맡았다.

그리고 4년 만에 진선 무림에서 정파의 머리를 땅에 처박았다. 모든 정파 무인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지금은 암흑의 시대다.

무림에 몸을 담은 무인들만 그렇게 말했다.

“..서류, 서류, 서류.. 서류..!”

문경희는 핏발 선 눈으로 머리채를 쥐어뜯었다. 혈천맹의 최상층에 있는 맹주의 집무실. 은거했답시고 풍류를 즐기는 염마와, 그라시아로 떠난 혈마 때문에 혈천맹의 집무실은 문경희의 것이 되었다.

그리고 그 넓은 방은 가득 쌓인 서류의 감옥이 되어 있었다. 문경희는 저 서류를 포함해서 이 건물 자체에 불을 지르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해 보았고, 그래봤자 해야 할 일이 변하지는 않는다는 것에 절망했다. 당장 서류를 불태워 봤자 내일이면 이만큼의 서류가 다시 쌓일 것이다.

‘차라리 죽을까.’

최근 들어서 몇 번이나 했던 고민을 떠올리면서 문경희는 담뱃대를 입에 물었다. 뻑뻑 빨아들이는 연기가 썼다.

조율은 엿같은 것이다. 정파가 지배하던 지역을 장악한다. 그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다. 정파의 힘은 크게 줄었고 사파의 힘은 크게 늘었다. 적당한 사파 문파를 그쪽 지역에 파견하면 끝이다. 하지만 민중의 지지를 얻는 것은 무력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진선 황궁과의 관계 조율은 돈으로 전부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한다면 황군이 움직인다. 정면으로 충돌해 보는 것도 생각해 보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이쪽도 만만찮은 피해를 각오해야만 한다. 무림의 힘이 절정이었을 때에도 무림은 감히 진선 황궁을 어떻게 넘보지 못했다. 황제를 존중해서? 아니, 넘볼 수 없을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열심히 뒷구멍을 닦아 줄 수밖에 없는 거야.’

서류의 대부분이 민원이다. 혈천맹으로 직접 보내오는 민중들의 불만. 그것을 하나하나 수용하고, 적절한 방안을 찾아 대처한다. 사실 말이 사파지, 지금 혈천맹이 문파를 파견하면서 지역을 관리하는 것은 예전의 정파가 하는 일과 똑같았다.

“..하아..”

문경희는 힘없이 머리를 옆으로 기울였다.

“..쉬고 싶다..”

“많이 힘든가?”

목소리가 들렸다. 문경희는 화들짝 놀라 머리를 들었다. 그녀는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바라보았다. 열린 창문 쪽에 한 남자가 서있었다. 문경희의 눈이 크게 떠졌다.

“매, 맹주님!”

문경희가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그 외침에 아진은 머리를 갸웃거리면서 문경희를 보았다.

“..맹주? 내가 언제부터 맹주가 되었지?” “지금부터요!”

문경희는 헐레벌떡 뛰어오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서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문경희는 공손한 태도로 아진에게 절을 했다.

“..맹주님을 뵙습니다.”

“일어서.”

이게 대체 뭐람. 아진은 방 안을 가득 채운 서류의 산을 돌아보면서 생각했다. 그라시아를 떠나고, 진선으로 돌아오는 것은 혈천맹에게 알리지는 않았다. 괜히 요란을 떨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맹주님은?”

“전대 맹주님을 말하시는 겁니까?”

문경희는 ‘전대 맹주’라는 말에 힘을 주면서 물었다. 그 말에 아진은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서 머리를 끄덕거렸다.

“전대 맹주님은 은퇴하시고 살천문이 있는 광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뭐? 언제부터?” “1년 정도 되었습니다.”

문경희는 아진을 올려보면서 그렇게 말했다. 불만이 가득한 시선이었다. 염마의 은퇴는 전해 듣지 못했기에, 아진은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서 머리를 갸웃거렸다.

“..왜 나에게 알리지 않았지?”

“전대 맹주님의 마지막 명령이셨습니다. 노인네가 세상 일 잊고 푹 쉬고 싶다 하시니, 한낱 군사에 불과한 제가 어찌 그를 거역하겠습니까?”

빠득. 문경희가 이를 갈면서 내뱉었다. 아진은 쌓인 서류의 산을 다시 보았다.

“도망쳤군.”

아진은 상황을 완벽히 이해했다. 이 살인적인 업무량을 보니 염마가 도망치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전대 맹주님이 없는 동안 군사가 혈천맹을 굴리고 있었나.” “제가 아니면 누가 이 거대한 조직을 굴리겠습니까?” “마뇌는?” “제 빌어먹을 아버지도 은퇴하시고 광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지금 시간이면 전대 맹주님이랑 사이좋게 장기라도 두고 계시겠군요.”

문경희의 어깨가 부들거리며 떨렸다. 강제로 붙잡아 두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실패했다. 자식 이기는 부모없다는 말이 있지만 문경희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는 말이었다.

“..그렇군.”

“완전히 돌아오신 겁니까?”

문경희가 물었다. 그 말에 아진은 머리를 끄덕거리면서 가까운 서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맨 위에 있던 서류가 팔랑거리며 아진의 손에 들어왔다.

“..이게 다 뭔가?”

“혈천맹으로 들어 온 민원입니다.” “민원?” “예.”

아진은 서류를 읽어 보았다. 시답잖은 불만들이 적혀 있었다.

“그냥 무시해도 될 것 같은데.”

“무시하고 강압적으로 나갔다가는 황군을 적으로 돌리게 됩니다.” “적으로 돌려서 뭐 문제 될 것이라도 있나?” “..많죠.”

문경희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을 하고서 대답했다.

“황군이 가진 힘은 미지수입니다. 몇 천 년 동안 이 거대한 땅덩어리를 지배했고, 나라 안에 무림이라는 깡패 집단을 두고서도 단 한 번도 위협당한 적이 없었습니다. 괜히 그들을 자극해서 좋을 것은 없다고 봅니다.” “정면 충돌해서 이길 가능성은?” “..상대의 힘이 워낙에 미지수라..”

문경희는 말끝을 흐리며 대답했다. 아진은 서류를 제 자리에 돌려 놓으면서 피식 웃었다.

“밀정은?”

“몇 번인가 시도는 했으나, 대부분이 적발되어 밀정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습니다. 간신히 살아남은 놈들은 말단에서 머무르고 있고요.” “쓸모가 없군.” “저 말입니까?”

문경희가 뚱한 얼굴로 물었다. 그 질문에 아진은 피식 웃으면서 자신의 자리로 가서 앉았다.

“소악희라 불리더군.”

“듣기 좋은 별호는 아닙니다.”

“혹자는 씨발년이라고도 부르고.” “지금 저를 놀리시는 겁니까?”

문경희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아진은 낮게 웃으면서 머리를 가로 저었다.

“주인 없는 집단을 여기까지 이끌어 온 군사를 어찌 놀리겠는가. 단순히 세인들이 하는 말이 그렇다는 거야.” “언제부터 세인들의 입을 신경 쓰셨습니까? 맹주님은 혈마라고도 불리고, 씨발놈이라고도 불리고 계십니다. 호로새끼라고도 심심찮게들 하더군요.” “개새끼라고는 안 부르던가?”

피식 웃으면서 하는 말에 문경희는 할 말이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민원은 무시하게.”

아진의 손이 뻗어졌다. 쌓인 서류들이 손짓 한 번에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각 지역에 파견한 문파들보고 알아서 해결하라고 해. 그리고 내 복귀를 알리고. 괜한 짓거리를 하거나 능력이 없는 문파는 그 자리에서 멸문한다고 전해.” “..너무 과격한 것 아닙니까?” “주인이 바뀌었으니 과격해야지.”

아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혈천맹의 덩치가 너무 커졌어. 그런데 정작 그 주인으로 있는 놈이 꽁무니도 보이지 않고 위엄을 보이지 않으니, 시답잖은 개소리가 이곳까지 흘러오는 것 아닌가. 언제부터 자네가 뒷간 똥닦개가 되었나?” “..뭐, 맞는 말입니다만.”

문경희는 한숨을 쉬면서 머리를 흔들었다.

“신경 써서 문파를 파견하기는 했지만, 애초에 사파라는 배경에 물들었던 놈들입니다.” “사악할 사邪를 써서 사파라고는 해도 망나니짓을 하라 용인하는 것은 아니야. 정파의 자리를 빼앗았다면 어느 정도는 쓰레기 짓을 줄여야지. 확실하게 전하게. 개같은 짓을 했다가는 멸문지화를 당할 것이라고.”“..불만이 생길 지도 모릅니다.” “많이 유해졌군.”

아진은 문경희를 보면서 웃었다.

“내 낯짝에 찻물을 끼얹던 꼬마가 너무 나이를 먹었는가?” “..후우.”

문경희는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한숨을 쉬었다.

“이게 다 맹주님이 4년 동안이나 혈천맹을 비워둔 탓 아닙니까. 당장 저는 무공의 고수도 아니고, 괜히 미움을 샀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암살 당할 지도 모르는 입장이었단 말입니다.” “어떤 호로 새끼가 혈천맹 군사를 위협했지?” “..말하면, 조져주시겠습니까?” “어려울 것도 없지.” “녹림십팔채입니다.”

문경희가 냉큼 대답했다.

녹림십팔채. 본래부터 있던 놈들이지만, 녹림십팔채는 아진이 진선을 비운 4년 동안에 갑자기 두각을 보이기 시작했다. 깊은 산골짜기에서 오가는 상단을 습격하고 표국 물자를 빼앗는 등, 산적질에 열중하던 놈들은 4년 동안 급격한 성장을 이루었다.

‘그러고 보니.’

아진의 눈이 반짝 빛났다. 녹림왕이라는 놈에 대해서는 여러 번 들어 보았다. 게임 안에서가 아니라, 퍼스트의 게시판에서 말이다.

녹림왕은 플레이어다.

“4년 전, 녹림왕이 녹림십팔채의 정점에 서고.. 18개 산채들은 대격변이라 할 수 있는 변화를 겪었습니다. 대부분의 산채들이 쓸려나가고, 새로운 산채들이 18개 산채의 자리를 대신했지요. 그리고 놈들은 당당하게 혈천맹에 참여 의사를 전했고, 혈천맹은 그를 받아 들였지요.” “그 새끼들이 망나니 짓을 하는 모양이지.” “예. 민원의 대부분이 녹림에 대한 것들입니다. 놈들은 목줄 없는 들개무리처럼 날뛰고 있습니다. 양민들을 습격하고, 표국과 상단을 전멸시키고. 놈들을 제재하려고 해도 그 수가 많고.. 녹림왕이라는 놈의 무공 실력이 워낙에 만만찮아서.” “얼마나 강한가?” “..당장 혈천맹 안에서는 놈을 감당할 만한 무인이 없다고 봅니다.”

문경희가 뚱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 대답에 아진은 낮게 웃으면서 손으로 턱을 괴었다.

“나라면?”

“..하늘에 닿은 맹주님의 무공을 어찌 의심하겠습니까?”

쌓인 것이 많은 모양이군. 아진은 이죽거리는 문경희의 말을 들으면서 낮게 웃었다.

“녹림왕. 그 새끼는 어디에 있지?” “호원과 장선 사이에 있는 산 중에 무궁산이라는 산이 있습니다. 그 어딘가에 산왕채라고 하여 놈의 산채가 있는데.. 제대로 위치를 파악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 군사가 보기에는 어떤가. 내가 놈을 향해서 혈천맹으로 오라고 한다면.. 놈이 올 것 같나?” “안 오겠죠.”

문경희는 볼 것도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 말에 아진은 옆에 놓아져 있는 문경희의 담뱃대를 들었다.

“그러면 내가 가야겠군.”

자연스럽게 문경희의 담뱃대를 빨면서 아진이 중얼거렸다.

“그거, 제 것입니다만..”

“맹주가 피우겠다는데 뭐 불만이라도 있나?” “..저는 딱히 없습니다만.”

능글맞은 대답에 문경희는 입술을 삐죽거리면서 투덜거렸다. 잠시 동안 연기를 빨면서 생각에 잠겨있던 아진이 몸을 일으켰다.

“내 복귀를 모두에게 전하고, 녹림왕을 혈천맹으로 호출하게. 오든 오지 않든 상관없어.” “정말로 녹림왕을 조질 생각이십니까?” “군사가 조져달라고 하지 않았나?” “녹림왕이 지닌 세력은 상당히 큽니다.” “그래봤자 산 도적 새끼들이야. 그리고 나는, 주인이 없다고 머리를 치켜드는 망나니를 얌전히 두는 성격도 아니고. 군사도 알지 않나?” “잘 알죠.” “아, 그리고. 쓸만한 집을 하나 구해주게. 마당이 넓고, 담벽이 높은 집으로. 그리고..”

아진의 말이 잠깐 멈추었다. 아진은 문경희를 빤히 보면서 물었다.

“군사는 지식이 많겠지?”

“아는 것이 없으면 군사를 하겠습니까?” “어린 아이에게 뭔가를 가르친 경험은?” “..예?”

문경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